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김영석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갈꽃이 바람에게
애타게 몸 비비는 일이다
저물녘 강물이
풀뿌리를 잡으며 놓치며
속울음으로 애잔히 흐르는 일이다
정녕 누구를 그리워하는 것은
산등성이 위의 잔설이
여윈 제 몸의 안간힘으로
안타까이 햇살에 반짝이는 일이다
그리움을 자연에 기대어 그린 훌륭한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인은 자연의 일상 속에서 그리움의 애탐과 애잔함, 그리고 안타까움을 보고 있습니다. 시인은 갈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갈꽃이 애가 타서 바람에게 비벼대는 몸짓으로 봅니다. 그런데 바람은 본래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불어가는 것일까요. 바람은 사실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 어디에나 있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바람은 갈꽃이 애타는 몸짓으로 일으킨 것입니다.
강물이 풀뿌리를 잡았다 놓쳤다 하는 것일까요? 풀뿌리가 흐르는 강물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애잔한 속울음은 흘러가는 강물의 방울방울이 남기는 선택받지 못한 설움인지도 모릅니다.
산등성이 위의 잔설이 안타까이 반짝이는 것은 햇살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홀로 풍성할 수 있었을 모든 것을 햇살에 잃고, 여윈 몸을 살라 뿜는 가녀린 빛이 잔설의 마지막 저항이라면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 본다면 김영석의 시
<그리움>
은 전혀 다른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읽혀집니다. 바람은 본래 고요하여 바람이라 할 것도 없는데, 갈꽃 제가 몸 비벼 일으켜 놓고 속절없이 애타 하더라. 강물은 본래 뿌리가 없어 매임이 없는데, 풀뿌리가 홀연 강물을 애잔케 하더라. 잔설은 최후까지 눈을 뜬 채 햇살을 눈부셔하며 노려보더라.
바람과 갈꽃의 관계는 공허합니다. 바람의 실체가 갈꽃의 몸 비빔에 의해서만 드러나므로, 갈꽃은 사실 제 몸만 잘 가누면 아무 애탈 일이 없지요. 그렇지만 강물과 풀뿌리의 관계는 좀 다릅니다. 강물은 풀뿌리로 인해 자신의 뿌리 없음을 새삼 압니다. 속울음을 울지요. 그러나 그 속울음도 쉼 없이 흘러 드넓은 바다에 이르면 모든 뿌리를 담는 근원이 될 것이므로 그리 애잔할 것도 없습니다. 아, 그 킬리만자로의 눈을 아마도 부러워할 이 시의 잔설은 햇살에 녹아드는 운명입니다. 안타까이 반짝여 보아도 결국은 본래 없었듯이 없어질 잔설이지요. 여기에는 그래서 아픔이 있습니다. 없는 바람을 일으키는 갈꽃이나, 뿌리마저 품을 것을 모른 채 흘러가는 강물과는 다른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주는 상처입니다. 다시 겨울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잔설의 아픔은 떠나간 겨울에 대한 그리움이며, 다시 올 겨울에 대한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는 이 시의 그리움은 오직 산등성이의 잔설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잔설이 갖는 그리움의 본질은 시간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좀처럼 비켜 가지 못하는 덧없음처럼 말입니다.
모든 해석은 가능성의 제시일 뿐이라고 합니다. 저는 시인 김영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의 시를 전에 읽었던 적도 없습니다. 작년 연수 때 받았던, 조재수 선생님의 전자 국어사전에서 '그리워하다'라는 말을 찾아 보았다가 이 시가 인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번 소리내어 읽었고, 그러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 보았을 뿐입니다. 자유 연상이 빚어내는 엉뚱한 오류를 저질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리움도 한편으로는 오류에서 오는 것일 테니까요. 저는 오늘 누군가를 그리워합니다. 그것이 오류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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