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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

어릴 적 무척이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한창 사춘기에 들어 선 중학교 3학년 시절 아부지 갑자기 돌아가시고 마음에 공황이 찾아왔다. 집에서 공주처럼 떠 받들어지며 사시던 엄마는 생업에 바빠서 동생과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 내가 동생 도시락까지 챙겨줘야 했다.



엄마에게 한없이 품어지는 반감과 돈 없어 학교도 제대로 진학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그냥 막막한 맘으로 공부도 하기 싫었다.



시골 중학교였고 그나마 그때까지는 모범생으로 살았기에 상업고등학교까지 있던 그 곳에서 상고로 진학하면 학비는 어떻게 면제는 해준다고 그랬다.

난 숫자관념이 아주 약한 아이였는데 상고로 간다는 것은 내 적성하고 전혀 맞지않는 선택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유난히 반항심 많고 그 당시 논다는 아이들이 많아서 학교의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고 다녔다.

그 아이들은 수원의 도시로 놀러 나가기 전에 꼭 우리집에 들려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교복은 내게 맡기고 갔다. 난 그게 싫었지만 그냥 그 옷들을 맡아두고 있다가 그들이 돌아오면 내주곤 했다.

동네 친구 하나가 또 말썽을 부린게 들통나서 그 아이 엄마가 교무실에 불려와 있었다.



선생님과 그 아이 엄마는 상담을 아주 오래했다. 우연히 그 교무실 앞을 지나가다 선생님 말씀이 내 귀에 들렸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호명하며 나랑 친하게 지내게 하면 나쁜 길로는 절대로 안빠질 꺼라고 했다. 난 선생님이 보증하는 아주 착하고 성실하며 좋은 학생이랜다.



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 날 알아주는 이도 이 세상에 존재했구나.

막막했던 내 맘에 빛이 들어왔고, 난 그 선생님 말에 나를 맞추려고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친구들이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하면 잔소리쟁이가 되어서 좋은 친구가 되어주려고 노력했다.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엄마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죽고만 싶었댄다. 동생과 날 키울 자신이 없어서 셋이 약 먹고 죽을 생각도 했다. 그래서 쥐약을 타서 먹으려고 사왔는데 바로 그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즐거운 얼굴로 장학금 타게 됐다고 자랑하는 바람에 마음을 고쳐 먹으셨다고 한다.



그걸 난 작년에 한국에 다니러 갔을 때 엄마가 내게 미안해 하며 20년도 더 지난 그 일을 고백하셔서 알았다. 그 땐 참 어려웠지 하며 그 이야기를 하시는데 새삼 그 선생님이 더 고맙고 보고싶었다.



그 때 선생님이 주선해 주셨던 장학금으로 인해 엄마도 용기를 얻었고 우리들은 덕분에 목숨이 건진 셈이 되었다. 아주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그 선생님 성함도 이젠 가물가물 하지만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 셋의 목숨을 건진 줄도 모르시지만 선생님의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 따스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선생의 자리는 아이들에게 아주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난 참 복이 많아 그렇게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지만 내가 아는 이는 반대로 상처를 받았던 일이 많았나부다.

그 이가 쓴 [졸업]이란 제목의 느낌이 있는 글을 첨부해 올려본다.





***********************졸업**********************





오늘은 아들의 졸업식이다

드라마가 그랬듯이 이별을 준비하는 날은 여지없이 비가 오나보다

양복 입을 일이 자주 없는 나는 치적이는 겨울 비를 맞으며 잘 다려진

겨울 양복으로 멋을 부려 졸업식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를 따라불렀다

졸업식의 엄숙함은 간데없고 학부형 들의 수다로 졸업 식장이 시장 바닥이 됐다

한 시간 만이라도 좀 숙연했으면 좋으련만..

중간에 아이들에게 상장이 수여되고 모두 골고루 이런 저런 종류의 상을 받았다

뒤에 있던 아저씨가 한마디했다

'무슨 상을 한사람도 안빠지고 다 주냐? '



그말에 난 마음이 상한다 나의 아들 당신의 아들이 6년동안 별일 없이 잘 다녀준게 대견하지 않은가?

난 모두에게 골고루 상을 나눠 주는게 좋은 결과를 낳을꺼라 생각하기에..

이내 나는 집중력을 잃어 버리고 추억의 졸업식 날로 빠져들었다



어렵게 운수업을 시작하신 아버지는 계속되는 기사들의 교통 사고를 금전적으로

감당하지 못하시고 그토록 원하시던 업을 접어야만 했다

경제적으로 가정은 불안했고 그 무렵 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육성회비와 실내화 착용이

의무화 되던 즈음 난 언제나 그 돈을 학교에 제때 가지고 가지 못했고 실내화를 살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였다



언제나 처럼 육성회비의 독촉과 실내화를 사 신고 오라던 여선생님의 매질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하지만 난 어린 마음에도 집의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고 실내화 얘기는

끄집어 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리 반에서 마지막까지 실내화를 사 신고 가지 못했던 나에게 어느 날 선생님은 등교길에

신고 온 신발을 입에 물고 양손을 들고 수업을 받으라고 하셨다

신발을 입에 물고 침을 흘리며 아이들의 조롱꺼리가 되어 그렇게 하루 수업을 마쳤다

그래도 난 울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내가 울면 내 자신이 더 초라해 보일것만 같았다.

'난 당신의 매질이 무서워 실내화를 사지는 않을꺼야'



그렇게 초등학교 생활의 마지막이 될 겨울 방학을 맞았고 방학 숙제 중에 만들기가 있었다

공부는 늘상 꼴등을 맡아놓고 했지만 체육과 만들기 숙제는 언제나 신나고 재미 있었다

음료수 병을 이용해 난 예쁜 인형을 만들었고 개학 하던 날 숙제를 제출했다



아이들은 내가 만든 게 일등을 할꺼라고 확신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며 어쩌면 학교 생활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장이 탐이났다

작품을 선생님들이 심사를 했고 선별된 작품속에 내 인형이 있다는걸 확인하고 가슴이

들떠 그렇게도 가기 싫었던 학교 등교길이 신이 나기 시작했다



상장을 주는 날이 되어 난 두근 거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안절 부절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방학 숙제로 낸 만들기 과제물 상장을 나눠 주겠다고 했을때 반 아이들 모두 내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부러워했다



삼등부터 한 사람씩 호명하고 상자을 나눠주었다 ........... 긴장된다

마지막 일등 상장을 호명하는 순간 난 앉아 있는게 너무 힘들었다

그건 내 이름이 아니었다... 반장의 이름을 부르는게 아닌가



모두들 의아해 했고 난 침묵했다

그 이유를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졸업이 다가오고 난 졸업을 맞았다

식이 끝나고 난 운동장을 셀수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이별의 섭섭함 보다 후련함이 더 좋았다

다시는 선생님들을 만날일도 뵐수도 없었던 일들이 왜 그리 속 시원하던지..



생각 속에 젖어있다 보니 어느듯 아들의 졸업식도 끝이 났다

모두들 디지털 카메라로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집 카메라는 검은 색 구형 아날로그 카메라다

디지털의 샤프함과 편리함 보다 난 이 촌스러운 카메라가 더 좋다


아들의 졸업식날 내 가슴속 구형 아놀로그 카메라는 우울했던 그 장면을 찍어내고 있다




http://cafe.daum.net/elegante332 친구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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