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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비를 긋고 가세요(한글새소식 제5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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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다 보면 문득 이곳이 우리나라인지 외국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외국어 간판들 때문입니다. 우리말 간판들이 점차 설 곳을 잃어가는 요즘, 아름다운 우리말로 간판을 단 가게 한 곳에 눈길이 머뭅니다.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에 자리 잡은 이 찻집의 이름은 '비를 긋다'입니다. 언뜻 보기에 '비를 긋다'라는 표현이 쉽게 읽히지 않을 겁니다. 보통 우리는 '긋다'라는 동사를 '밑줄 긋다' 혹은 '종이를 칼로 긋다'처럼 '어떤 일정한 부분을 강조하거나 나타내기 위하여 금이나 줄을 그리는', '끝이 뾰족한 물건을 평면에 댄 채 어느 방향으로 약간 힘을 주어 움직이는' 의미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긋다'는 그 의미들 말고 다른 뜻 하나를 더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비가 잠시 그치다.', '비를 잠시 피하여 그치기를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을 활용해 본다면 '처마 밑에서 비를 긋다.', '잠시 들어오셔서 비를 긋고 가시죠.'라고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찻집 '비를 긋다'는 아마 도심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비가 그칠 때까지 차 한잔의 여유를 갖길 희망하여 가게 이름을 지었을지 모릅니다. 또한 그치기를 바라는 것이 단지 '비'가 아닌, 자신을 뒤돌아볼 틈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 도시의 삭막함과 무표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찻집 '비를 긋다'처럼 아름다운 우리말 간판들이 더 많이 생겨나길 바라며, 오늘 하루만큼은 스스로 비를 긋고 마음속 여백 하나를 두는 것이 어떨지 희망해 봅니다.

(글·사진: 김 태효/한글학회 연구원)

 

―『한글새소식506(13)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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