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벚꽃을 20년만에 보는 감회는 감동이었다. 예전보다 많은 벚꽃나무와 흩날리는 꽃잎에 취해서 학창시절 꽃에 취해 강의도 빼먹고 앉아있던 그 때가 떠올랐다.
많은 건물들이 들어 찬 경희대는 시설이 좋아진 반면에 숲 속같던 분위기는 감소되어 있었다. 나이 40넘어 다시 시작하는 공부라, 다시 들어 온 대학이라 설레는 면도 없잖아 있었다. 학술제와 축제도 맛보며 늦깍이 대학생 생활을 만끽했다.
초대되어 온 작가 신경숙. 난 그녀의 소설 '외딴 방'을 울먹거리며 읽었었다. 감동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존경스럽다. 그 섬세한 문체가 부럽다. 페루에서 왔다니까 반가워해줬다. 음... 태어나서 처음으로 싸인도 받아봤다. 같이 기념 사진도 찍고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성장기에 겪었던 모든 경험들이 글쓰기로 나온다는 말이 요지였다.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부러웠다.
교수님들은 다 내가 다녔던 경희대 국문과 선후배들이었다. 학생들보다 교수님들과 더 친하게 지내게 됐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불러주며 학생보다는 선배, 후배로 날 대해줬다. 황송스럽게도~
벌써 유명해진 선배들은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인정받으며 살고 있었다. 서하진 교수는 1학년 때의 우리과 조교이기도 해서 너무 반가웠다. 지금은 꽤나 유명한 소설가가 됐다고 한다. 미안하게 난 그 선배의 소설을 하나도 읽어보지 못했다.
이 나이 먹도록 난 뭘했지? 이제라도 열심히 내 자리를, '나'를 찾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났다.
작가 신경숙씨는 나이 24살에 등단했다고 한다.
'와 부럽다. 난 여지껏 아무것도 안했는데...'
내 입에서는 저절로 부럽다는 말이 나왔다. 내 말을 들은 교수님은
'뭔 말이야. 지가 페루서 살아봤어? 아르헨티나서 살아봤어?'
하하하~ 이론~
해외에서 살아본다는 것이 좋은건가? 교수님은 좋은 경험이라고 했다. 일찍 등단하면 세기적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고 했다. 그게 신경숙 작가의 난관이라나...
암튼, 날 따스하게 다정하게 선배 내지는 후배로 대해주는 교수들이 너무 고마웠다.
친정 어머니가 중간고사 기간 딱 맞춰서 무릎 연골 이식 수술을 받으셨다. 그래서 병간호한답시고 병실에 가서 책을 코에 붙이고 있어야 했다.
옆에서 보다 못한 다른 환자 보호자가 나보고 엄마 물도 자주 드리고 물수건으로 얼굴도 자주 닦아드려야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걸 들은 엄마는 나이많아 공부하는 딸이 대견하기도 했는지 우리 딸은 공부하는 학생이라 그렇게 못한다고 나대신 변명을 해주시는데 더 미안했다. 그래도 열심히 노란줄 그어가며 책을 읽었다. 교수들이 다 선후배라는 것에 대한 중압감도 없잖아 있었다. 실망스러운 점수를 주면 예의가 아닐 듯 싶었다. 게다가 이왕 시작한 공부 성적 장학금도 받아보고 싶었다. 공부하는 것이 힘들긴하지만 즐겁다. 재미있다. 그리고 목표가 생긴다는 것. 정말 좋은 일 아닌가.
아빠없이 엄마 혼자 벌어 대학까지 보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돈이 모자라 대학을 휴학하며 학업을 중단했기에 항상 내게 죄책감을 갖고 계셨다. 병간호용 침대에 엎드려 책을 보는 내 손을 잡고 '엄마가 못나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내 나이가 몇인데 '우리 딸은 이담에 큰 사람 될꺼야'라고 믿는 우리엄마.
매일 츄리닝 입고 시쭈구래 있는 딸이 안스러운지 이제 병원에 이쁜 옷 좀 입고 오랜다. 그래서 하루는 병원에 이쁘게 차려입고 가서 병실에 있는 모든 분들께 오렌지를 하나씩 돌렸다. (우리 엄마가 그게 젤루 폼난다고 하셨다. ㅋㅋ)
먼 페루에서 사는 이 딸이 뭐그리 자랑스러우시다고 외국에서 딸이 들어와서 병간호 해준다고 자랑삼아 말씀하시고 몰래 내 옆구리 찔러서 오렌지도 돌리게 하고... ㅎㅎㅎ 귀여운 우리 엄마. 아직 공주끼가 남아있어서 환자임에도 추레하게 있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머리도 단정하게 하고 항상 입술에 립그로스라도 발라드렸다.
시간을 하루 내어서 한글학회를 다녀왔다. 같은 방을 쓴 네델란드 박은영 선생님도 날짜를 나와 우연히 맞춰서 한국에 나왔기에 같이 방문했다. 오랜만에 보는 박은영 선생님은 더 이뻐지고 어려보였다. 정말 반가웠다. 미국 별찬 선생님도 같이 있었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글학회 선생님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 담임 역할을 하셨던 젊은 오빠 선생님은 운동으로 살을 빼서 나이가 훨씬 어려보였다.(나도 살빼야지.)
김계곤 회장님과 연수 때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맛있는 반찬 안드시고 계시길래 안드시면 내가 다 먹는다고 하니까 그 반찬을 당신 밥 그릇 앞에다 끌어다 놓으시는 귀여운 면도 갖고 계셨었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발그레한 홍조를 띄우시고 정정하셨다. 방문 싸인도 남기라고 해서 박은영 선생님과 방문 기록도 간단하게 남겼다. 사진도 이리저리 찍었는데...아무래도 뚱뚱하게 나온 듯 싶다.
사무총장님은 나를 '까불이'로 기억을 했다. 이론~ 그래서 바로 반격을 했다. 두꺼비같이 생기신 거로 기억한다고. 그래도 방문 기록 때 내 글씨체가 이쁘다고 해서 기분 좋았다~ (사실 이쁘게 쓰려고 신경 좀 썼드랬다.)
제9회 연수회가 열린다고 했다. 이왕 연수회 하는 것 해외에 있는 한글학교 선생님들을 부르는 것이니 비행기 표가 싼 비수기에 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의견을 냈다. 비행기표 값은 비수기와 성수기 값이 천지차이 아닌가. 선생님들은 좋은 의견이라고 하셨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남은 비용으로 재연수 프로그램도 마련해야겠다고 했다. (재연수가 있단말시? 한국학교에서 쫓기나문 안되겠구먼~)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게 해준 한글 학회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수원으로 내려오기 전 친구 집에 들렸다. 늦둥이로 낳아 이제 두 살짜리 아가는 갖은 재롱을 다 피워댔다. 이효리가 나오는 광고음을 듣더니 갑자기 티를 올려 볼록한 올챙이 배를 내밀고 배튀기를 하는 게 아닌가. 으허~ 그게 바로 배꼽티를 입은 이효리 춤을 추는 것이라나 ㅎㅎㅎ 너무 재미있어서 자꾸 춰보게 했다.
울산 사는 동생네도 엄마 수술 기간에 딱 맞춰서 딸을 낳았다. 너무 작아서 일주일 인큐베이터에서 지내다 나온 아가는 여리디 여리고 이쁘기까지 했다. 게다가 고모탱이인 날 닮은 면도 있어서 더 사랑스러웠다. 젖을 빠는 힘이 아직 약해서 기계로 짜서 주는데 그 동안 아가는 입을 삐죽거리며 울어댔다. 지 동생이 우니까 네살짜리 장난꾸러기 조카가 올케 흉내를 내며 말했다
'어~ 아가야 울지마 울지마 엄마가 젖 짜줄께에~'
ㅎㅎㅎ 너무 웃겨서 뒤집어졌다. 그 말을 들은 아가도 울음을 멈추고 지 오빠를 쳐다봤다.
여러가지 일이 겹쳐서 정신없게 보낸 짧은 한국 방문이라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찜찜하고 미안했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봄은 날 행복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