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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한글학회에서는 여건과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여러 성격의 기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목적으로 보면 연구, 말글 운동, 기념사업, 재정·경제 등을 위한 기구가 있었는데, 1930~40년대에는 재정·경제 전담 기구를 설립하거나 운영한 실적이 많았다.


조선어학회 출판부

조선어학회에서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여 발표하고 나서 1933년 12월 무렵에 “조선어학회 출판부”를 설립하였다. 그것은 임의 단체인 조선어학회의 한 부서가 아니라 법에 따라 등록한, 별개의 사업체였다. 출판사와 같은 체제를 갖추었으며, 운영과 회계를 독립적으로 하였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조선어학회와 한 몸이었으며, 사무실의 주소도 같았다.
이 “조선어학회 출판부”는 1927~28년에 동인지 『한글』을 발행하던 “한글사”를 계승한 셈이었으니, 대외적으로는 “한글사”라고도 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출판 업무, 특히 기관지 『한글』의 편집·발행·보급에 관한 일을 제1차적으로 수행하였다. 지방 곳곳에 많은 “한글지사”를 설립하고 운영하여 『한글』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출판물의 보급에 큰 성과를 거두었고, 다른 출판사에서 발행한 도서도 광범위하게 판매·보급하였다.
조선어학회 출판부의 책임은 처음부터 이 윤재가 맡았다. 그는 물심양면 희생적으로 출판부를 경영하였으며, 사위 되는 김 병제가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3년이 지난 1937년 6월 7일의 이른바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이 윤재가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자 조선어학회 출판부의 활동도 축소되었다. 『한글』 발행 업무는 다시 조선어학회로 넘기고, 각종 도서를 판매하고 보급하는 일만 이어 가던 중에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수난을 당하였다. 그때까지 출판부의 일선 업무는 이 석린이 도맡아 수고하였다.


한글사

8·15 광복 후, 1946년 2월 3일의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회세의 확장에 따라 학술적 사무의 수행에 병행하여 업무적 활동을 담당할 기구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급격히 달라진 사회·경제적 상황에 부응하려면 조선어학회의 경제적 사무와 활동을 전담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결론이었다. 그 결의에 따라 1946년 2월 12일, 조선어학회의 부설 기구로 “한글사”를 창립하였다. 멀리로는 1927~28년에 동인지를 발행하던 ‘한글사’를 계승하고, 가까이로는 1930~40년대의 ‘조선어학회 출판부’를 재건·확대한 셈이었다.
15개 조로 구성된 정관도 제정하였다. 목적은 “조선어학회의 사업 운영을 경제적으로 원조함”이었고, 할일은 “조선어학회에서 편찬하는 모든 간행물의 출판·판매와 기타 필요한 사업을 경영함”으로 규정하였다. 운영 자금은 조선어학회의 출자금과 사원(社員)의 원조금으로 조달하는데, 사원은 원조금의 액수에 따라 1만 원 이상 내면 특별사원, 1천 원 이상 내면 보통사원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사장 1명, 전임이사 1명, 이사 약간 명, 감사 2명”의 임원을 두기로 규정하였다.
정관에 따라 상무이사에 신 태수를 초빙하였고, 김 원표, 안 석제, 최 창식을 직원으로 두었다. 신 태수는 전북 고창중학교와 함북 길주고등여학교 교장으로 재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진용을 대충 갖추어, 우선 중단된 기관지 『한글』의 속간을 서둘러 그해 4월에 속간호, 제94호를 간행하였으며, 광복 이전에 간행한 조선어학회 저작물들을 다시 간행하였다. 그 밖에 여느 출판사와 같이 새로운 교과서도 발행하고, 연구 자료도 간행하였다. 그리고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까지 지사를 모집하여 『한글』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출판물의 판매를 늘리는 데에 노력하였다(☞제Ⅷ장의 2.2). 그러나 1947년 12월 30일에 신 태수가 한글사를 그만두고 직장을 옮기면서 한글사의 활동은 위축되었으며, 그에 따라 1948년 7월 18일의 조선어학회 이사회에서는 한글사의 업무는 조선어학회로 합치고 명의만은 존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재단법인

8·15 직후부터 종전의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중심이 되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고 자금을 모집하였으나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는 중에 한글사가 유명무실해지자, 한글학회의 재정 관련 업무를 뒷받침할 기구의 필요성이 시급해져 1948년 말엽에 그 준비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으며, 변호사 박 원삼의 도움을 받아, 1949년 3월 24일에 “재단법인 한글집”을 설립하였다. 당시의 기본재산은 한글학회의 기존 재산과 이 중화·최 현배·장 세형·정 세권이 기부한 대지와 토지(논, 밭)였는데, 이를 기본재산으로 ‘재단법인 한글집’이 출발하였다.
그렇게 설립한 재단법인은 한글학회의 재정 관련 업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1961년 9월 9일에 “재단법인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글학회가 창립 이후 한말글운동을 펼쳐 오는 중에 뜻을 같이하며 동참해 준 단체가 적지 않았고, 광복 이후로부터 오늘날까지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여러 단체들이 한말글운동을 펼쳤다. 그 가운데 한글학회가 주동하여 조직하였거나 한글학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병설 또는 부설로 운영한 기구 및 단체도 있었다.
이와 같은 기구와 단체는 한글학회의 한말글 운동, 그리고 한글학회의 발전사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이 자리에 소개하는 것이다.


한자폐지회

한자폐지회는 1945년 11월 30일에 창립되었으며, 이 극로가 위원장이었다. 다음과 같은 “강령”과 “실행 조건”을 제정하였으니, 이를 통하여 그 회의 목표와 주장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 하나하나가 매우 적절하고 타당할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이미 그때에 한국말과 한글의 국제화까지 목표로 내세웠다. 그런데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얼마 뒤에 한글문화보급회가 창립되면서 자연히 그 쪽으로 흡수·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한글문화보급회

한글문화보급회는 8·15 광복 직후에 조선어학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에 조선어학회 이사는 모두 고문(이 극로, 최 현배, 김 윤경, 장 지영, 정 인승, 김 병제)이나 명예 회장(이 희승)이었고, 회장은 정 열모, 부회장은 유 치웅이었다.
1948년 3월 29일에 임시 중앙위원회를 열어 체제를 바꾸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위원장에 이 극로, 부위원장에 정 인승·김 병제를 선임하였으며, 각 부서의 담당자를 전면적으로 교체하였다.
초~중기에는 조선어학회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여러 활동을 펼쳤고, 회지 『한글문화』도 발행하였으며 특히, 교육 활동을 전국적으로 눈부시게 펼쳤다. 그러나, 1948년 4월 18일에 북으로 간 위원장 이 극로가 평양에 눌러앉는 일이 생기자 점차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1948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조선어학회와 심각한 갈등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한글문화보급회의 임원 일부가 중앙위원회를 열어 임원을 개선하고, 그 사실을 조선어학회에 통고하였다. 1949년 4월 20일의 조선어학회 이사회에서는, 그것은 합법적이 아니며 조선어학회를 배반하는 행위라고 규정하여, 그 행위를 시인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는 중에 조선어학회가 청진동 회관을 고려화재보험회사에 비워 주고, 1949년 6월에 을지로로 옮기게 되자 학회에 더부살이하던 한글문화보급회는 점차로 해체되고 말았다.


한글전용추진회

1948년에 민족 만년의 자주 문화를 세워야 할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한글전용법이 제정·공포되었으나, 1년이 넘도록 사회적인 실천 활동이 뒤따르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집행부에서는, 그 중요한 원인이 한글전용의 충실한 실천 운동을 전개할 주도적 기관이 없는 데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한글문화보급회가 있었지만, 그 무렵에는 그런 일을 열정적으로 추진할 만한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1949년 5월 25일의 이사회에서, 한글전용법의 실천에 적극 대응할 민간 단체로, 또 조선어학회의 협력 단체로 ‘한글전용촉진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의에 따라 1949년 6월 12일, 드디어 한글전용 촉진에 뜻을 둔 인사들이 모여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회칙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목적은 한글전용을 촉진하는 것이었고, 본부는 조선어학회 안에 두었다.
그러나 그 회는 출발 단계에서부터 재정난과 지방 조직의 미비로 사업 추진에 곤란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6월 26일(일)에, 조선어학회 회원을 중심으로, 교육계·문화계·관공서·법조계 등, 각계각층의 한글 동지를 총망라하여, 회세 확장을 위한 임시총회를 열어 본부 임원진으로 강화하였다. 그리고 조선어학회는 한글전용촉진회의 활발한 운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사업 기금으로 50만 원을 빌려 주기로 하고, 한글전용 촉진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하였다. 새롭게 강화한 본부의 위원에는 조선어학회의 이사 전원이 포함되었으며, 원로 회원과 직원도 들어 있었다. 한편으로 1949년 7월까지 경상북도 지회, 경상남도 지회, 전라북도 지회가 조직되었고, 목포 분회와 군산 분회가 조직되었다.
한글전용촉진회는 한글만 쓰기의 실행을 대대적으로 촉진시키었다. 공문서의 한글만 쓰기, 철도역의 한글만 쓰기, 간판의 한글화 등을 촉진하였다. 1948년 5월에는 교정부를 두어, 바른 한국어 쓰기와 바른 맞춤법 쓰기를 위한 무료 봉사 활동을 하였는데, 저술계와 출판계에서 애용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곳곳에서 국어 교육 강습회를 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조선어학회와 손잡고 행정 기관을 통하여 우리말 도로 찾기 활동도 벌였다. 특히 1949년의 한글날에는, 각 대학 학생들의 호응을 얻어, 가두 계몽 방송과 계몽 전단 뿌리기를 하였고, 음식점을 찾아다니면서 “스시, 우동, 스끼야끼, 소바, 오뎅” 등을 “초밥, 가락국수, 전골, 메밀국수, 꼬치안주”로 갈아 써 붙여 주기도 하였다. 세종 중등국어교사 양성소 학생도 전원이 참가하여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곧 이어 터진 6·25 전쟁으로 모든 문화 운동이 마비되었으니, 한글전용촉진회도 예외일 수 없었다. 더구나 공산군에 대한 적개심에서 ‘한글전용 운동가는 빨갱이’라는 과격한 말이 나돌아, 여러 동지들이 활동에 지장을 받기도 하였다. 각급 학교가 정규 수업을 하기가 어렵고, 피란 학교들은 피란지에서 판잣집을 짓고 통합·연합 수업을 하는 판에서, 다른 단체들처럼 한글전용촉진회도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고 말았다.


한글전용국민실천회

1968년 이후 박 정희 대통령의 연이은 지시로 정부의 한글전용 시책이 착착 추진되어 갔다. 그럴 때에 한글 동지들 사이에서 “그러한 진행을 다행이라고 여기고 기뻐만 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도 이에 협력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높아 갔다. 그러한 여론을 반영하여 1968년 11월 2일의 한글학회 이사회에서 김 선기 이사가 정부 시책에 동조하여 한글전용의 국민운동 단체를 창립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그 제안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한글학회의 발기인으로 최 현배를 지명하고, 민족문화협회 회장 이 은상,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박 종화, 한글전용추진회 회장 주 요한, 배달문화연구원 원장 안 호상, 십일회 대표 이 인, 한국자유교양추진회 회장 김 윤경 등과 의논하여, 발기 위원회를 구성하여 창립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고, 그 창립 경비는 각 발기 위원들의 부담으로 하여, 1968년 11월 9일(토)에 한글학회 회관에서 정식으로 창립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5개 관련 단체의 대표들과 유지 여럿이 11월 9일부터 12월 4일까지 5번이나 모여서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인을 준비 위원장으로 삼고, 실무 위원도 뽑아, 회의 이름을 ‘한글전용국민실천회’로 가칭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임의 단체인 한글전용추진회는 통합하기로 하였었다. 그 뒤에 여러 단체들의 호응을 받아, 발기 단체는 모두 25개 단체가 되었다.
창립 준비 위원회가 발기 취지문을 전국 각지 각계각층에 돌리고, 찬동자와 함께 1968년 12월 21일, 서울 경기여고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한글전용과 국어 정화의 범국민 운동을 할 ‘사단법인 한글전용국민실천회’를 발족시켰다. 그날의 창립총회에서는 “한글전용 실천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채택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장, 각계각층 인사와 학생 및 일반 사회에 보내고, 이어서 결의문도 채택하였다.
한글전용국민실천회는 1969년 7월 4일자로 문화공보부 장관의 사단법인의 허가를 받고, 8월 1일자로 법원 등기를 마쳤다. 창립 이후 각종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71년 7월 15일까지의 두드러진 실적으로는 ① 관공서 및 단체에서 강습, ② 계몽 강연회, ③ 바른 말글살이를 위한 출장 상담, ④ 바른 간판을 위한 업소 심방 지도, ⑤ 편지로 궁금 풀이, ⑥ 편집 및 교정 봉사, ⑦ 우리말로 이름 지어 주기, ⑧ 한글 명함 선사하기, ⑨ 한글 문패 달아 주기, ⑩ 정부 부처에 한글전용을 위한 쉬운말 용어 제정 촉구, ⑪ 한글타자 전국 선수권 대회 개최, ⑫ 쉬운말과 바른 말 자료 채집, ⑬ 각종 정기간행물에서 한글만 쓰기 관계 자료 채집, ⑭ 건설 용어, 농업, 상업 용어의 왜말 조사, ⑮ 한글전용 정책 자료 조사(국어 국자 조사 연구 총서 제1집) 발간(『언어정책의 역사적 연구(한글전용 대책편)』이다. 1970년 2월에는 자체적으로 한글전용 찬반 여론 조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를 이미 8개 기관에서 발표한 여론 조사 결과와 합하여, 유권자 비율로 환산한 집계표를 작성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 때에, 각계로 보내어 각성을 촉구하였는데, 한글전용의 단행에 찬성하는 사람이 59%이니, 대한민국 국민 15,178,181명(내무부 통계, 1971년 2월 1일 현재) 중에서 한글전용 찬성자가 8,935,395명임을 보여 주었다.
지방에는 도별로 지부가 설립되었는데, 본부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면서 나름대로 활동하였다. 창립된 이후 1971년 7월까지 여러 활동을 펼쳤으나, 그 후 재정난으로 활동이 미미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 6월 30일 진용을 다시 개편하여 회장에 전 택부, 부회장에 주 영하·허 웅을 뽑아 새로 활동을 전개하여 한글만 쓰기 계몽 강연회를 여러 번 열었고, 신문을 한글로 쉽게 제작하여 온 국민이 다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회원 및 일반 시민 7,832명의 도장을 받아서 시내 각 신문 운영자 및 제작자에게 건의문을 내었다. 중앙의 일간신문에 사용되는 한자의 실태를 조사하여 각 신문사에 참고 자료로 제공하였으며, 해마다 한글날을 전후하여 세종대왕의 성업과 한글만 쓰기의 대강연회를 열고, 국어 순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렇게 1980년 중반까지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그 뒤로는 자연히 소멸되었다.


한말글문화협회

1972년 9월 5일 한글학회에서는 월간 기관지 『한글 새소식』을 내기 시작하였다. 제1차적인 목적은 한글전용과 한글 기계화를 더 적극적으로, 더 광범위하게 벌이는 데에 있었다. 『한글 새소식』을 내기 시작한 한글학회에서는, 계몽지 발행만으로는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사람이 몸소 벌이는 선전 활동’이 함께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한글학회에서는, 한글학회의 주장을 보급·실천하고 한글문화를 창조·창달하는 일을 맡을 기구로, 한글학회에 한글문화협회를 부설하기로 하였으며, 1974년 7월 22일 이사회에서 64명을 한글문화협회 운영위원으로 선정하여 발표하였고 운영위원들은 8월 2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위원장에 주 영하, 부위원장에 최 재희, 정 병욱, 전 택부, 이 규호, 이 종은, 한 창기를 뽑고 조직을 갖추어 전국적으로 한글 운동을 크게 펼치니, 지방에서도 불길이 일듯 호응이 일어나서 대전, 인천, 부산, 울산, 진주, 전북 등 지부가 연달아 생겨났다. 한글문화협회의 운동에 학생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하여 1975년 2월 1일 ‘학생부’를 두기로 결정하고, 2월 22일 한글문화협회 산하에 ‘전국 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지도교사: 오 동춘)를 결성하였다.
한글문화협회는 한글학회와 긴밀한 연계 속에서 늘 행로를 같이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실을 분담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초창기의 활동으로는 ‘한글문화 강연회’가 가장 두드러지는데, 첫 강연회는 528돌 한글날 기념으로 1974년 10월 8일, 서울 기독청년회관 강당에서 열었다. 다음해에는 전국을 순회하며 한글문화 대강연회를 열었으니, 1975년 5월 30일에는 부산 데레사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6월 27일에는 대전고등학교 강당에서 각각 강연을 하였다. 10월 8일에는, 529돌 한글날을 기념하여 한글전용국민실천회와 함께 서울 기독청년회관 강당에서 한글문화 대강연회를 얼었다. 1976년 10월 6일과 8일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함께, 서울 기독청년회 강당에서 530돌 한글날 대강연회를 열었다. 이와는 별도로 지부 단위에서도 강연회를 열었는데 인천 지부(지부장: 이 강로)에서는 1975년 6월 26일 창영국민학교 강당에서 열었으며, 1976년 2월 24일에도 방 제세(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 교사), 한 인희(성남 양영중학 교사), 조 용란(인하공전 교수)을 연사로 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한글학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할 여건에서 한글학회의 재정 상황이 곤란해지자 활동에 필요한 예산을 짜내기가 어려워져 명목만 유지한 채 겨울잠을 자는 꼴이 되었다. 그 뒤 한글학회 회원들 중에는 한글문화협회가 30년 가까이 겨울잠 상태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마침내 2005년 3월 26일, 한글학회 정기총회에서 한글문화협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 한말글 운동의 전위대로 삼기로 결의하였다. 그로써 한글문화협회는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2005년 5월 13일에 회칙을 고쳐 협회를 자치제로 운영하기로 하되, 처음 대표와 사무처장은 한글학회에서 임명하기로 하였다. 그에 따라 대표에 문 제안, 사무처장에 김 한빛나리를 임명하고, 8월 31일에 열린 한글학회 창립 97돌 기념식에서 문 제안 대표가 ‘한글문화협회’를 ‘한말글문화협회’ 이름으로 다시 일으키는 선언을 함으로써 명실공히 재출발을 하게 되었다. 9월 27일에 조직을 구성하고 임원 위촉장을 주었다. 고문단, 자문단(지도위원), 지원단(후원회)과 활동 기구(기획위원회, 분과위원호 지부 등)를 두어 활발한 한말글 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아쉽게도 몇 군데 국내 지부―대전·충남, 강원, 제주―와 국외 지부의 지부장을 위촉하지 못하고 있으나 앞으로 더 활발한 활동을 위해 곧 이들 지부장들을 위촉하고 지부 활동을 강화할 계획이다.
한말글문화협회의 2000년대의 활동을 보면, 2005년 12월 17일, 한글회관 강당에서 “한말글문화협회 다시 일으키는 잔치”를 성대하게 펼쳤다. 이어, 광화문 네거리에까지 나가서 한글 사랑 시가행진을 하여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때에 맞추어 한글학회에서는 2006년 1월치 『한글 새소식』 제401호를 그 잔치의 특집호로 펴냈다.
2006년 4월 7~8일, 1박 2일 경기도 평택시 무봉산 수련원에서 “한말글운동,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란 주제로 2006년 봄 모꼬지를 열었다. 6월 10일에는 한글회관 강당에서 “배움책 속의 우리말,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한말글 이야기마당’을 교육분과위원회 주관으로 열었다. 2007년 1월 24일에는 한글회관 강당에서 한글학회와 한글문화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공 병우 박사 나신 100돌 기념식’을 한말글문화협회에서 주관하였다.
2008년 3월에는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제18대 국회의원 후보와 정당에 바란다”란 성명서를 내었고, 7월에는 “직선제 교육감 선거 입후보자에게 드리는 공개 질의서”를 내어 교육감 후보들의 우리 말글 의식과 정책 등을 파악하였다. 2009년 2월에 문 제안 대표가 건강의 이유로 사임하고 5월에 이 대로를 새 대표로 임명하고 일부 조직을 새로 꾸몄다. 이 대로 대표가 새로 이끄는 한말글문화협회는 신속한 정보 교환과 운동을 위해 다음 카페를 열어 소통을 하였고, 6월부터는 우리 말글 정책과 관련 시의적인 주제로 ‘한말글 사랑 이야기 마당’을 열고 있다.

1) 목적: 한글학회의 주장을 보급·실천하고 한글문화를 창조·창달하는 일
2) 주요 활동: 초창기 지방의 호응이 좋아 대전·인천·부산·울산·진주·전북 지부를 두어 활동하였으며, 528돌 한글날 기념 대강연회를 서울에서 연 것을 시작으로 부산, 대전, 인천 등 지방 강연회를 열어 한글 전용과 국어 순화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조직을 갖추어 전국적으로 한글 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학생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하여 1975년 2월 1일에 ‘학생부’를 두고 그 해 2월 22일에는 산하에 ‘전국 국어운동 고등학생 연합회(지도교사: 오동춘)’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이 한글학회의 재정 사정이 어려운 데다가 나라 안의 여러 사정으로 30여 년 동안 활동이 멈추었다가 2005년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글학회 회원과 한글단체 회원들이 이 모임을 다시 일으킬 것을 제기하고 2005년 3월 26일, 한글학회 정기총회에서 한글문화협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 한말글 운동의 전위대로 삼기로 결의하였다. 그 해 5월 13일에 회칙을 고쳐 협회를 자치제로 운영하기로 하되, 처음 대표와 사무처장은 한글학회에서 임명하기로 하고 대표에 문제안, 사무처장에 김 한빛나리를 임명하고 8월 31일에 열린 한글학회 창립 97돌 기념식에서 ‘한글문화협회’를 ‘한말글문화협회’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일으키는 선언을 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고문단, 자문단(지도위원), 지원단(후원회)과 기획위원회, 분과위원회(정책분과, 법령분과, 정보통신분과, 교육분과, 자료분과, 방송분과, 신문분과, 출판분과, 홍보분과, 단체분과, 학생분과, 사업분과, 국제분과), 지부(경기북부, 경기남부, 충북, 전북, 광주·전남, 부산·경남, 대구·경북, 대전·충남, 강원, 제주, 국외) 등 활동 기구를 두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3) 역대 임원
<초창기: 1970년대>
- 운영위원장: 주영하.
- 부위원장: 최재희, 정병욱, 전택부, 이규호, 이종은, 한창기.
- 운영위원: 허웅, 정인승, 류제한, 한갑수, 김성배, 김계곤, 이응호, 박지홍, 곽상훈, 백낙준, 주요한, 안호상, 이은상, 이숙종, 공병우, 이장락, 최창식, 문제안, 최정호, 손세일, 예용해, 최재희, 이규호, 정병욱, 장덕순, 김선기, 정인섭, 장하일, 김용구, 박갑천, 모기윤, 김지용, 서정수, 윤석중, 김석득, 한봉흠, 이종은, 장세경, 이승화, 이상보, 김호, 홍웅선, 박준항, 오동춘, 정해수, 이강로, 조용란, 박영선, 금수현, 이영위, 박병호, 정재도, 주영하, 최기철, 박만규, 박대희, 김해성, 박종국, 전택부, 강신명, 양광석, 홍연호, 이관구, 곽종원.
< 재창립 1기: 2005. 9. 27.~2009. 5. 17.>
- 대표: 문제안(한글집 임자).
- 사무처장: 김한빛나리(한글학회 연구원, 정보통신/외사부 간사).
- 기획위원: 최용기, 김두루한, 이기만, 홍종현, 김수련, 여상조, 김불꾼, 윤진원, 김한빛나리.
- 분과 위원장: 최용기(정책), 홍영호(법령), 홍종현(정보통신), 김두루한(교육), 김슬옹(자료), 손범규(방송), 김영조(신문), 김수련(출판), 이기만(홍보), 신승일(단체), 한효석(학생), 여상조(사업), 송기형(국제).
- 지부장: 홍현보(경기 북부), 이희호(경기 남부), 최종규(충북), 송귀현(전북), 박계윤(광주·전남), 조상현(부산·경남).
- 고문단: 김경희(한국전자출판협회 회장), 김계곤(한글학회 회장), 김동길(전 연세대 교수), 김상준(동아방송대 교수), 김석득(외솔회 회장), 김수업(배달말학회 회장), 김승곤(한말연구학회 명예회장), 김용태(한글학회 명예이사), 김종택(한글학회 이사, 경북대 교수), 김차균(한글학회 이사), 나채운(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추위위원회 부위원장), 남기심(국립국어원 원장), 려증동(배달말교육학회 회장), 류영남(부산여명중학교 교장), 박갑수(바른언어실천연합 회장), 박대희(외솔회 이사), 박병순(한글학회 원로회원), 박붕배(한국국어교육연구원 원장), 박용수(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 박종국(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지홍(한글학회 명예이사), 박태권(부산대 명예교수), 밝한샘(아름나라 대표), 배우리(한국땅이름학회 회장), 서영훈(대한적십자사 총재), 서정수(한글문화세계화운동본부 회장), 손보기(한국겨레문화연구원 원장), 송현(한글문화원 원장), 숨결새벌(그림 그리는 이), 여영택(한글학회 원로회원), 오동춘(짚신문학회 회장), 원광호(한국바른말연구원 원장), 유동삼(한말글사랑한밭모임 명예으뜸일꾼), 이강로(우리말뿌리찾기모임 회장), 이돈주(한글학회 이사), 이상보(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회장), 이현복(대한음성학회 명예회장), 전택부(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정휘창(한글학회 원로회원), 조용란(한글학회 회원), 조재수(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 주영하(국어순화추진회 회장), 최기호(한국어정보학회 회장), 최승범(전북대 명예교수), 한상범(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전위원장), 현용준(제주대 명예교수)
- 지원단(후원회): 권희명(내사랑코리아 회장), 김불꾼(교육과 나눔 대표), 김영석(바른한글 이사), 김재봉(멀터화인테크 대표), 김종세(이노디자인 대표), 류명식(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회장), 박흥호(고누소프트 대표), 윤명진(한국과학사물연구소 보물코리아 대표), 윤진원(한국주류산업연구소 소장), 이건만(이건만 에이엔에프 사장), 이건범(아리수미디어 대표), 이금룡(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 이숙재(밀물현대무용단 단장), 이진호(세계한국말인증시험위원회 집행위원장), 이판정(넷피아닷컴 대표이사), 전준호(한샘닷컴 차장), 조종숙(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진병근(한국서각협회 부회장), 최순일(누리미디어 대표)
- 자문단(지도위원): 권재일(한글학회 이사, 서울대 교수), 김선호(한글학회 대전지회장, 한밭대 교수), 김영명(한글문화연대 대표), 김영환(한글철학연구소 소장), 김정섭(우리말바로쓰기모임 회장), 김정수(한양대 교수), 김창옥(문화방송 아나운서국 부장), 남영신(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리의도(한글학회 이사, 춘천교대 교수), 명형대(한글학회 경남지회장, 경남대 교수), 박경희(한국방송 아나운서국 부장), 박선자(한글학회 부산지회장), 박우철(한글재단 사무총장), 박준수(바른언어실천연합 사무총장), 배해수(한글학회 이사, 고려대 교수), 백봉자(한국어세계화재단 이사), 양명학(한글학회 울산지회장, 울산대 교수), 유운상(한글학회 사무국장), 유재원(한국외대 교수), 윤영미(서울방송 아나운서국 차장), 이기갑(한글학회 전남지회장, 목포대 교수), 이대로(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대표), 이명주(전국국어교사모임 대표), 이봉원(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 이태영(한글학회 전북지회장, 전북대 교수), 임규홍(경상대 교수), 정달영(겨레문화연구소 소장), 정동환(한글학회 인천지회장, 협성대 교수), 정재환(방송인), 조규태(경상대 교수), 조오현(한글학회 감사, 건국대 교수), 차재경(한글사랑운동본부 회장), 하치근(한글학회 이사), 홍사만(한글학회 대구지회장, 경북대 교수), 황병순(한글학회 진주지회장, 경상대 교수)
< 재창립 2기: 2009. 5. 18.~2011. 5. 14.>
- 대표: 이대로(전 중국 월수대 교수)
- 부대표: 이기만(성균관대 교수, 평론가), 최용기(국립국어원 부장), 한효석(부천교육연대 편집국장)
- 사무처장: 김한빛나리(한글학회 총무·외사·국제부 간사)
- 운영위원: 고영회(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김기종(우리마당 대표), 김슬옹(한국싸이버대 교수), 김영래, 김종구(전 초등학교 교장), 김종범(아이티뉴스 실장), 반재원(훈민정음연구소 소장), 신향식(학원 운영), 이백수(서울시의회), 허성희(한국북네트웍스 대표), 허홍구(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 홍보위원: 김규민(뉴스한국 대표), 김인배(환타임스 대표), 박창순(전 교육방송 본부장), 손범규(에스비에스 아나운서), 신승일(한류전략연구소 소장), 이승훈(동아일보 기자), 인병문(사람일보 편집국장), 정재환(방송인)
- 학술위원: 김영환(부경대 교수), 김형배(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박용규(고교 교사), 이광석(경북대 교수), 허재영(단국대 교수)
- 지부장: 구법회(전 인천연수중 교장)-인천, 송귀현(가나다모임 회장)-전북, 조상현(누리그물한말글모임)-부산, 최종규(책만드는 이)-충북, 김리박(일본한국문인협회 회장)-일본 교토, 김재훈(다살이살판)-미국 엘에이
- 고문: 김동길, 문제안, 이상보
- 지도위원: 고경희, 김경희, 김동진, 김영명, 남재경, 박한샘, 송현, 이봉원, 이상규, 진용옥, 차재경
- 자문위원: 강민경, 이태길, 홍영호
<재창립 3기: 2011. 5. 15.~2013. 5. 14.>
- 이대로(전 중국 월수대 교수)
- 부대표: 이기만(~2013. 4. 20. 성균관대 교수, 평론가), 한효석(부천교육연대 편집국장)
- 사무처장: 김한빛나리(한글학회 총무·외사·국제부 간사)
- 운영위원: 고영회(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김기종(우리마당 대표), 김슬옹(한국싸이버대 교수), 김종범(아이티뉴스 실장), 김종구(전 초등학교 교장), 박용규(고교 교사), 반재원(훈민정음연구소 소장), 신향식(논술학원 원장), 이백수(세종대왕생가터찾기 사무총장), 허홍구(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허성희(한국북네트웍스 대표), 홍성룡(독도사랑회 회장),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 홍보위원: 김규민(뉴스한국 대표), 김인배(환타임스 대표), 박창순(전 교육방송 본부장), 손범규(에스비에스 아나운서), 신승일(한류전략연구소 소장), 이승훈(동아일보 기자), 인병문(사람일보 편집국장), 정재환(방송인)
- 학술위원: 김영환(부경대 교수), 김형배(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이광석(경북대 교수), 허재영(단국대 교수)
- 지부장: 구법회(전 인천연수중 교장)-인천, 송귀현(가나다모임 회장)-전북, 조상현(누리그물한말글모임)-부산, 최종규(책만드는 이)-충북, 김재훈(다살이살판)-미국 엘에이, 김광(전 연변대 강사)-중국 연길
- 고문: 김동길, 문제안, 이상보
- 지도위원: 고경희(한글문화연대 대표), 김경희(지식산업사 대표), 김동진(헐버트기념사업회 회장), 김영명(한림대 교수), 남재경(서울시의원), 남영신(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밝한샘(한글이름펴기모임 회장), 송현(한글문화원 원장), 이봉원(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 이상규(전 국어원장), 임종건(한남대 교수), 정창인(자유칼럼 대표), 진용옥(한국어정보학회 회장), 차재경(한글문화운동본부 회장), 최용기(국립국어원 부장), 이재식(상암문해연구소 소장), 허경무(한글글꼴연구가).
- 자문위원: 강민경(종로구의회 의원), 이태길(광화문한글현판달기모임), 홍영호(변호사), 임종인(변호사, 전 국회의원).
< 재창립 4기: 2013. 5. 15.~2015. 5. 14.>
- 이대로(~2013. 8. 26. 전 중국 월수대 교수) / 리의도(2013. 8. 27.~)
- 한효석(부천교육연대 편집국장)
- 사무처장: 김한빛나리(한글학회 총무부장)
- 운영위원: 고영회(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김기종(우리마당 대표), 김슬옹(한국싸이버대 교수), 김종범(아이티뉴스 실장), 김종구(전 초등학교 교장), 박용규(고교 교사), 반재원(훈민정음연구소 소장), 신향식(논술학원 원장), 이백수(세종대왕생가터찾기 사무총장), 허홍구(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허성희(한국북네트웍스 대표), 홍성룡(독도사랑회 회장),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 홍보위원: 김규민(뉴스한국 대표), 김인배(환타임스 대표), 박창순(전 교육방송 본부장), 손범규(에스비에스 아나운서), 신승일(한류전략연구소 소장), 이승훈(동아일보 기자), 인병문(사람일보 편집국장), 정재환(방송인)
- 학술위원: 김영환(부경대 교수), 김형배(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이광석(경북대 교수), 허재영(단국대 교수)
- 지부장: 구법회(전 인천연수중 교장)-인천, 송귀현(가나다모임 회장)-전북, 조상현(누리그물한말글모임)-부산, 최종규(책만드는 이)-충북, 김재훈(다살이살판)-미국 엘에이, 김광(전 연변대 강사)-중국 연길
- 고문: 김동길, 문제안, 이상보
- 지도위원: 고경희(한글문화연대 대표), 김경희(지식산업사 대표), 김동진(헐버트기념사업회 회장), 김영명(한림대 교수), 남재경(서울시의원), 남영신(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밝한샘(한글이름펴기모임 회장), 송현(한글문화원 원장), 이봉원(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 이상규(전 국어원장), 임종건(한남대 교수), 정창인(자유칼럼 대표), 진용옥(한국어정보학회 회장), 차재경(한글문화운동본부 회장), 최용기(국립국어원 부장), 이재식(상암문해연구소 소장), 허경무(한글글꼴연구가).
- 자문위원: 강민경(종로구의회 의원), 이태길(광화문한글현판달기모임), 홍영호(변호사), 임종인(변호사, 전 국회의원).
< 재창립 5기: 2013. 8. 26.~2016. 3. 31. >
- 대표: 리의도(춘천교대 교수)
< 재창립 6기: 2016. 4. 1.~>
- 대표: 리의도(춘천교대 명예교수, 한글학회 외사부 이사)
※ 2016년 4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제60대 한글학회 이사회에서 앞으로 한글학회 외사부 이사가 대표를 맡기로 함.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제5차 초등·중등학교 교육과정을 작성하는 1986년에 이르러,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비롯한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단체는 국민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넣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였으며, 정부에서도 그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소식이 흘러 나왔다. 그에 대응하여 한글학회에서는 29개 한글 애호 단체와 공동으로 1986년 11월 15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국어교육과 한자”를 주제로 대강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국민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사용하지 말 것을 공동으로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글 단체를 횡적으로 연계하는 조직체가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1987년 4월 11일에 허 웅, 안 송산을 비롯한 33명이 한글학회에서 발기모임을 갖고, ‘한글전용 운동 협의체’를 창립하기로 결의하고, 전 택부, 문 제안, 정 재도, 박 종국, 최 기호를 준비 위원을 선정하였다. 준비 위원들이 서둘러 작업을 진행한 결과로 4월 16일, 한글회관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모임의 이름을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이라 하고, 이 자리에서 “우리의 다짐”을 발표하였다.

 

창립총회에서 선출한 지도부는 회장에 안 호상, 부회장에 한 갑수·전 택부, 사무총장에 문 제안, 이사에 손 보기·송 현·이 현복·이 상섭·최 기호·김 윤학, 감사에 박 종국·오 동춘을 뽑고 주 영하·허 웅을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회원은 한글학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외솔회, 국어순화추진회, 한글전용추진회, 배달말학회, 전국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 등, 전국의 45개 단체였다.
1988 올림픽을 계기로 정치권에 민주화 바람이 불고 국어운동대학생회가 활기를 되찾으면서 한글 단체들도 힘을 얻어 줄기차게 활동을 펼쳤다.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에서도 정부와 국회에 건의문을 많이 보내고, 한자 단체에 맞선 행사도 적잖게 열었다.
1989년엔 노 태우 태통령에게 “우리말 다듬기 남북모임 구성 알선 의뢰 재청원”을 하고, 1993년에 국회의원 이름패를 한글로 만들어 국회에 가져다 주면서 그것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한자 단체들이 조선일보를 앞세워 한자 복권 운동을 크게 벌렸지만 강력하게 맞서서 막아내었고,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 소원에 맞서고, 한글날 국경일 제정 운동을 펼치고, 김 대중 정부에서 한자 병용을 추진하려 할 때에는 격렬한 반대 시위까지 하였다. 최근에는 국어 기본법 시행령 공청회도 열었고, 영어 바람을 막는 일에 힘쓰고 있다.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

나라의 말글정책이 한글전용과 한자혼용으로 혼란한 시기에 국민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국민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글만 쓰기도 하고, 국어 교과서에 한자를 혼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학자나 어문 단체들도 제 각각 주장을 내놓고 성명서를 계속 발표하였다. 방송이나 잡지에서 한글전용과 한자혼용 정책에 대한 주제로 토론과 특집이 자주 나왔다.
따라서 대학에서도 이러한 한글전용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특히 최 현배 선생이 재직하는 연세대학교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1964년 10월 5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오늘날의 본관) 103호 강의실에서는 ‘한글전용의 필요성과 문제점’에 대한 4개 대학 학술 토론회가 벌어졌다. 여기에는 고려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 대표들과 일반 학생들이 모였다. 그 모임을 계기로 4개 사립대학 대표와 학생들은 다달이 모여서 학술 토론회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중에 대학생 한말글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뒤풀이는 주로 신촌역 부근의 목로주점 ‘부산집’에서 하였다.
1967년 3월 16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동숭동) 본2강의실에서 “국어운동 횃불 점화식”이라는 이름으로, 학생 17명과 서울대의 신 익성, 허 웅 교수를 비롯하여 한 갑수, 문 제안 선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어운동학생회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사회는 이 병용이 맡았고 발기인 대표는 국어운동학생회 선언문을 기초한 이 봉원(서울대 심리학과)이었다. 그것이 국어운동 대학동아리의 시발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에서 국어운동학생회가 속속 창립되었다. 동아리의 이름은 대개 ‘국어운동학생회’였고, 줄여서 ‘국운회’라 하였다.
서울대 국운회는 1967년 5월 8일에 한글과 한국 토박이낱말로 지은 사람의 이름 가운데 좋은 이름을 뽑아 널리 알리는 ‘제1회 고운이름 뽑기 시상식’을 가졌는데, 그해의 금상 수상자는 ‘금 난새·나라·누리·내리’(작곡가 금 수현의 아들딸) 남매 이름이었다. 그리고 1967년 한글날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국운회가 공동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글전용 건의문을 채택하고, 한글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서울대 국운회에서는 한글전용과 국어순화에 대한 표어 모집 시상식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고, 인쇄한 표어 57,000장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 뒤 바로 고려대, 동국대, 서울대, 연세대의 국운회가 합동으로 강연회, 성명서, 한글전용 촉구 대회를 잇달아 열고, 거리 간판 말글 바로잡기, 한글전용 여론 조사 활동 등을 펼쳐 언론이 주목하고 크게 보도하였다. 그때부터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가 창립되기까지, 약 1년 동안 국어운동 대학동아리의 활동을 줄기차게 하면서 뜻을 모아 1968년 9월 22일 오전 10시, 민족문화협회 사무실에서 △서울대: 이 봉원, 김 정근, 이 병용, 남 영신, 전 응진. △연세대: 장 국진. △고려대: 박 노용, 김 명학. △동국대: 이 택로(대로), 김 범열. △청주대: 이 인호, 최 재문, 강 윤식. △청주교대: 권 혁노. △대전대: 최 재원 등 15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를 창립총회를 열어 회칙을 확정하고, 창립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회장: 이 봉원(서울대 심리학과 3). △부회장: 김 명학(고려대 상학과 3)·강 윤식(청주대 행정학과 3). △감사: 이 대로(동국대 농경학과 3)·최 재원(대전대 영문학과 2). △총무: 김 범열(동국대 국문학과 3). △경리: 김 정근(서울대 사학과 2). △조직: 최 정호(연세대 국문학과 3)·전 창환(고려대 임학과 3). △섭외: 마 정임(고려대 농경학과 3)·양 영희(연세대 국문학과 3). △편집장: 최 노석(연세대 국문학과 2) 등 임원진을 구성하였으며, 지도교수로는 서울대 허 웅 교수를 모셨다.
그렇게 연합회를 창립함으로써 횡적으로 연대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한말글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한글전용 찬반 여론 조사, 세종대왕 동상 앞 꽃바치기, 회보 발간, 전국 순회 계몽 강연회, 간판 조사 등의 활동을 펼쳤고, 1972년 10월 9일 오전 11시, 대학 국운회 출신들이 외솔회 회의실에 모여 ‘국어운동학생회 동문회’(약칭 ‘국운동문회’)를 결성하였다. 회장: 이 대로. 총무: 강 상구·정 태연. 참석한 동문은 박 노용, 연 경탁, 윤 경혁, 김 정수, 강 상구, 이 근면, 이 환성, 김 정환, 정 지훈, 이 호원, 이 대로, 이 봉원, 유 상길, 장 영숙이었다(모두 14명). 소식지 『소리』를 내고, 후배들을 지도하고, 한글학회 등 한글 단체와 협조하면서 한글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10월 14일에 연세대 학생회관 제1회의실에서 연합회 창립 네돌 잔치를 치렀으나 사흘 후인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이라는 비상조치가 발표되면서 모든 학생 활동도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상황은 1980년 10·26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말글운동 동아리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한글날 행사 중심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대학 단위의 동아리가 그러한 상태였으니 연합회도 한동안 멈추어 있었다. 다만 그 동안 국운동문회에서는 1977년 10월 27일에 한글보람 달기 운동을 시작하여 1978년 3월까지 모두 1,250개를 팔았다.
그 뒤 1984년 11월, 5개 대학(건국대, 고려대, 상명여대, 서울대, 연세대)의 한말글운동 동아리들이 모여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를 창립하였다. 으뜸빛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 슬옹이 맡았으며, 버금빛은 상명여자대학교 한 혜순이 맡았다. 지도교수는 허 웅 교수의 뒤를 이어, 상명여자대학교 최 기호 교수가 맡았다. 1985년 10월 3일, 연합회 정기총회를 열고 새 앞선빛을 뽑았는데 으뜸빛: 김 불꾼(건국대), 버금빛: 조 윤경(상명여대)이었으며, 1985년 12월 16일,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가칭)의 결성을 알리고 동참을 바라는 공문을 전국 대학의 국어운동 동아리에 보내었다. 1986년 1월, 서울지역 대학의 동아리들로만 꾸렸던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의 이름을 ‘서울·인천지구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으로 바꾸었다. 1986년 1월 15일, 서울·인천지구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에서 『겨레입김』이란 신문 해오름호(제1호)로 펴내었다. 이런 활동속에서 1986년 1월 15~17일, 대구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전국 10개(대학·건국대, 경기대, 경북대, 계명대, 고려대, 대구교대, 부산여대, 상명여대, 연세대, 영남대)의 동아리 회원이 모인 가운데 ‘전국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딴이름: 한말글)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연합을 6년 만에 재창립하였다. (서울대, 인천교대, 한국외대, 우리마당, 대구대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가입 동의를 하였다.) 1972년 이후 중단되었던 전국연합 활동을 다시 잇게 되었으며, 1987년 5월 21일, 전국연합 회지 『한말글』 해오름호(제1호)를 펴내는 등 대학생 우리 말글 운동의 체계화를 이루었다.
그 뒤 사회 환경이 변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전반적으로 대학동아리 활동의 열기가 식어졌는데, 한말글운동 동아리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전국 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

1975년 2월 22일, 한글학회 회관에서, 한글학회 허 웅 이사장과 류 제한 이사, 문 제안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강 태성·김 태선·이 덕배(덕수상고), 유 희진·황 원용·변 성섭(배재고), 김 경민·김 상민·신 종휴(대신고), 최 원붕(동국사대부고), 김 옥희·장 봉숙·이 경순(이화여고), 주 설령(계성여고), 김 일호(경희여고), 유 종순·조 경희(배화여고), 최 운희·최 희자(중앙여고), 송 정선(덕성여고) 등의 남녀 고교생들이 창립 발기인이 되어 ‘전국 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 창립총회를 가졌다. 서울 시내에 있는 남녀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연합모임이었다. 오 동춘(대신고 교사)이 지도교사를 맡았으며, 초대 임원진으로 △회장: 강 태성(덕수상고 1). △부회장: 김 옥희(이화여고 1). △총무부장: 김 태선(덕수상고 1). △계몽부장: 황 원용(배재고 1). △연구부장: 김 경민(대신고 1). △서기: 장 봉숙(이화여고 1). △감사: 유 희진(배재고 1)·주 설령(계성여고 1)을 꾸렸다.
‘전국 국어운동 고등학생연합회’는 나라말을 깨끗하게, 쉽게, 바르게, 풍부하게, 너르게 펴자는 최 현배의 국어운동 5대 목표와, 한글세대로서 우리말·우리글·우리얼 사랑으로 한글문화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표로 하여, 한글학회 부설 한글문화협회 병설로 출발하였다. 줄여서 ‘고교 국운회’로 불러 오다가, 1988년 6월 25일 제28회 정기 큰모임에서 모임 이름을 ‘한겨레 한글나무 고등학생모임’으로 바꾸면서부터 ‘한글나무’, ‘한글나무모임’ 등으로 줄여서 불렀다.
한글나무모임은 1975년 3월 8일(토) 오후 3시에 외솔회관(서울 충무로 5가)에서 첫 정례회를 열었다. 그로부터 4년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그 자리에서 빠짐없이 정례회를 열어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한글회관이 완공되자, 1978년 9월 11일의 모임부터는 한글회관으로 활동 장소를 옮겨 매주 토요일에 한글회관 강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렇게 한글나무모임은 2000년까지, 25년 동안 꾸준히 여러 활동을 펼쳤는데, 그것을 간추리면, 각계의 명사들을 초청하여 여러 주제의 강연 듣기, 일본말 찌꺼기를 좋은 우리말로 바꿔 쓰자는 내용을 비롯하여, 어려운 한자말 순화, 서양 외래어 순화, 틀리기 쉬운 낱말 등을 예시한 계몽 전단을 만들어 공휴일, 국경일에 시민을 대상으로 계몽 운동을 펼쳤으며, 전주에서 국어운동을 하는 가나다 고등학생모임과 자주 토론회를 열었다. 그 연합 토론을 통해 교육 문제, 한글전용과 한자 문제, 영어 조기교육, 토박이말 이름 등에 관해 꾸준히 논의하였다. 그리고 문화공보부 장관 앞으로 언어순화와 텔레비전 자막의 한자 없애기 등의 내용을 담은 건의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우리의 언어 실태를 알아보기 위하여 중요 일간신문의 외래어 사용 빈도 조사, 간판의 외래어 빈도 조사, 서울 소재 고교 모표의 보람 실태 조사, 은어 조사와 상표 모으기 활동을 했으며, 잡지사·신문사·방송사를 방문하여 잡지와 신문·방송의 한글전용에 대한 견해를 들어 보고 우리 말글 사용 실태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방송의 “명랑 백일장”,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프로그램 “우리는 고교생이다”, 문화방송의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리는 여고생”, 동양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라디오 서울의 “가위 바위 보” 등에 출연하여 한글사랑 정신을 펼쳤다.
사회 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1975년 1기 때부터 5년 동안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월현1리 덕초현에서 농촌 봉사 활동을 펼치며, 산골 어린이들의 학습을 돕고 옥수수 농사일도 거들어 주었다. 그리고 한글회관 건립 모금에도 성금 9,800원을 내었다.
한글나무모임의 가장 큰 행사는 ‘한글나무 큰잔치’였다. 1975년 제3기에 처음으로 시작하여 20회까지 계속하였다. 내용은 대개 “문학의 밤(시, 수필 낭송), 방송 구성, 학술 발표, 재판정” 등으로 꾸몄다. 첫 번째 큰잔치 때에 한글학회 허 웅 이사장은 “예술의 질이 높고 낮음은 민족에 따라 달라서 우리는 흔히 그 말의 예술성에 따라 그 민족 문화의 높낮이를 평가한다.”고 전제하고, “고등학생들이 시를 지어 읽고 좋은 말로 연극을 하여 우리말의 예술성을 드높이려 하니 그들의 나라사랑의 뜻은 강하다.”며 격려해 주었다.
1981년부터는 한글나무 정례모임 내용을 알리는 회보 『말글얼』(뒤에 『한글새싹』으로 이름을 바꿈)을 만들어 ‘토론 주제’, ‘알리는 일’ 등을 실었다. 1982년 9월 11일에는 회지 『한글나무』 제1호를 펴냈으며, 제4호까지 발간하였다. 




한국어교육원

1) 설립: 2006. 5. 8. 2) 목적: 평생교육법 제22조 제2항(또는 제23조 제1항·제24조 제2항·제26조 제2항·제27조 제2항), 동법 시행령 제27조 제1항(또는 제41조 제2항·제42조 제2항·제44조 제2항·제45조 제2항) 및 동법 시행규칙 제14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원격, 사업장부설, 시민 사회단체 부설, 언론기관 부설, 지식·인력개발 사업 관련) 평생교육 시설 설치와 평생 교육 관련 사업을 한국어교육원에서 운영한다.
3) 주요 활동: 한국어 교원 양성, 새터살이 외국인 한국어 교육, 초·중등 교사 직능 연수, 국어 강습회 등 평생 교육을 실시한다.
4) 시설: 2006년 8월 30일에 얼말글교육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개관함.
5) 임원
- 원장: 백봉자(전 연세대 한국어학당 교수).



한글서체연구원

1) 설립: 2011. 10. 21.
2) 목적: 올바른 한글 서체 연구와 널리 알리는 데 힘쓰기 위함.
3) 주요 활동: 훈민정음 서체 연구, 한글 서체 홍보와 보급, 공공 기관 및 사회 단체의 한글 인장 교체 운동, 서체 관련 전시 및 행사 등.
4) 임원
  - 원장: 허경무(한글서체연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