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한마당         국외교원 한마당         국외교원 한마당

함께 감상해요-2003 신춘문예 당선시 모음-

2003년[신춘문예]詩-당선작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천수호-조선일보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鰍

그 꼬리를 기억하며 網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 잉어 추, 쏘가리 추

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맹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온 도랑 술렁인 뒤 건져올린

비린내 묻은 秋는 가랑잎처럼 떨구고

비슷한 꼬리의 (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만

자꾸 잡아 올린다.

(편집자주: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는 원래 한문 글자로 표기해야 하나 컴퓨터 한자의 제한으로 한글로 대치했습니다.)

----------------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한국일보

김일영


햇빛들이 깨어져 모래알이 되고

조개들은 그 빛의 알갱이로 집을 지어

파도에 마음을 실어 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던 섬


밥 묵어라

어둠이 석양 옷자락 뒤에 숨어

죄송하게 찾아오는 시간,

슬쩍 따라온 별이

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


달빛 계곡 꿈을 꾸면

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

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앞장세워 돌아오듯


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여린 삐비꽃을 씹으며

애들 소리 사라진 언덕에 앉아 있으면 석양은

머리가 하얀 사람들이

애벌레처럼 담긴 마당에 관절염의 다리를 쉬다 가고

빌려서 산 황소가 다리를 꺾으며

녹슨 경운기 쉬고 있는 묵전을 쳐다 보는 섬으로

늙은 바람이 낡은 집들을 어루만져주는 고향

그대가 파도소리에 안겨 젖을 빨던

그 작은 섬으로


*묵전: 묵혀두어 잡초가 무성한 밭


-------------------

*****귀로 듣는 눈*******-경향신문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때******-문화일보

-김병호



금줄 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은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별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


***낙타****-매일신문

-김옥숙


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낙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 속에 박제가 되어있어야 할

낙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 앞으로 걸어나올 것이다

낙타가 당신에게 올라타라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고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던 것처럼 낙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 것이다 당신은

지쳐보이는 식구처럼 낙타가 안쓰러울 것이다

선인장들은 하늘에다 무수한 가시를 박아 넣고

메마른 하늘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선인장의 눈과 귀는 뿌리에 있지 낙타가 말한다

캄캄한 지하에 눈과 귀를 박아 넣고

수만 미터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셔, 괜찮아

낙타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당신

낙타의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낙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 속을 걸어나온다

당신의 몸 속에 들어온 낙타 한 마리

문을 열면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늑골 속으로 기억 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몸 속의 낙타 한 마리 거느리고

사막을 건넌다 그림 속의 낙타는 눈썹이 길다



--------------------

*******신발論*****- <마경덕> -세계일보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