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선생님에게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교사가 학생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나 싶다. 학생은 교사가 자신의 이름만 불러주어도 아주 기뻐한다. 김춘수님의 시, ‘꽃’에서 처럼…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향심’에서 언급하지 못한 내가 꿈꾸던 교사의 모습 중 하나가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며, 특히 소외되고 소심한 학생들이 자신감을 갖도록 격려하는 교사’ 이다. 일단 나는 우리 학급 외에 내가 가르치는 480 명의 이름을 가능한 한 빨리, 모두 외우려고 노력했다. 학교 어디서든 아이들과 마주치면 꼭 명찰을 보고 열심히 외웠으며, 시험 감독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시험 때는 번호대로 앉기 때문에 출석부의 명단을 보고 하나하나 확인하며 복습(?)도 하고 미처 외우지 못한 학생들을 마저 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세 달 안에 아이들 이름을 모두 외우고, 항상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15 번, 발표하세요”가 아니라 “김영미 발표하세요.” “저기 뒤에서 두 번째, …”가 아니라 “김준호, 조용히 하세요”로. 비록 지적을 할 때라도 선생님이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면 ‘어떻게 내 이름을??!!!’ 놀라면서도 아주 기뻐한다. 이름은 열심히 외워서 열심히 불러주면 되지만 480명의 아이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 같지 않기에 재주가 많은 아이에게 기회가 많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최대한 ‘동등한 기회’를 주려고 호시탐탐 상황을 살폈다. 수업 시작 전, 반장이 하는 ‘차렷, 경례…’ 일제시대의 잔재이며 교사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기에 내 학급과 수업에서만은 이를 없앨까 했으나 아이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절호의 찬스로 활용하였다. 학생이면 주번은 누구나 한다. 일찍 와서 교실 뿐 아니라 교내 외 청소도 하고 물도 떠다 놓고, 화초에 물도 주고… 주로 청소 위주의 의무이지 권한은 없다. 나는 그들의 노동의 의무 위에 ‘사회과 대표’로서의 권한을 실어주었다. ‘차렷경례’는 물론 숙제 걷는 일, 수업도구를 챙기는 일 등 학급에서 누군가의 도움이나 인솔이 필요할 때면 모두 주번에게 권한을 주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명하는 일을 하거나 교사가 사용한 수업도구를 챙겨 들고 선생님과 함께 교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즐기기에 모두 싱글벙글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임무는 역시 ‘차렷, 경례’ 이다. 5초 남짓한 그 발표(?)를 위해 주번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하니… 그 시간만큼은 자신이 ‘반장’이 된 듯 흐믓한 미소를 짓고, 아이들에게 명령(?) 할 때면 나도 행복한 미소를 보낸다. 그 아이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도록… “차렷!” “김종서, 차렷!, 이지현 책보지 마세요… 차렷!”, 기회는 이 때다 싶게 자신의 구령에 따르지 않는 학생을 더욱 호령하며 신나하는 남학생, “차려어엇… 겨엉례에…” 자신이 없으면 집에서 연습해서라도 크고 당당하게 하라고 했건만 모기만한 목소리로 수줍어 어쩔 줄 모르던 여학생(요런 학생은 잘할 때까지 시켰다 ^*^)… 반장이 일률적으로 할 때와 달리 수업 시작을 흩트리는 경우도 있었으나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고 활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반면 암묵적으로 누려왔던 자신의 권한을 빼앗긴 반장들은 기분이 어떠했을 지… 그러나 나에게 빼앗긴 권한을 확실하게 보상받는 학교 행사가 하나있다. ‘간부 수련회!’ 각 학급의 반장, 부반장, 학생회 임원, 종교부 임원 등 학교의 대표가 되는 학생들은 매년 봄, 금토일로 이어지는 수련회를 갔다온다.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들고, 꼭 2박 3일의 수련회가 필요한 지 의문이지만, 종교재단 학교라 신앙적으로 생소한 아이들에게 학교의 특성을 빨리 파악할 기회가 필요하기에 이해할 만도 하다. 어쨌든 간부수련회를 떠나는 금요일, 간부학생들은 들뜬다. 1200 명의 학생 중에서 대표로 뽑혀 연수를 가니 어린 마음에 잠도 안 올거다. 그러나 그곳에 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간부들이 부러움과 동시에 샘도 나고, 간부가 되기를 가장 소망하는 시기일 것이다. 나의 평등박애(?) 사상에 맞지 않다 보니 나도 덩달아 간부수련회 떠나는 날은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똑똑똑…” 5교시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선생님, 간부수련회에서 ‘중창대회’가 있는데요. 반장 OO 좀 빼주세요. 같이 중창 연습 좀 하게요.” “안 돼!” “아이… 선생니임…다른 조들도 다 지금 연습 하고 있어요… 우리 조도 선생님만 허락해주시면 돼요. 부탁드려요오….” 평소 나와 가까운 용철이가 애교까지 부려가며 간청을 한다. “너희 지금 너희 생각만 하지, 다른 친구들 생각은 안 하는 것 알아? 아마 전교생 중에 간부수련회 안 가고 싶은 학생은 한 명도 없을 거야. 선택되어서 가게 되었으면 선택된 사람처럼 행동하세요. 가서 학교 간부로서 어떠해야 하나를 잘 배우고 올 것이지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꼭 티를 내야겠어?… 게다가 너희는 6교시도 하지 않고 일찍 떠나면서 노래 연습때문에 수업을 빼먹겠다고? 지금 너희 들의 행동이 다른 친구들에게 소외감과 상처를 주고 있다는 생각은 못 한거야, 안 한거야? 빨리 교실에 돌아가 수업하도록!, 그리고 조요옹히 떠나도록!”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용철이 일행을 돌려보냈다. 용철이는 내가 맡고 있는 종교 서클 대표로 조리있는 말솜씨와 솔직하고 당당한 의사표현으로 유명한 아이다. 회의 때는 핵심을 끄집어 내어 결론까지 이끌어 내는 솜씨가 어른을 능가하며, 초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해서 인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면 의젓한 모습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 그의 능력은 간부수련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교사와 학생을 감탄시켰으리라… 아이들이 간부수련회에서 돌아오고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항상 그렇듯이 교실에선 간부수련회 얘기가 꽃을 피우고, 갔다 오지 못한 아이들은 호기심 반 부러움 반으로 그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거 중창대회 1등 해서 부상 받은 건데….” “내 유언장을 미리 쓰는 시간이 있었는데 쓰다가 울어버렸어…...” “난 캠프파이어가 너무 좋았어. 모닥불 앞에 모여 노래 부르는 경험은 처음이었거든…” 이번에도 학생과와 종교부에서 간부수련회를 위해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준비했나보다. 그런 경험을 아이들 모두하면 정말 좋을 텐데… 주번 돌아가듯이… 교무실에서도 이번 간부 수련회는 어떠했는 지 서로 묻고 의견을 나눈다. 학교 전도사님이 행사를 끝내며 받은 용철이의 소감문을 보여준다. “……. 생각해 보면 나는 초등학교, 중 3 인 지금에 이를 때까지 항상 학급, 또는 학교의 임원을 했고, 회의를 하든 발표를 하든 모든 사람을 이끄는, 주목 받는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학교임원이 되고, 또 간부수련회를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 돼버렸다. 매년 겪는 수련회이기에 설레임보다는 즐거운 게임이나 프로그램, 그리고 대표 기도나 사회 등 내가 친구나 후배들, 선생님 앞에서 주목 받는 일이 더 기뻤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수련회에 참여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 후배들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만약 내가 간부수련회에 못 왔다면 나의 기분은 어땠을까? 3년 내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임원으로 일하고 간부수련회도 참석했지만, 간부로서 무엇을 배운다기 보다 나는 ‘일 잘하는 간부’라는 자부심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간부수련회를 떠나기 전‘이미’, 간부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 2박 3일은 나의 능력을 드러내기 보다 조직 안에서의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그리고 먼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렸던, 그 어느 해보다 의미있는 수련회가 되었다. ‘간부’로서의 마음가짐을 갖도록 채찍질 해주고, 진정한 간부'로서 거듭나도록 나의 눈과 마음을 넓혀주신, 인간성 좋은 김태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 전도사님은 깍쟁이인 내가 왜 인간성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며 집요하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내려 했지만 나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인간성 좋은(?) 내가 용철이 일행이 수업을 빼먹으려고 했던 비리(?)를 폭로할 수는 없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