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적으로, 1908년 8월31일 주 시경 선생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울 봉원사(새절)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였다.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으로,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바꾸고, 1919년 가을에 '조선어연구회'로 다시 일어섰고, 1921년 12월 3일에 그 조직을 확대·강화한 뒤,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9년 10월 2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2008년에 창립 100돌을 맞았고 오늘에 이르고있다. 창립 이후 우리나라 어문정책 세우기와 갖가지 강연,학술대회를 연 바,한글날 제정(1926), 동인지 ‘한글’창간(1927), 학회지 ‘한글’창간(1932),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표준말 사정(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40), 초.중등 교과서 편찬(1945), 훈민정음 원본 영인 (1946), 세종 중등 국어교사 양성소 설치(1948), 큰 사전 편찬(1957), 한글 타자기 통일 글자판 발표(1962), 쉬운말 사전(1967), 월간지 ‘한글새소식’ 창간(1972), 우리말의 로마자 적기 발표(1984), 제1회 우리 말글 연수회(1985), 한국지명총람 편찬(1986), 문학한글 창간(1987), 한힌샘 주시경 연구/교육한글 창간(1988), 한국 땅이름 큰사전 편찬(1991), 우리말 큰사전 편찬(1991), 제1회 외국인 한국어 발표 대회(1999), 학회 발행 논문집 학술정보 제작(2000), 첫 번째 우리말글 지킴이 위촉(2000), 우리 토박이 말 사전 편찬(2001), 첫 번째 아름다운 우리말 가게이름 선정(2001), 제1회 전국 한말글이름 가진 이 글짓기 대회(2004), 한글 무늬옷 입기 운동(2005), 한글날 큰잔치 조직위원회 결성(2006), 한글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 4편(한힌샘 주시경.외솔 최현배.건재 정인승.고루 이극로)편찬(2008.2009)등의 일을 하였다. 1996년에는 비영리 학술단체로는 처음으로 누리집(홈페이지)을 만들어 누리그물(인터넷)을 통하여 갖가지 정보를 제공하고 정보 교환의 마당을 마련해 놓고 있으며,정기 간행물 『한글』,『문학한글』, 『교육한글』, 『한힌샘 연구』, 『한글 새소식』 등을 누리집에서 제공하고 있다.
<한글학회 창립일을 고쳐잡게 된 경위>
오랫동안 우리는 학글학회의 기원을 “1921년 12월 3일,조선어연구회”로 알고 지켜 왔다.학회 내부적으로도 1971년에는 ‘창립 50돌’ 행사를 치렀고, 1981년에는 ‘창립 60돌’ 행사를 치렀으며,대다수의 공적,학술적 문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그런데 1987년의 정기총회에서 한글학회의 기원을 고쳐잡기로 결의하였다.그 근거와 과정은 이러하다.
주시경 선생의 이력서
[가] 우리는 일찍이 1976년에 널리 공개된,주 시경 선생의 자필 이력서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접하였다.
융희2년,돋 서기 1908년 8월 31일에 주 시경 선생이 하기 국어강습소를 차려 운영한 것은 일찍이 확인하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그 졸업생들과 더불어 연구 단체를 만들었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었다.
[나]이에 더하여 1981년 12월에 한글학회에서 주최한, 학회 창립 기념 도서 전시회를 통하여 『한글모죽모기』라는 이름의 필사본을 접하게 되었다.거기에는 “국어연구학회”→“배달말글몯음”→”한글모”로 이어지는 단체의 연혁,회록,회칙,임원과 회원 명부, 그리고 활동 내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으며, “연혁”과 “회록”의 앞부분에는 다름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한글모 죽보기』의 내용
이 내용도 주 시경 선생의 자필 이력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며, 그 밖에도 학회의 실체를 보여 주는 여러 사항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마침내 1987년 3월 9일의 한글학회 이사회에서는 창립일 수정에 관한 문제를 정기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하였다.그리하여 3월 23일의 정기총회에서 학회의 연원과 창립일의 수정 문제를 안건으로 내놓고 장시간 토론하였다.그 결과 한글학회의 발상을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 로 고쳐 잡기로 결의하였다.토론 중에, 전부터 두루 알고 있는 “1896년 5월애 독립신문사 안에 (한자)를 두었다.”는 기록에 까지 소급하자는 의견도 제시되었지만,회칙,조직,임원,회원, 활동 내용 등,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은 무리라는 쪽으로 정리하였다.그리고,이렇게 결의하기까지 두 가지 문제를 검토하여 해결하였다.첫째,위에서 보듯이,주 시경 선생의 자필 이력서에는 “국문연구회”로 기록되어 있고,『한글모죽모기』의 회록에는 “(한자)”로도 기록되어 있지만,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를 당시의 명칭으로 선택하였다. 둘째,회록에서는 창립총회의 날짜를 “8월31일(한자)”로 기록해 놓았는데,그 31일은 ‘월요일’이었으니 날짜와 요일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그런데 “8월 31일”이란 기록이 더 많으므로 이를 따르기로 하였다.
[다]최근에는 당시의 신문인 『대한~일신보』와 『황성신문』에서 다음의 보도 기사를 찾아 내었다.
이로써 먼저 살펴본 기록들이 사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