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며 갔던 한국은 그리웠던만큼 아름다웠고 내 향수병을 채워주었다.
10년 가까이 비가 안오는 사막 기후에서 생활하니깐 장대비가 참으로 그리웠드랬는데, 때마침 장마 때 맞춰서 갔기에 연수 기간내내 비오는 창밖 풍경을 음미하며 지냈다.
귀로 들어오는 교수님들의 문법, 역사, 교수법, 문화 등등 한국어 선생이 갖춰야할 종목을 스파르타 교육처럼 우리 귀에 쏟아부었지만, 내 맘은 '아띠, 웬 팔자에 없는 공부란 말인가~' 하는 불평과 졸음 그리고 교수님에 대한 예의로 공부시간 중간에 맨트 하나씩 흘리는 것을 잊지않음으로 연수기간을 보냈다. (교수님들 죄송해요. ^^*)
나뿐이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도 그러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데, 그건 뭘 배웠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을꺼란 거다. 단지 남았던 것은 어느 선생님이 정말 얼토당토않은 질문으로 우리 잠을 깨웠고, 어느 선생님의 멋진 춤솜씨가 기가막힐 정도로 잘춰서 나도 돌아가면 저 벨리춤인가 뭐시깽인가 배우고 말껴...란 다짐을 해주게 했다는 것, 아, 또한 한 방에 같이 묵었던 선생님들의 그 재미있던 표정들, 순박함, 순수함들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줬다는 것이다.
난 연수원 어느 담이 부실하며 어느 곳이 넘기가 아주 좋겠구나 하는걸 잘안다. 푸하~
나중에 누군가 그걸 물어오면 가려쳐줄라켔는데 아무도 안묻더라....다들 무쟈게 모범생들이었나부다. 그렇다고 후배연수생들에게 가르쳐 줄 맘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함 고짓말이겠지? ㅋㅋ 그래도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노심초사했던 빛나리 선생님을 함 봐주는 의미에서 입을 꾹 다물 예정이다.
어릴적부터 장난이 심했던 내 호기심의 발로지만 뭐그케 말썽을 안부리고 연수생활을 마친 내가 꽤나 대견스럽다.
아직도 기억난다. 연수기간동안 인터넷에 접속했더니 메신저에서 만난 한 지인 왈
'헐~ 벌써 퇴학당했어요?'
연수기간 내내 교탁 앞자릴 고수했음에도 머릿 속에 남은 거라곤 교수님들 말버릇, 손버릇, 걸음걸이 서있던 모양새만 기억나니 이런 학생은 재고의 가치도 없이 재교육 대상이 아니겠는가.
(아, 얼른 재교육 받으라고 또 초청장 오면 좋겠당구리~)
장대비가 내리던 날,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온 거리가 시냇물화한 그곳을 맨발로 뛰어다니던 내가 다시 그리워진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노는 사람도 있을까? 아마 난 한국에 살고 있었어도 그렇게 한번쯤 놀았을 꺼라 생각한다. 아마도 갖고 있는 옷이 많아서 아님 빨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기에 우산없이 뛰어다녔을 수도 있다. 누군 산성비땀시 머리가 다 빠질꺼라 걱정하지만 난 지나치게 많은 머리숱으로 맨날 솎아내고 쳐내는게 일이니 그건 걱정꺼리도 아니다.
부산, 대구, 울산을 수도없이 왕래하며 기차며, 버스를 맘껏 타봤다.
이 나이 되도록 혼자 여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해보지 못했다. 한국에 다니러 갈 때는 늘 식구들들이 대동되어 가기 때문에 혼자 어디 간다는 것은 상상을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나이만 먹었지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다. 아니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있었다. 좀 더 여유롭고, 풍요로우며, 느긋한 중년을 맞이하는 모양이 이뻐보였다. 이상하게 나만 그 예전 철없던 그 시절의 모양으로 아직도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자라지 못한 것같아 초조함마저 느꼈다.
엄마도, 시부모님도 생각보다 얼굴들이 좋아서..페루에서 살면 외관이 빨리 무너지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아잉~ 한국에 언능 돌아와야지' 이렇게 되내이며 보낸 두 달의 한국 방문은 눈깜짝할 새 지나가버렸다.
첨 가지는 자유로움으로 맘껏 날아다녔는데, 언제 이렇게 또 쟈유로울 수 있을까?
쟈유로운 내 영혼 돌리도~~
날짜가 되어 돌아오는 길목인 미국 공항에서 가방을 메고 들고 난 한시간을 멍하니 서 있었다.
'정말 가기싫다. 페루에...'
세 아이의 엄마란 자리도 기억나지 않으며, 오로지 '이 은혜' 이름 세자만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이럼 안되지. 가자.'
그래서 돌아왔다.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며 엄마를 반겼고, 입큰 개구리가 별명인 남편은 그 큰 입을 더 찢어 날 반겼다.
새벽의 리마는 빨리도 오고 아침이 되어 도착하자마자 한국학교에 출근했다.
반가운 선생님들 얼굴이 보였다. 역시 싸가지없는 인물들은 그 성격에 맞게 반겼고, 싸가지 있는 인물들은 이쁘게 반겼다. (뭐 내가 싫어하는 그리고 날 싫어하는 인물은 싸가지 없기마련. - 나의 변)
역시 아이들 앞에서 선다는 것은 즐겁고도 힘들다.
그렇게 무섭고 숙제도 많이 내주던 호랑이 선생인 날 애들은 너무도 좋아하며 반겨주었다.
으이구 내 새끼들.
가져온 선물들을 나눠주었다.
'이넘들이 날 반긴겨...선물을 반긴겨?'
리마의 겨울은 우중충한 안개로 온 도시를 휘감고 있다. 하루 온종일 햇볕 구경하기 힘든 우리 동네는 그나마 밤낮이 바껴 고생하는 내몸을 강타하여 몸살 아닌 몸살로 날 내려앉아 있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