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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편찬사업

사전 편찬은 오랫동안 한글학회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사전은 그 언어공동체의 사고와 정서, 그리고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국어연구학회 시절부터 주 시경 선생은 ‘말모이’ 편찬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국권까지 아예 잃게 되자, 조선어연구회 회원을 비롯하여 여러 선각들이 겨레 정신을 지키고 겨레 문화를 일으키는 바탕으로서 조선어사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9년에 마침내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창립하였으니, 그것이 한글학회가 한국어사전 편찬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1947∼1957년에 간행한 「큰사전」은 이후 모든 한국어사전의 본이 되었으니, 그 역사적 의의가 간단하지 않다. 그동안 한글학회에서 펴낸 갖가지 사전들은 소개하면 이렇다.



『조선말 큰사전』 (1957. 10. 9.)


1929년 음력 9월 29일(양력 10월 31일), 483돌 한글날에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회를 열고, “인류의 행복은 문화의 향상을 통하여 증진되고, 문화 향상은 언어의 합리적 정리와 통일로 촉진된다. 그러므로 낙오된 조선 민족을 다시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언어를 정리하고 통일해야 하는데, 그것을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조선어사전의 편찬이다.”라는 내용의 취지서를 발표하고 그 뒤 위원 등 조직을 갖추고 ‘일반어, 전문어, 특수어(고어, 방언, 은어 등)’로 나누어 수집한 어휘와 1920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펴낸 「조선어사전」(일본어 대역으로 편성한 어휘집)과, 1897년에 영국인 선교사 게일이 만든 「한영 자전」(영어 대역으로 편성한 어휘집)에 수록되어 있는 어휘들을 전부 수용하고 를 수집하고, 각종 신문·잡지·소설·시집 및 고전 언해·역사·지리·관제, 기타 각 전문 방면의 문헌들에서 널리 캐고 뽑았으며, 주로 방언은 「한글」의 독자들과 방학 때 시골로 가는 학생들에게 의뢰하여 캐어 모았다. 그리고 편찬원들이 분담하여 풀이(주해)를 해 나갔다. 낱말의 풀이는 짜임새(구성 형태), 말뜻 잡기(개념 규정), 쓰임새(용법·용례) 등의 실태 조사와, 실물·실감의 묘사 표현 등으로 해 나갔는데, 때로는 편찬원 각인의 책임으로, 때로는 상호 협조하는 방법으로 카드 작성을 진행하였다. 1940년 3월에 ‘출판 허가’라는 난관을 통과하고 1942년 9월에는 어휘 카드 대부분의 초벌 풀이를 일단 끝내고, 전체 체계 잡기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니, 주해를 완료한 낱말이 약 16만이고, 미완료가 약 5천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해 10월 1일부터 학회의 모든 업무가 중단되는 사태를 당하였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수난’이라 하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2년 10달 동안 사전 편찬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어학회의 모든 업무와 활동이 중단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아, 1942년 10월에 붙잡혀 갔다가 마지막까지 옥중에 갇혀 있던 학회 사람들까지 서울로 돌아왔으나, 사전 원고는 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 함흥으로, 경성(오늘날의 서울)으로 두루 알아보고, 각 방면의 인사들을 통하여 수색하였으나 찾을 길이 막연하였다. 9월 8일, 그렇게 찾던 원고가 예상하지 못했던 경성역(서울역) 운송부 창고 속에서 나왔다. 20년 동안 쌓고 쌓은 공이 헛되지 않았으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1947년 한글날을 기하여 「조선말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제1권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1949년 봄에 「조선말 큰사전」 제2권의 인쇄를 시작하여 5월 5일에 발행하였고, 이어 제3권의 조판과 인쇄를 서둘러서 1950년 6월 1일에 2만 책이 제본 중이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는 제4권의 조판까지 끝을 내었다. 그러나 뜻밖의 6·25 전쟁으로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두 번째 수난이 시작되었다. 6·25 전쟁으로 「큰사전」 출판 업무에 큰 상처를 입은 학회는 하루 속히 재기의 길을 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53년 1월 7일부터 전라북도 전주에 임시 사무소를 차리고 제5권, 제6권의 원고 수정을 계속하여, 5월 26일에 대체로 끝을 내었다. 「큰사전」 발간의 실무는 중단된 지(1953년 5월 이래) 약 3년 만인 1956년 4월부터 다시 계속할 수 있었다. 「큰사전」의 제1, 2, 3권은 이미 6·25 전에 출판되었으니 이제부터의 일은 제4, 5, 6권 원고를 결정판으로 만드는 일과 6권 전질을 계속 발행하는 일이었다. 「큰사전」 6권 전질을 망라한 총괄적인 부록을 작성, 첨가하는 일들을 추진하여 기어코 이듬해 한글날에는 「큰사전」 전질을 세상에 내놓기로 다짐하고, 1957년에는 우선 절판되었던 제1, 2, 3권들을 먼저 차례로 다시 박아내고, 이어서 제5권, 제4권을 새로 조판하여 각각 6월 30일, 8월 30일에 박아낸 뒤, 끝으로 그해 한글날인 10월 9일에 예정대로 마지막 부록까지 더하여 꼬리를 장식한 제6권을 성공적으로 펴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족으로부터 28년, 본격적인 편찬 실무 시작으로부터는 21년 만에 완성을 본 대장정이었다. 「큰사전」의 규모를 보면, 그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셈하면 25, 900매가 되며, 올림말 164,125개였으니, 그것이 4×6배판 3,558쪽, 6권에 실려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책의 첫 이름은 「조선말 큰 사전」이었다. 제1권 초판(1947.10.)과 재판(1949.07.), 그리고 제2권 초판(1949.05.)은 그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냈다. 그러나 학회의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꾼 사정과 같은 이유로 1950년부터 찍은 책들은 모두 “조선말”을 떼어 버리고 「큰 사전」이란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오늘날에는 그 사전을 고유명사적인 합성어로 “큰사전”이라 붙여 써서 일컫는다.



『중사전』 (1958. 6. 15.)


1957년 10월 9일로 「큰사전」 6권을 완간한 이후, 한글학회는 일반 대중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현대성과 실용성을 갖춘, 중형판의 사전을 편찬하기로 하였다. 「큰사전」에서 양적 정리를 하는 한편, 광복 이후 한동안 문란해진 한국어의 바른 표준을 잡아 주기 위한 새로운 말수 정리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1956년 문교부에서 발간한 「우리말 사용잦기 조사」의 말수와 ‘국정 교과서’에 나타난 새말 및 문교부에서 제정한 학술 용어들을 수록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한글학회는 그러한 방침을 곧바로 실행하여, 1957년 11월 1일의 이사회에서 ‘중사전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달 8일과 23일에 회의를 열어 사전 편찬 방법을 정하였다. 편찬실에서는 「중사전」에 반영할 「큰사전」의 올림말에 대한 검토와 정리, 그리고 새 올림말로 「우리말 말수잦기 조사」의 어휘와 ‘국정 교과서’에 나타난 새말과 문교부 제정의 학술 용어들에 대한 뜻풀이가 진행되었다. 인쇄소는 서울 중구 오장동에 있는 영세한 삼일인쇄소로 결정하고 1958년 3월 초에 완간한다는 계획에 따라 연말임에도 불구하고, 1957년 12월 20일에 원고를 인쇄소에 넘겼으나 지면의 반이 새까맣게 찍혀 나온 복자 상태였으므로 「중사전」의 조판과 인쇄를 맡길 업체 선정에서 손꼽히는 업체로는 동아출판사가 있었으나 학회에서는 조판비 가격만 보고 동아출판사보다 약간 싸게 제시한 삼일인쇄소를 선정하였다.
「중사전」 조판의 또 큰 어려움은 활자의 부족이었다. 「중사전」 조판에 필요한 8포인트 활자(씨글자)가 한글 명조·고딕·고자, 한자를 합하여 모두 12,700개인데, 1957년 말 현재로 삼일인쇄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은 7,900개였으니, 4,800개가 부족한 실정이었다. 부족한 것은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 있는 문교서적회사의 공장에서 씨글자(자모)를 가져다가 경편 자모를 만드는 한편, 거기 있는 4대의 자모 제조기에 기대야 했다. 그 중 2대가 한글학회 일을 할 수 있다 해도 1대가 하루 20개를 만들면 모두 하루 40개이니, 부족한 4,800개를 만들려면 120일이 걸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휴일은 빼야 하고 정전도 잦으니 6개월 걸려도 어려운 일이었다. 공장 시설과 능력으로 보아 「중사전」이 8개월 걸려서 나온다면 그것도 다행이라고 공장장인 상무가 판단하였는데, 전무와 학회 이사들은 그것을 3개월에 한다고 시작했으니 근본부터 빗나가고 있었다. 활자 공급이 순조로울 리 없어 애가 타서 생각해 낸 것이 ‘쪽자’였는데 그 수는 무려 2,000자 정도였다. 「중사전」 제작에는 방해 공작도 끊이지 않았다.

삼일인쇄소가 문교서적만 믿고 「중사전」 제작을 맡았는데, 그 문교서적에서 하필이면 「중사전」과 경쟁 관계에 있는 「표준 국어사전」(신 기철· 신 용철)의 조판을 맡았다. 그것부터 계획적인 방해 공작의 하나였다. 그런 가운데 동아출판사의 「국어 새사전」은 3월에 「중사전」보다 먼저 나옴으로써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고, 을유문화사의 「표준 국어사전」은 치열한 경쟁을 하다가 작업을 중지하고, 발행을 연기하여 「중사전」보다 뒤에 나오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중사전」은 1958년 6월 15일에 인쇄가 끝나고 18일에 본보기책이 나왔다. 결과로만 보면, 불과 반년 만에 1,757쪽(2단 조판)의 중형 한국어사전을 편찬·간행한, 기록적인 성과였다.



『소사전』 (1960. 4. 30.)


「큰사전」과 「중사전」의 발행에 이어 새 시대의 대중과 학생들을 위한 작은 사전이 필요함을 느꼈다. 1958년 9월 20일의 이사회에서 작은 사전의 편찬을 확정하고, 편찬 기구를 정비하였다. 「중사전」을 토대로 하되, 궁벽한 한자말, 옛 제도어, 잘 쓰이지 않는 말, 표준어 아닌 말들을 되도록 줄이고, 대신 새 교육용어, 각종 과학용어, 새 제도용어, 보편적으로 필요한 들온말(외래어), 또는 홀이름씨(고유명사)들을 널리 수록하였다. 「큰사전」에서 다루고 「중사전」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강 감찬, 강원-도, 강희-자전, 로마, 셰익스피어” 등의 홀이름씨를 거두어 실은 것이다. 뜻풀이에서는 이론적이며 추상적인 표현을 지양하고, 실용적이며 구체적인 표현으로 다듬어 편찬하였다. 정음사 부사장 최 철해와 상의하여, 우선 학회의 비용으로 인세 중에서 매달 4십만 환씩 6개월치를 선대하여 주기로 합의를 보아, 9월 29일 출판 계약을 맺었다. 원고는 12월 하순에 3분의 2를 넘겨주고, 그 다음해 1959년 1월 초순에 나머지 원고를 모두 넘겨주었다. 그러나 조판이 순조롭지 못하여, 1960년 4월 30일에 발간하였다. 4×6판, 2단 조판. 1,310쪽.


『새한글사전』 (1965. 4. 15.)


「중사전」을 현대성, 실용성에 적합하도록 보충·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1960년 5월 1일부터 편찬원들이 수정에 착수하여 그 해 11월 말에 끝내었다. 「중사전」과의 차이는 「소사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름, 땅이름, 책이름 등의 홀이름씨를 다룬 점이다. 교육과 교양의 실용성에 중점을 둔 조치였다. 정양사와 출판 계약을 맺고, 그 해 12월에 원고를 넘겨주었다. 정양사에서는 현대식 기계를 사들여서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여 조판에 착수하였다. 편집 체재를 새롭게 바꾸고, 이름도 「새한글사전」으로 고쳐서, 1965년 4월 15일에 홍자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5×7판, 2단 조판. 1,286쪽. 그리고 나중에는 출판권을 한글학회에서 회수하여 1986년 10월 9일에는 고친판 제1쇄, 1994년 3월 30일에는 고친판 제2쇄를 간행하였다.



『우리말 큰사전』 (1992. 4. 4.)


조선어학회에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우여곡절 끝에 「큰사전」을 완간하고 나서는 「중사전(1958)」, 「소사전(1960)」, 「새한글사전(1965)」 등을 편찬·간행하면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큰사전」의 최초 집필 시기를 1936년 전후로 잡으면 그 원고는 이미 30여 년 전의 것이었으므로 깁고 더할 내용이 많음도 알고 ‘「큰사전」 보유 편찬 사업’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말 큰사전(1991~92)」을 간행하게 된 것인데, 그 역시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최 현배 이사장을 주간으로 하여, 1967년부터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1971년까지 5년 동안에 홀이름씨를 제외한 30만 말수(어휘)의 증보 사전으로 완성할 계획이었다. 이 30만은 「큰사전(1947~57)」의 올림말 164,125개를 검토하면서 대략 15만의 새 올림말을 더하기로 한 수량이었다. 그 즈음에 가장 부피가 큰 한국어사전은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1961)」으로 올림말이 23만이었다. 그 사전에는 세계의 사람이름, 땅이름 등의 백과사전식 올림말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홀이름씨를 제외한 30만 올림말의 증보 편찬 계획은 당시로서는 큰 사업 계획이었다. 계획에 따라 우선 1968년에는 「큰사전」에 다룬 올림말을 오려 붙여 카드를 작성하였고, 셋째 해인 1969년부터는 뜻풀이에 착수하였다. 뜻풀이는 전문용어―언어학, 경제, 법률, 불교, 동물, 식물, 군사, 철학, 약학 등―부터 시작하였는데, 「큰사전」 전문용어는 고치거나 다듬고, 새 올림말은 각 전문용어 사전을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그때에 주로 참고한 사전은 위의 「국어대사전」이었는데, 「큰사전」 이후에 나온,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찬 업무는 정부 보조가 순조롭지 못하여 진행에 지장이 많았다. 1970년에는 보조금이 더욱 삭감되었고, 그 해 3월 23일에 최 현배 이사장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더욱 큰 고비를 맞게 되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동안에 하고자 했던 30만 올림말의 「큰사전」 보유 편찬이 1971년에 이르러 난관에 부딪쳤다. 해마다 줄어들던 정부 보조금이 더욱 삭감되었고, 1974년부터는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글학회는 어려움 속에서도 「큰사전」 보유 편찬을 중단할 수 없었다. 그 사업을 학회의 역사적 소명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찾아 노력하던 중, 1976년 1월 20일에 정음사의 제의를 받고 그 출판사와 ‘큰사전의 출판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전부터 편찬 업무를 이어 온 지 춘수, 유 중달, 조 재수 이외에 새 편찬원을 보충하여 일반 낱말 뜻풀이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새로운 과학 기술 용어 등의 수집에도 착수하였다. 학회는 자체 힘으로 그 일을 계속해 보기로 다짐하면서 편찬의 새 방향을 가다듬었다. 그 중 한 가지는, 편찬 주간 허 웅 이사장의 지시로 그간 한국어사전 편찬에서 제대로 적용해 오지 못했던 올림말에 대한 ‘보기 인용문’ 수집을 1979년부터 단행한 것이다. 정부 당국과도 교섭을 하여 새로운 큰사전 편찬 사업의 중요성에 비추어 정부 보조의 부활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도부터는 5개년 계획으로 문교부를 통하여 보조금을 받게 되고, 편찬 업무는 다시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79년부터 제대로 시작된 보기 인용문 수집은 1981년 6월까지 10만 개 목표에 약 8만 개를 모았다. 문예 작가 500여 명의 작품 가운데, 소설 1,150여 편(고전소설 66편, 신소설 40여 편 포함), 수필 2,220여 편, 그 밖에 시, 평론, 동화, 희곡, 동시, 시조 등에서 수집해 낸 것들이다. 그 대본(출전)들은 각급 학교 국어 교과서, 각종 교과서, 각종 작품집, 각종 잡지, 각종 신문 들이었다. 그리고 한국어사전 편찬의 기본적인 어휘 자료로서 「큰사전」 보유 카드 외에 그 뒤에 나온 3가지 사전, 곧 「새한글사전」(16만), 「국어대사전」(23만), 「새우리말 큰사전」(31만)의 올림말들을 풀이와 함께 카드화하였다. 그리고 기타 문헌 어휘 18만여 개를 합하여, 모두 88만여 낱말 자료를 한 올림말 카드에 붙여 30여 만 카드를 확보하게 되었다.
1981년 9월부터는 그 동안 편찬해 온 뜻풀이 카드와 다시 더 보태진 낱말과 보기 인용문 등의 자료를 가지고 본격적인 풀이에 들어갔다. 1985년에 원고 집필을 끝낼 목표였다. 그때부터 집필 원고지를 따로 만들어 썼다. 가로 15㎝, 세로 10㎝ 크기의 카드에, 가로 15칸, 세로 7칸(모두 105칸)으로 짠 원고지였다. 집필 원고 카드를 이 크기로 만든 것은, 한 올림말의 풀이에 쓰이는 평균 글자수를 고려한 것이었다. 대개의 올림말은 한 뜻갈래로서 뜻풀이와 예문 등을 적용하더라도 100자 이내에 담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여러 뜻갈래를 보이는 기본어나, 설명이 긴 전문용어는 여러 카드에 이어 썼다. 집필 원고는 펜과 타자로 기록하였다.
1988년 6월에 주식회사 어문각(대표: 전 선기)과 출판 계약을 맺고, 그해 7월부터 원고를 단계적으로 넘기되 1990년 6월까지는 모두 넘기는 조건으로 조판에 들어갔다. 책의 크기는 4×6배판으로 하고, 본문 조판은 2단으로 하기로 하였으며, 본문은 55g 인디언지에 1도 오프셋인쇄를 하되, 원색 화보는 4도 인쇄로 하기로 하였다. 어문각에서는 조판·편집 전문 업체인 서울기획(대표: 장 희일)을 한글회관의 1층에 들게 하여 일을 맡겼다. 그 업체의 조판 설비는 일본 모도야 회사가 개발한 일종의 사진 식자기였다.
언어 규범은 한글학회의 ·한글맞춤법(1933~80)·,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0)· 들을 원칙적으로 따랐으며, 말본 체계와 용어는 최 현배 지은 「우리말본」을 따랐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문교부는 「우리말 큰사전」의 출판 계약 시점을 전후한 1988년 1월 19일에 새로운 ·한글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을 고시했으며, 이듬해인 1989년부터 시행한다고 하였다. 1990년에는, 정부 조직 개편으로 어문 관련 업무를 넘겨받은 문화부에서 ·표준어 모음·을 고시하였다. 그런 규정은 부분적으로 달라지긴 했으나, 20여 년 동안 작성하여 조판 단계에 돌입한 수십만 어휘의 사전 원고를 바뀐 규정에 따라 일일이 고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맞춤법은 고치지 않고, 일부 새 표준어만 동의어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책을 내기로 하였는데 그 기회를 타서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보다 먼저, 동아출판사는 1989년 1월에 「동아 새국어사전」을, 금성출판사는 1991년 11월 20일에 「금성판 국어대사전」을 발간하여 새로운 어문 규정을 반영한 사전이라는 점을 영업 전략으로 내세우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1967년에 시작하여 몇 차례 중단될 뻔했던 「큰사전」 보유 사업은 1991년 12월에 「우리말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제1권을 내고, 다음해 1월에 제2권, 2월에 제3권, 4월에 마지막 권인 제4권을 내면서 끝을 맺었다. 25년 만의 결실이었다. 그 규모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올림말 수: 45만. ·판형과 조판: 4×6배판, 내용은 2단 조판. ·책수: 4권(현대말 3권, 옛말과 이두 1권). ·부피: 모두 5,504쪽(본문 5,496쪽). 제1권 1573쪽, 제2권 1851쪽, 제3권 1402쪽, 제4권 668쪽. ·발행일: 제1권 1991.12.15., 제2권 1992. 01.25., 제3권 1992.02.25., 제4권 1992. 04.04.

그런데 1996년부터는 4권을 내용 수정 없이 상·하 2권으로 발행하였다. 머리말은 허 웅 이사장이 쓰고, 일러두기는 조 재수가 작성하였다.



『전자사전 글 우리말큰사전』 (1996. 2. 1.)



1992년 4월 말께 「우리말 큰사전」 간행이 마무리되자 편찬원 대부분은 학회를 떠났다.다만 이 미경, 장 숙영이 남아 편찬실을 지키면서, 발간된 「우리말 큰사전」에 대한 검토와 새로 보충할 보기글 뽑기 등의 일을 하였다. 1994년에 김 슬옹이 편찬원으로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고려대학교 언어정보연구소에서 「우리말 큰사전」의 ‘현대어’ 부분을 입력한 파일이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일은 결국 1994년 9월에 학회와 고려대학교 언어정보연구소가 「우리말 큰사전」 전산 입력에 관한 계약을 맺고, 학회가 그 입력 결과물인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1,000만 원을 주고 사 온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학회에서는 그 입력 파일의 오타와 오류를 바로잡아, ㈜한글과컴퓨터에 넘겼고, 그 회사에서는 그것을 전자사전으로 제작하여 1996년 2월에 「·글 우리말큰사전」이란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글학회의 사전 편찬도 전산화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 토박이말사전』 (2001. 12. 15.)



한글학회는 사라져 가는 토박이말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우리말 큰사전(1991~92)」 파일에서 토박이말을 가려내어 일부 뜻풀이를 기워서 「우리 토박이말사전」을 편찬하였다. 이 미경, 장 숙영, 박 동근, 이 수란 등이 편찬을 맡아 보았다. 올림말은 약 13만 개였고, ㈜어문각에서 2001년 12월 15일에 찍어 내었다. 4×6배판, 2,136쪽. 그 사전에 실린 토박이말들 하나하나에는 한겨레의 숨결이 담겨 있고 한겨레의 정서가 스미어 있다. 그 낱말들은 온 겨레가 함께 닦고 가꾸어 가야 할 한민족의 보배인 것이다.


『우리말사전』 (2005. 12. 29.)


한글학회는 「우리말 큰사전」 파일에서 비교적 빈도수가 높은 낱말 약 15만 개를 가려내어 뜻풀이를 다듬고 보충하여, 2005년 12월 29일에 중사전 규모의 「우리말사전」을 간행하였다.


제작처는 ‘도서출판 글나래’이고 부피는 5×7판, 2,728쪽. 「우리말사전」은 「큰사전」을 완성한 이듬해인 1958년에 「중사전」을 펴낸 이후, 반세기 만에 새롭게 이루어 낸 ‘중사전’이다. ‘큰사전’이 한 언어의 어휘를 모두 모아 수록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면, ‘중사전’은 실제 말글살이에 꼭 필요한 어휘들을 수록하여 부피를 줄임으로써 누구나 가까이 두고 볼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이 있다. 1958년의 「중사전」이 「큰사전(1947~57)」을 바탕으로 한 데 비하여, 이 「우리말사전」은 「우리말 큰사전(1991~92)」을 바탕으로 2003년 10월부터 만 2년 남짓 편찬하였다. 이 미경, 장 숙영, 박 동근, 이 수란 등이 이 사전의 편찬을 맡아 보았다. 한글학회에서 「우리말사전」을 펴내게 된 것은, 「우리말 큰사전」이 나온 지 14년이 지나 겨레 말글 사용 환경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말 큰사전」이 정부의 어문 규범을 따르지 않아 사용자에게 다소 혼란과 불편을 주었고, 그마저 동이 나서 새로 구할 수 없게 된 데다가, 온 겨레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중사전이 필요했던 까닭도 있었다. 「우리말사전」은 말글 사용 현실을 존중하여, 현행 어문 규범을 모두 수용하고 학교문법 용어도 그대로 따랐다. 그러고도 「우리말 큰사전」의 다듬은 형태로 펴내었으니, 체제나 기술 방식에서는 한글학회의 한결같은 한겨레말 살리기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36. 10. 28.)

조선어연구회에서는 일찍부터 조선어사전 편찬의 이상을 품고 실천 방안을 모색하여 왔으나, 모든 여건이 자유롭지 못한 시대 상황이라 첫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삼일항쟁 이후 조선총독부의 시책이 조금 눅어진 틈을 노려, 각계의 민족 유지 108명의 뜻을 모아 1929년 10월 31일의 한글날 기념식 자리에서 사전 편찬의 이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조직체로서 ‘조선어사전 편찬회’를 조직하였다. 그럼으로써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이 비로소 사회적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표준어 사정 결과를 완결하여, 그 내용을 1936년 10월 28일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으로 간행하였다. 그 책은 5×7판으로, 122쪽의 ‘본문’과 118쪽의 ‘색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쇄비는 김 용기가 출연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 책의 간행에 맞추어 ‘사정한 표준말’ 발표식을 가졌다. 발표식은 1936년 10월 28일의 490돌 한글날을 기하여, 그날 오후 6시에 경성 인사동에 있는 천향원에서 교육계·종교계·문예계·언론계 등의 명사 1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글날 축하회와 겸하여 가졌다.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은 표준어 사정의 최종 결과를 종합하여 간행한 책이다. 속표지 뒷면에 “사정 어휘 수”라는 제목 아래 “표준어 6,232. 약어 134. 비표준어 3,082. 한자어 100. 총계 9,547”라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그 책에 올린 낱말이 9,500여 개임을 알려 주는 것인데, 그 9,500여 개는 같은말(同義語), 비슷한말(近似語), 준말(略語), 부록으로 분류하여 수록해 놓았다.



『쉬운말 사전』 (1967. 1. 30.)

한글학회는 관공서와 일반 사회에 대해서 “왜말과 어려운 한자말을 쓰지 말자”는 교섭, 건의, 운동 등을 꾸준히 하였다. 광 복 직후에는 자매 조직체인 한자폐지회와 한글문화보급회를 통하여, 1949년 이후에는 한글전용촉진회를 조직하여 활발한 운동을 벌였다. 1949년의 한글날에는 진단학회와 한글전용촉진회와 공동으로 ‘왜색 간판 일소’ 선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1962년에 들어서,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한글전용에 관한 건의를 한 성과가 나타났다. 최고회의에서는 한글전용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적극 펴기로 하고, 2월 5일에 ‘한글전용 특별심의회’를 문교부에 두게 하였으며, 4월 17일에는 모두 9개 조로 구성된 ‘한글전용 특별심의회 규정’을 공포하였다. 그 규정에 따라, 4월 27일에는 부위원장으로 한글학회 이사장 최 현배를 선출하고, 6개 분과의 심의 위원을 선출함으로써 ‘한글전용 특별위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그 밖에 한글학회 직원으로 전문 위원과 간사와 서기도 위촉하였다. 한글학회에서는 문교부의 협조 요청에 응하여 6월 19일에 이사회를 열어, 4월 27일에 편성이 완료된 한글전용 특별심의회의 사업을 한글학회 1962년도 사업의 하나로 채택하고, 정부에서 추진하는 한글전용 정책 수행에 긴요한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국 한글학회에서 그 심의회의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글전용 특별심의회의 일이 마무리되어 가자, 1963년 7월 19일의 한글학회 이사회에서는 「한글전용 특별심의회 회보」 제1~5집에 실린 자료를 바탕으로 ‘한글전용 사전’을 편찬·발행하기로 결의하고, 정 인승(주간), 최 현배, 장 지영, 유 제한, 한 종수, 최 상덕을 편찬원으로 선정하였다. 편찬원들은 「회보」에 게재된 14,159개에 「우리말 도로찾기」와 그 동안 각 분야에서 이룩한 용어 제정의 결과를 반영하여 새로 1,765개를 보충하여, 모두 15,900여 개 올림말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책이름은 「회보」에서 사용한 “쉬운말 사전”을 가져와서 그대로 붙였다. 정음사와 출판 계약을 맺었고, 1965년 2월에 완전히 교정을 끝냈으며, 1967년 1월 30일에 책이 나왔다. 포켓판, 426쪽의 작은 책자였다.한글학회에서는 자체적인 말다듬기를 진행하여 「쉬운말 사전」을 간행하는 일 외에도 각종 용어를 다듬는 일을 끊임없이 벌였다.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진행하기도 하였고, 외부 기관의 의뢰에 적극적으로 응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과학 용어 제정 사업, 범죄 수법 용어의 제정, 음식·미용·이발·당구 업계의 용어 제정, 조폐 관계 용어의 제정, ‘한글 농업용어’의 감수 등의 일을 하였다.



『고치고 더한 쉬운말 사전』 (1999. 12. 30.)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사회는 산업 사회로 발전하였고, 그에 따라 한국어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노력이 필요해졌다. 문교부에서는 1976년 11월 25일에 ‘국어순화운동 기본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한글학회에서는 1980년 12월에 허 웅(위원장), 정 인승, 류 제한, 김 성배, 한 갑수, 이 강로, 정 재도, 김 계곤으로 ‘말다듬기 위원회’를 구성하고, 조 재수를 간사로 선정하였다. 말다듬기 위원회는 그 동안 각계 단체와 정부 부처에서 시행해 온 심의 자료와, 한글학회 자체로 수집한 한자어 및 외국어 등을 중심 대상으로, 한글학회에서 정기적으로 회의를 벌였다. 그 첫번째 모임은 1981년 1월 24일에 열었고, 매주 한 번씩 모임을 가져 1983년 3월 3일에 마무리하였다. 그 결과를 1984년 9월 10일에 「고치고 더한 쉬운말 사전」으로 간행하였으니, 4×6판, 804쪽이었다. 올림말 수는 처음판(1967.03.)보다 훨씬 많은 28,883개였는데, 일본어 계통 찌꺼기를 다듬은 것이 1,666개, 영어 계통이 1,849개, 프랑스어 계통이 75개, 독일어 계통이 28개였으며, 나머지는 일·영·프·독 이외의 언어 계통이 소수이고 절대다수가 한자어였다.



『깁고 더한 쉬운말 사전』 (1999. 12. 30.)



‘고치고 더한 판’(1984.09.)을 펴낸 지 10년이 갓 지난 1995년 12월에 ‘고치고 더한 판’의 전산 입력 작업에 착수하여, 1996년 12월에 완료하였다.
그리고 1999년 1~3월에는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쓰기 사전」(한길사, 1998), 「바른 말글 사전」(한겨레출판사, 1996), 「국어순화 용어 자료집」(문화체육부, 1997)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전산 입력하였다. 그렇게 입력한 자료들을 박 동근이 총정리하여 대조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치고 더한 판’(1984.09.)에 없는 낱말로서 특별히 문제가 없는 것은 그대로 수용하고, 서로 다르게 처리된 낱말이나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낱말은 말다듬기 회의에 붙였다. 그 밖에 언론기관이나 개인이 다듬어 펴낸 자료, 한글학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자료도 참고하였다. 말다듬기 위원회는 허 웅(위원장), 김 계곤, 이 강로, 정 재도, 조 재수, 김 정수로 구성하였다. 1999년 3월 16일에 첫 회의를 시작하여 1999년 8월 24일까지 39번의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때마다 약 50개 낱말씩, 모두 2,000개 가량을 심사하였다. 심사 결과 약 150개 낱말은 처리를 보류하였다. 그렇게 심사하고 정리한 결과를 1999년 12월 30일에 깁고 더한 쉬운말 사전이란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새5×7판, 1,150쪽. 편집 과정에서 이 미경, 장 숙영, 이 수란이 교정을 보았다. 올림말 수는 ‘고치고 더한 판’보다 8,400여 개가 늘어난 37,200여 개였다.



『한국 지명 총람』 (1986. 8. 20.)


1960년 7월 20일, 한글학회 이사장 최 현배는 연세대학교 총장 백 낙준과 만나, 미국 하버드대학의 원조로 연세대학교 동방문화연구소에서 계획한 ‘한국지명 조사 사업’의 첫해 몫(경기도 전부)을 한글학회에서 실무를 맡아 대행하기로 우선 합의하고 8월 17일의 한글학회 이사회에서는 그 합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한 뒤 1964년 7월에 ‘한국지명 조사 사업’이란 이름의 5개년 계획(1964~65년도: 경기도, 서울특별시. 1966년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1967년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 1968년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부산직할시.)으로 국고 보조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현지 조사는 착수한 지 13년 만인 1977년에야 끝을 맺었다. 매우 아쉽지만, 이북 5도의 땅이름 조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14년 동안에 조사한 지역은 11개 광역시·도, 30개 시, 20개 구, 139개 군, 91개 읍, 1,382개 면, 18,528개 리였으며, 땅이름 700,000여 개를 수집하였다. 경기도는 지명 조사를 시작한 1964년과 1965년에 답사하였으나, 휴전선 지대를 포함하여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은 그때에 하지 못하고 1976년과 1977년에 조사하였다. 편찬실에서는 현지 조사를 통하여 수집한 땅이름(과 그 위치와 유래 등)을 광역시·도·구·시·군·동·읍·면·리 단위로, 가나다순으로 원고를 작성하였다. 한편에서 지명 조사를 진행하면서, 1966년에는 정리가 끝난 원고를 인쇄에 부쳐 한국 지명 총람이란 이름으로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4×6배판 크기에, 제1권은 ‘서울편’인데, 1966년 2월에 간행하였다.
그런 식으로 제2권인 ‘강원편’을 1967년 12월에, 제3권인 ‘충북편’을 1970년 11월에 간행하였다. ‘충남편’부터는 수록할 땅이름이 많아 2~4권으로 분책하여 간행하였으며, 편찬·간행 중에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으면 그 결과에 따라 체제를 수정하여 간행하였다. 그렇게 하여 1986년 8월에 ‘경기편 하’를 간행함으로써, 마침내 모두 20권으로 된 「한국 지명 총람」의 출판 사업을 끝맺게 되었다. 편찬과 간행에만 20년이 걸렸으며, 지명 조사 사업에 착수한 때로부터 치면 26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 땅이름 큰사전』 (1991. 12. 3.)


『한국 지명 총람』은 행정구역별로 편집되어 있기 때문에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한국 지명 총람』20권에 수록된 모든 땅이름을 』 (일부 보완하여)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여, 1991년 12월에 『한국 땅이름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4×6배판으로 모두 6,206쪽이고, 제책은 상·중·하의 3책으로 하였다. 그 사전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한국의 땅이름을 연구하고 살펴보는 데에 큰 편의를 주게 되었다.



『한국 땅이름 전자사전』 (1998. 12. 30.)


1998년 12월에는 『한국 땅이름 큰사전』을 전산화하여 시디-롬으로 제작한 『한국 땅이름 전자사전』(1.0판, 윈도 95/98/NT용)을 세상에 내놓았다. 날로 발전하는 정보화 시대에 컴퓨터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문화관광부로부터 국고 보조금을 지원 받아 완성하였다.



『국어학 사전』(1995. 6. 30.)

광복 이후 30여 년 한국 언어학의 발전을 뒷받침할 ‘국어학 사전’ 편찬을 꾀하여 1980년 3월부터 1981년 4월까지 이 기갑이 그 자료 수집의 일을 맡았다. 그 결과 음성·음운, 말본, 의미, 방언, 문자, 국어사, 국어학사, 일반언어학, 책이름·사람이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6,500여 개 술어를 모아 편찬 준비를 끝내었다. 1995년 6월 30일, 한국어학의 갈말(학술 용어)을 샅샅이 거두어 담고, 또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는 갈말을 다듬어 『국어학 사전』을 펴냈다. 크라운판, 1122쪽.
이 사전의 가장 큰 특징은 순수한 한국어의 갈말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다시 창조해 낸 점이다. 한힌샘 주 시경 스승 이후, 많은 제자들이 개척해 온 독자적인 학문 이론과 고유한 갈말이 있는데도, 외래문물에 빠져 있는 일부 학자들은 한사코 그것을 모르거나 무시한다. 그와 같은, 일본에서 들여온 한자 술어와 서양에서 들여온 서양말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하여 이 사전을 편찬하여 간행한 것이다.



『국어학 자료은행 편람』(1996. 12. 16.)


1996년 12월 16일에 한국어학 논문 20,375편을 데이터베이스화한 ‘국어학 자료은행’의 구축을 완료하고, 그것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국어학 자료은행 편람』제1~4권을 따로 펴내었다. 편람은 각권 4×6배판에, 1,029쪽씩이다. 제1권: 글쓴이로 찾기, 제2권: 논문 제목으로 찾기, 제3권: 실린 곳으로 찾기, 제4권: 펴낸데로 찾기.

 


전자 사전 " 한글 우리말 큰사전"은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을 모태로 한 우리 나라 최초의 전자 국어 사전이다.

 이 전자 사전은 "(주)한글과컴퓨터"에서 윈도우즈용 프로그램으로 개발한 것으로 국어 사전을 CD롬 타이틀로 제작한 우리 나라 최초의 것이다.

 이 전자 사전은 40만에 이르는 방대한 어휘를 수록하고 있어 사용자가 찾고자 하는 어휘는 거의 검색해 낼 수 있으므로 국어 전자 사전의 시대를 열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 한글 우리말 큰사전 1.0 : 1996년 2월 출시된 최초의 전자 국어 사전으로 으뜸꼴 자동인식 기 능, 아무개 문자를 이용한 검색 기능, 히스토리 기능 등 다양한 기능을 지닌 전자 국어 사전이다.
(2) "한글 우리말 큰사전" 96 : 1996년 10월 출시된 전자 사전으로 '한글 우리말 큰사전 1,0'의 기능 을 향상하여 나온 제품이다. 이번 판에서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기능은 역순 검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꽃'을 입력하면 '꽃'으로 끝나는 모든 낱말을 찾아 준다. 또한 검색한 목록상자는 파일 저장도 가능하다.  

(3) 사용 환경 : 386이상의 PC면 되고, 운영체제는 WINDOWS3.1/ WINDOWS 95이며 8MB이상의 메모리를 권장하고 있다. 전부 설치의 경우 31M, 최소 설치의 경우 11M의 설치 공간이 필요하 다.

 

※ "한글 우리말 큰사전(전자사전)"이 데이터 수정 보완 및 경제 사정으로 인해 개발이 중단되었습니다. 앞으로 데이터 보완과 함께 더욱 새롭고 유익한 전자사전 형태로 여러분 곁으로 다가갈 것을 약속 드립니다. 얼마 동안 불편하시더라도 새 전자사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