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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이어진 열두 해의 인연-함박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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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이어진 열두 해의 인연 한국어를 가르치며 보낸 나의 시간들은 내게 많은 인연들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피천득님의 ‘인연’ 이라는 수필을 교과서에서 접하고는 가슴 설레 하던 시간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싶게 살면서 나는 ‘생활’이라는 또 다른 운명에 떠밀려 대부분의 그 인연들을 잊고 살았었다. 그렇게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렸는데 다시 그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 한국어 지도를 시작한 지 12년이 지난 ‘나’에게 찾아왔다. 나는 1994년 가을부터 한국어 교육 봉사단원의 자격으로 베트남 하노이대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지금은 베트남이 한국과 너무나 가까워졌지만 당시 베트남은 1992년 한국과 처음 수교가 이루어진 후 1994년 하노이대학교에 처음 한국어과가 생긴 곳이기에 교사 생활을 하다가 그곳으로 찾아간 나를 주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었다.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요즘도 개발도상국으로 한국어 교육을 하러 가겠다고 한다면 가족들과의 마찰을 어느 정도 경험할 텐데 12년 전 내가 갈 때만 해도 베트남은 공산주의 사회라는 인식 때문에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도 되느냐?’ 면서 어른들께서는 더 크게 만류하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패기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결정이었다. 당시 기자이셨던 작은아버님을 설득하여 일주일간 가출까지 감행하면서 쟁취한 한국어 교육 행이었다. 그 어떤 매력이 베트남으로 나를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먼지 이는 하노이 거리 곳곳을 누비며 가르쳤던 한국어는 비록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곳에 없지만 지금도 베트남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사회주의 사회 특성상 비자 발급이 원활하지 않아 어렵게 수업을 시작하게 된 하노이 대학교는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다. 대충 바른 시멘트 벽면에 칠한 초록색 페인트를 칠판 삼아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걸레를 칠판지우개로 써가며 수업했어야 했었다. 그래도 내가 처음 맡게 된 하노이종합대학교 문과대학 동양학부 한국어전공 학생 15명의 빛나는 눈동자는 지금까지 한국어를 가르치면서도 잊을 수 없는 열의로 가득한 눈동자였었다고 기억한다. 첫 수업에서 젊은 한국인 여선생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짓궂은 학생 몇몇이 다음날 있을 두 번째 수업 강의실(학교와 멀리 떨어진 기숙사 건물의 빈 숙소)로 안내하는 일을 ‘타이’라는 수줍음 많던 시골 출신 남학생에게 맡게 하였었다. 그렇게 첫 수업에서 맺어진 ‘타이’와의 인연은 다른 학생들과 연락이 끊겨 소식을 모를 때까지 ‘타이’가 취업한 신문사를 통하여 몇 년간 더 이어졌었다. 애써 외면하려고 했지만 불과 서너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선생과 제자들 간에는 재미있는 추억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기억들이 생생하기만 한데 지금 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아버님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한국에 다니러 간다’는 연락조차 제대로 못하고 떠나게 된 베트남을 다시 돌아가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나는 아쉬움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베트남에서의 생활은 내게 많은 기회들과 함께 지금까지 한국어를 지도하며 살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지난 12년 동안 한류열풍 등으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과 한국어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짐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한국어를 지도하시는 분들 또한 많아졌다. 한국 학회나 재단에서 국외 한국어교사 연수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하는데 오스트리아에서는 올해 내가 국외 한국어교사 연수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전에 받아본 40명의 국외 한국어교사 연수생 명단 중에 베트남 선생님 이름이 있었다. 내게는 젊은 열의로 처음 한국어를 강의한 베트남이 각별한 곳이었기에 ‘한국인이 아닌 베트남인 교사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반갑고 설레는 마음에 그 이름을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리 귀한 이름이 아니기는 했지만 ’응웬 프엉 럼‘이라는 적혀져 있던 그 이름은 내게는 특별히 잊지 못할 이름이었던 것이다. ‘럼’은 12년 전 하노이대학교에서 내가 처음 만난 동양학부 한국어 전공 학생들 중 가장 성실한 여학생이었다. ‘럼’ 덕분에 난 항상 즐겁게 수업에 임할 수 있었다. 그 친구와는 비록 선생과 제자였기는 했지만 성격도 비슷하고 마음이 잘 맞아서 종종 함께 하노이 시내 구경을 하기도 했던 사이였었다. 어느 날은 자기 오토바이가 고장 났다며 특별히 아버지 오토바이를 끌고 와서 함께 시내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대중교통 수단이 전무하다시피 한 당시 베트남에서는 오토바이가 집안의 재산 목록 1호였었다. 그런데 그 날 베트남 불량배들을 만나 오토바이가 쓰러지면서 다치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오토바이도 꽤 많이 망가졌었는데 그때 자기도 다친 몸이었으면서 도리어 내게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많은 기억이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설마 하였다. 이 넓은 세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테고 베트남만 하더라도 하노이 뿐 아니라 다른 베트남 도시의 많은 기관에서 한국어를 지도하는 선생님들이 있을 텐데 어찌 10여 년 동안 연락도 못하고 지냈던 제자와 함께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연수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전 세계에서 단지 40명의 선생님들이 함께 받는 연수였는데... 어찌 되었건 설레는 가슴을 안고 한국으로 출국하여 연수원에 도착하였다. 그래도 1994년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처음 생긴 한국어과 학생들이었기에 혹시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그 베트남 선생님부터 찾아보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크게 기대는 안했지만 실망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응웬 프엉 럼’이라는 이름의 선생님은 아이가 어려서 베트남에서 늦게 출국하여 7월 3일 연수원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의 나이로 미루어 볼 때 ‘내가 알던 ‘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또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레는 시간을 보내고 7월 3일 아침 첫 수업 시간에 드디어 그 베트남 선생님이 나타났다. 믿을 수가 없었다. 12년 전 하노이 대학교에서 내게 자모음부터 처음 배우던 ‘럼’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설마 했는데. ‘그리움이 크면 만남이 이루어진다더니...’ 1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비행기로 각각 열 두 시간과 다섯 시간을 날아 와야 하는 오스트리아와 베트남에서 한국 하늘 아래의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한 연수를 함께 받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동안 ‘럼’은 계속 한국어를 공부하여 베트남 하노이외국어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있었다. ‘럼’은 내 기억 속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15명의 학생들 중에서도 특히 여러 가지 통하는 점이 많았던 학생이었는데 그 학생이 한국어 선생님이 된 것이다. 만남부터가 특별한 인연이었기에 ‘럼’을 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대로 된 이별을 나누지 못했던 그 옛날의 아쉬움과 뜻밖의 만남이 가져다 준 반가움이 겹치면서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만감이 교차하였다. 그날부터 연수기간 내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15명의 학생들의 이야기들과 함께 베트남 한류열풍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뜨거운 여름을 마다하지 않고 한국어를 가르친 내가 있었던 12년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었다는 민망스럽지만 고마운 칭찬도 들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열두 해 전 베트남에서 만났던 하노이대학교 학생들의 근황은 날 너무나 행복하게 만들었다. 좋은 집안에 머리도 무척 명석하였던 ‘흥’이라는 남학생은 우리나라 국영방송국에 해당하는 베트남 통신사 사장이 되었다고 하고, 일 이등을 앞 다투었지만 수줍음이 많아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는 않았던 착한 미소의 미소년 ‘뚜언 앵’은 하노이대학교 한국어과 베트남인 교수 1호가 되었다고 하였다. 말을 제일 잘 하고 항상 총명한 눈빛을 반짝이던 예쁜 ‘언’은 한국인과 결혼하여 사업으로 성공하였다고 하고, 공부에 항상 진지한 욕심을 보이던 키 큰 ‘번’은 남편이 차관 후보에까지 올랐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공부에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항상 예의 바르던 키 작은 ‘번’은 예상 외로 베트남 경찰이 되어 한국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했고. 그동안 많은 학생들을 지도하였지만 낯선 베트남 이름들이 오히려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고 또렷이 기억되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한국어과 학생 모두가 훌륭한 모습으로 베트남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한국어 교육을 위해 열정 하나만을 밑천 삼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젊은 날을 베트남에서 보냈었다는 것에 나는 다시 한 번 더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꿈같은 만남이었다. 이제는 나만큼이나 한국어를 잘하는 ‘럼’과 더욱 나은 한국어 교육을 위해 토론하고 연구할 수 있었던 짧지만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위치로 돌아와 있다. 1994년 당시 베트남은 전화 보급률이 낮아 한국과의 연락은 왕복 한 달이 걸리는 편지를 이용하거나 대사관 팩스를 이용해 급한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그동안 베트남도 빠른 누리집 망을 갖추게 되었다. 덕분에 지금 나는 ‘럼’과 자주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제 ‘럼’은 하노이외국어대학교에서 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또 다른 꿈나무들을 위해 한국어를 지도하고 있다. 열두 해 전 내가 처음 맺었던 인연보다 더 귀한 인연들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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