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30분 아침 보충, 정규 수업, 밤 9시까지 자율학습 감독. 중 3 담임의 일과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교사는 3학년 담임을 꺼린다. 여유없는 일과도 일과지만 고등학교 ‘입시’가 있기에 그 부담감이 더 크다. 나도 5년을 버티다 결국 3학년 담임을 맡았다. 담임을 맡겠다고 한 때부터 무거운 짐을 진 기분과 함께 사명감이 밀려온다. 아이들 인생이 걸린 문제다!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모두 고등학교에 보내야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고 전략과 전술을 짜본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처럼… “피 터지게 공부하자!” 시험 때의 우리 반 구호이다. “코피 터지게 공부하자” 준말이다. 내가 “코”를 외치면 아이들은 뒤이어 “피 터지게 공부하자!” 라고 외친다. 좀 과격하고 유치하기도 하지만 시험에 대한 흥과 긴장감을 동시에 주기 위해 만들어낸 구호이다. 그나마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들은 시험 때 더 열심히, 기쁘게 공부해 성적우수 학급 1등을 해 떡 잔치도 했었다. “내일이 기말고사 마지막 날인데 아직까지 코피 터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요…. 제가 여러분에게 장담합니다. 밤을 새도 다음 날 12시까지는 정신 말짱합니다. 마침 내일 기술가정 시험이 있습니다. 오늘 모두 밤 새세요. 영어수학이야 하루아침에 안되지만 기술가정은 밤 새면 모두 90점 이상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여러분 모두에게 밤이든 새벽이든 불시에 전화하겠습니다. 그 때 자느라 못 받는 사람은 각오하도록!” 거의 협박이다. 그런데 우리반 아이들, 12시가 넘어서도 모두 전화를 받는다. 기특한 놈들… “때르릉… 때르릉… 때르릉………..…” 한참을 울려서야 혜진이가 전화를 받는다. “어머… 선생님, 저 지금 자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세수하고 금방 공부할게요.” 의외였다. 공부에 악착같은 혜진이가 자고 있다니… 화장실에 있었다는 둥 대강 둘러댈 수도 있었는데 사실대로 말하는 솔직성! 완벽하기만 했던 혜진이의 인간적인 틈을 보는 것 같아 오히려 흐믓했다…. 이거 아무래도 편애??? 교사가 편애를 하면 안되지만 유난히 예쁜 아이가 있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 어제 너무 더워서 자버렸는데 선생님이 깨워주셨어요. 덕분에 가정 100점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선생님 말씀대로 밤을 새도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정신이 말짱하더라고요. ^*^' 혜진이… 트럭운전을 하는 아빠의 박봉에 공부방 하나 없이, 셋이나 되는 동생들 돌보느라 정신 없으면서도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보통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공부에 시간을 쏟느라 학생들과 두루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데 혜진이는 달랐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님보다 혜진이에게 묻기를 즐겨하였고, 혜진이는 친절히 가르쳐 주며 친구들을 돕는 것을 아주 기뻐했다. 소외된 친구가 있으면 먼저 친구가 되어주었고, 중창, 학생회 활동에...주어진 자신의 세상을 종횡무진하며 최선을 다하였다. 생각은 어른스럽고, 마음은 아이마냥 순수하고, 행동은 당당하고 야무진… 이 모든 것이 조화되어 있는 혜진이를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을로 치달을수록 아이들은 입시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원서를 쓰는 시간이 초조하게 다가왔다. 혜진이가 특차 전형인 ‘D 외국어 고등학교’에 응시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러나 당시 최고였던 ‘D 외고’는 혜진이에겐 역부족이었기에 나는 ‘H 외고’를 권하였다. “선생님, D외고는 저에게 벅찬 곳인 줄 알아요. 저처럼 과외도, 학원도 다니지 않은 학생에게 불리한 것도 알고요. 떨어질 각오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고 중의 최고’의 아이들이 도전하는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요.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당찬 혜진이다운 태도다. 그러나 떨어질 것을 알면서 원서를 써주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무리 떨어질 것을 각오했더라도 상처를 많이 받을 텐데… 그러나 혜진이의 눈은 계속 괜찮다고 힘있게 웃고 있었다. 그 특유의 당당한 미소는 원서에 도장을 찍게 했다. 그래, 최고의 아이들과 겨루며 네가 겪지 못한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오려무나… “…… 선생님, 유난히 추운 아침, 엄마랑 ‘버스’를 타고 D 외고에 갔어요. 학교 앞은 고급 승용차 전시장이더군요…. 저만 자가용을 타고 오지 않은 것 같았어요. 엄마랑 시선이 마주쳤어요. 그 어느 때보다 저와 엄마는 따뜻한 시선을 나누었어요.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엄마에게 먼저 가시라고 하고, 승용차 사이를 가로질러 아주 당당하게 들어갔어요. 아니, ‘당당해지자…’ 라고 저에게 다짐했지요.… 교실에 앉았어요. 문이 열리고 멋진 코트를 입은, 귀족 티가 나는 학생이 걸어오더니 제 앞에 앉았어요. 그러자 주변의 아이들이 그 학생 곁으로 모였어요. 학교는 다른데 모두 아는 사이였어요. 같은 과외팀이더군요.… 딴 세상에 온 기분이었어요. 저 혼자 외톨이가 된 것 같기도 했고요…. 역시 시험은 어려웠어요. 교과서만 충실히 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더군요… 그러나 최선을 다했어요…. 시험을 마치고 나오니 아침과 같이 고급 차들이 즐비했어요. 이젠 놀랄 일도 아니죠. 아침보다는 더 편안하게 승용차 사이를 당당히 걸어 나와 버스를 탔어요. 버스에 앉아 창 밖을 보는데 선생님 생각이 제일 먼저 났어요… 선생님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넓은 세상… 그 세상의 틈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시고자 했던 선생님…. 제 수험표예요. 다른 아이들에겐 그냥 종이조각이겠지만 저에겐 특별한 의미를 주기에 때어 왔어요. 선생님께 드리고 싶어요…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하던 저에게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았지만 아주 강하게, 더 넓고 치열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 치열한 세상으로 나가겠지요. 그 때 더욱 당당할 수 있도록 열심히 생활하겠습니다… ” 혜진이가 시험을 보고 온 다음날 내게 쓴 편지의 내용을 기억나는 각색해보았다. 위의 양 보다 5배는 더 긴 혜진이의 편지를 그대로 옮겼으면 15세 소녀답지 않은 당당함과 성숙함을 엿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내게 그 편지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렇지만 혜진이로 인한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혜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참 많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혜진이 특유의 당당함과 끈기로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최고’를 향해 노력하고 있지 않을 까 싶다. “혜진아… 선생님은 최고를 향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해. 첫째 부류는 위만 향해, 오로지 목표를 위로 정해놓고 그 곳만 바라보고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은 자기 목표 외의 세상에는 관심이 없지. 보려고 하지도 않고…. 오로지 Top의 자리가 인생의 전부인 양 시선을 뾰족하게 고정시키지… 둘째 부류는 똑같이 위를 향해 가는 것이 목표이지. 그래서 열심히 위를 향해 가지만 그 목표 외의 세상에도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사람! 그런 사람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다른 세상을 더욱 잘 보려 하고, 잘 볼 수 있게 되지. 둥근 세상만큼 넓고 포근한 시야를 가지고… 혜진아… 선생님은 우리 혜진이가 두 번 째 부류의 최고자가 되리라 믿어. 그래서 지금도 너 자신과, 또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겠지…. 그러나 너의 마음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그 누구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고… 성숙의 색깔이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이 가을에. 당당함이 배어있는 너의 그 환한 미소가 참 그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