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한마당         국외교원 한마당         국외교원 한마당

편지, 그 애매한 매력.

언젠가 읽은 책에서 행복해 지고 싶은 사람은 일주일에 한번 씩 편지를 쓰라던 말이 생각나는
아침 입니다.
행복해지시고 싶은 분들? 쓰세요. 편지를...

편지 1.
올가 선생님의 편지 참 반갑습니다.
행복하세요.^^
마침 책상 위에 놓인 지구본을 한번 삥 돌려서 카자흐스탄의 위치를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지리 공부?)
그 곳에서도 조병화 시인의 별빛이 반짝거려서 좋습니다. 맑고 깨끗한 별이...
연수원에서 부채춤 배운다며 밤 늦도록 퍼드덕거리고 또 같이 '여인천하'보느라 쭉 둘러앉아
있던 그 순간이 생각나네요. 그립습니다.
지금 여긴 아침 입니다. 세 남자가 동시에 쫙 빠져나간 집안 곳곳엔 세 남자의 흔적이...
밤에 한글학회 한마당에 찾아가 노닐다 온 날은 아침에 정신차리기가 힘들더군요.
그런 눈치를 챈 아저씨가 말하길, '잠잘 때 잠자고, 아침에 가보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아침에 왔습니다.
'가보면 좋을 곳'을요...

편지 2.
이곳 오기 전,
한 통의 두툼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얼마 전, 문득 생각나던 친구.
아침에 생각나서 밤까지 그 친구 생각이 나기에 '오늘 니 생각 많이 했다. 지금도 하고 있다.
생각 나는 너가 있어 난 좋다'? 대충 그런 내용의 짧은 편지를 보낸 답신으로 긴 사연, 긴
시, 무지 많은 노래까지 보내온 그 친구 땜에 오늘은 두고 두고 우리가 옛날에 만들어 두었던
추억들 생각할 껍니다. 온종일 즐겁게...

편지 3.
오래 전 일입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편지를 보내오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문과 2학년 정선미 양에게'라고 비뚤비뚤한 마치 초등하교 일 학년 수준의 글씨체
로 쓰여진 편지가 인문 대 편지함에 도착한 이래로 주기적으로 보내져 오던 편지.
그 편지는 영문과의 정선미가 3학년에서 4학년이 되고, 4학년에서 대학원생이 될 때까지 5년
동안 ㄱㅖ속 되었습니다.
제가 학교 편지함에서 편지를 직접 꺼낸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저보다 친구들이 그 사람의
편지를 더 기다리곤 했죠.
친구들에게 얼굴 없는 '20세기 마지막 낭만'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꾸준히 편지를 보내오
던 한 사람.
어느 날 부터인가 그 사람의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생기던 이상한 부담감(미팅 같은 것 하
면 안될 것 같은...)이 싫어서 '이젠 더 이상 편지하지 마세요.'라는 편지를 보내놓곤 은근히
답장을 기다리던 저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놀라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쩌다 편지가 뜸하면 '이 사람이 어디 아픈가?'하는 생각
이 들기도 했던 그 사람의 편지엔 시가 들어있고 제가 읽어야 할 책이 들어있고...
어떤 때엔 선생님처럼 되어버린 그 사람에게 제가 써서 보내는 영작문이 빨간 줄로 어디가 잘
못 되었다고 밑줄이 그어진 채 다시 보내져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가 되면 라면 하나로 둘이 끼니를 이어가야 할 지도 모른다던 그
의 조심스런 편지 글귀도 마냥 좋아 보이고 낭만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적 빈곤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 그러나 물질적 빈곤'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하겠다던 저를 '너도 같이 20세기 마지막 낭만이다.'라며 친구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보기 시작했구요.
외국에서 혼자 열심히 일하며 공부하던 그 사람의 풋풋한 이야기를 5년간 읽는 동안 전 그 사
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같은 곳에 살면서 편지가 아닌 데이트르 5년간 했다면 우리가 그토록 마음 깊이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습니다.
그땐 순수를 동경하던 철 없이 젊은 시절이었으니까요...

12년 전, 미국으로 오던 여행 가방 안에는 5년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그 사람의 편지가 꼬ㅐ
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행여 '20세기의 마지막 낭만'이 그 낭만적인 모습을 잃으면 '이 내용
은 '부도수표'로 처리되는 건가요?'라고 물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그 사람 코앞에다 편질르 내
밀 사건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가을이 깊어 갑니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십시오.
짧은 편지, 긴 편지, 그리고 안 오면 왜 안 올까?라고 생각나게 할 편지를...
분명 사랑이, 행복이 그대에게 찾아 올 것입니다.

편지 쓸 곳도
또 마음을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는 우리 말글이 있음에 다시금 감사하는 이 아침에.
필라델피아에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