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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의 몸짓, 살아 남기. 막내에게

막내야. 네가 나를 언니라 부르면 나는 막 나간다. 그래도 괜찮은지?

아무튼... 무척 반가웠어... 순간 순간 생각나고 지우고, 기억의 파편으로
서둘러 화석화 되려나 걱정스러우면서도 아무 행동도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너무 고맙다... 네가 시작해 준 게...

유월이... 왜냐하면 내 이름 윤희를 여기 애들에게 아무리 말 해도 기억을 못하거든... 열 번 만나서 열 번 얘기해 줘도 열 번 잊어버려... 그쪽 사정도 비슷하지?
그런데 윤희를 빨리 발음하면 유니처럼 들리고 그게 이곳 유월(Juni)이란 발음하고 똑같애... 그래서 여기 아이들한테 내 이름 얘기하려면 칠월도 아니고 오월도 아닌 유월이라고 말하지.. 그래도 몇 놈이나 기억하는지... 적응의 몸짓이랄까 살아남아보려는, 인정받아보려는 노력이랄까. 그래서 향단이 등등의 이름과 비슷한 유월이가 됐다. ... 그렇다고 뭐 그리 서러워하는건 아니고... 그런 시기는 버--얼써 지났지... 여경. 우리 한빛나리 선생님 한국에 사시길 다행이다.. 이곳에 사셨으면 ....

이름은 자기 정체성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건지... 얼마 전. 한국 중소기업들이 이곳에 와 이곳 기업들과 사업 상담회를 했다. 통역으로 나갔는데 내가 맡은 한국 중소 기업 사장은 이곳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존 콜린스라고 하더라. 멀쩡한 제 이름 놔두고... 빨리 기억 해야 필요할 때 쉽게 연결 될 수 있다고... 정말 그럴까? 이름 정도는 기억 해 주는 수고를 하는 사람들과 사업을 하는게 길게 보아서 더 나은 것은 아닐까? 일제 식민지 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창씨 개명에 반대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즐거이 개명한단다...

여경. 네 글에 뭍어 있는 외로움을 보며, 우리가 지난 여름 왜 그렇게 살아 있을 수 있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80년대를 살아 남은 우리들이 이제 또 막막 외국에서 살아남으려고.... 살아야 되서....
살아남은 자는 슬프대....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1994 년)

*이 친구들이란 2차대전 와중 여기 저기 흩어진 친구들 중에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죽은 슈테핀, 스페인 국경에서 나치가 쫒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한 발터 벤야민,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칼 코흐 등등을 말한다고 한다. 브레히트는 미국에 망명중이었지...

이런 시들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나도 아름다운 시들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시에 묻어있는 절박함과 삶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구나... 이런 분들의 삶에 비하면 아주 안온한(정말 우리 삶은 그리도 안온한 걸까?) 내 삶에 스스로 전기 충격이라도 가하려는 듯. 나의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에 한 박자 휴지기를 주기 위해...

여경. 나도 반가운 김에 주저리 주저리 많이도 썼다. 내가 우리 빅토, 은진이, 올가, 유정이 잘 꼬셔서 이곳 들어오게 해 볼테니 너도 혜원언니, 미호씨, 기정이 ... 잘 꼬셔봐...
그럼 좋은 하루가 되길. 취리히에서 드디어 할 일 제끼고 한마당에 빠져버린 유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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