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가라…'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당당하고 신선한 바람의 냄새는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한다.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목표’를 가진 그와 ‘함께’ 할 내 인생은 희망과 보람, 자신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30을 훨씬 넘기면서까지 애타게(?) 찾던 나의 반쪽을 찾은 것이다.^*^ 우리 결혼에 걸림돌이 있었다면 남편이 미국 유학 중이라는 거였다. 교직을 천직으로 알아온 나는 교사를 그만 둘 수 없었기에 주변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학부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남편이 빨리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으로 하고…..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남편과 함께 하지 않는 생활, 겨울방학, 여름방학 두 번 뉴욕에 들어왔다 가며 겪은 이별의 쓰라린 아픔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힘겨웠다. 결국 나는 교직을 포기하고라도 남편과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있어 최대의 고민이 아니었나 싶다. 어항 안에서 작은 애완용 거북이가 노닐고 있다. 거북이는 어항 중간에 있는 돌 위의 먹이를 얻고자 낑낑대며 올라간다.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지 계속 미끄러짐을 반복한다. 돌 반대편에 더 크고, 더 쉽게 닿을 수 있는 먹이가 있는데 저 편 세상은 못 보나 보다. 나는 너무 안타까워 반대편 먹이가 있는 쪽으로 물결을 만들어 준다. 그래도 거북이는 다른 쪽으로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눈 앞의 먹이에만 집중하고 있다. “저쪽으로 가라니까… 저 반대편에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낑낑대고 있니? 저 쪽으로 가라니까, 저 쪽!” 앗!!! 그것은 나에게 외치는 음성이었다. '가라, 가라…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와라. 거기엔 네가 발견하지 못한 더 풍성하고 더 의미있는 인생이 있을 것이다. 가라, 가라…' 드디어 10년 교사 생활을 접고 미국 행을 결정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외과적인 수술을 단행한 것이다. 아이들과 작별을 하며 참 많이 울었다.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베풀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가 눈물로 밀려온다. 내가 가르쳤던 3000 여명의 학생들… 남자 천사의 대명사 종훈이, 여장부였던 민주, 정신병으로 5년 만에 졸업한 세훈이, 일직을 할 때면 교무실에 와서 노래를 불러주던 남성 4중창단, 자퇴를 한 은주,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혜경이, 충무에서 유학 온 쌍둥이 형제. 자매, 워싱턴으로 이민을 간 윤진이, 팔방미인 동희, 동희만 예뻐한다고 항의를 했던 여학생들, 신체 검사 때 몰래 돌을 넣고 몸무게를 쟀던 삐쩍 마른 형진이, 모의국회를 멋지게 이끌었던 규석이, 법원 견학문을 근사하게 써왔던 태형이, 맥가이버의 별명을 가진 만능박사 형철이, 군대 간다고 인사 왔던 용성이, 훌륭한 연극수업으로 말썽꾸러기의 이미지를 말끔히 씻은 3-1반 아이들, 스승의 날 잊지 않고 찾아와 주던 졸업생들… 파노라마처럼 밀려오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남편과 ‘함께’ 개척할 미래에 대한 기대와 의욕을 가지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뉴욕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다. 새로운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비행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안착한다. 이제 교사가 아닌 다른 인생이 이국 땅에서 어떻게 펼쳐질까? 바리바리 싸온 신혼 살림만큼이나 복잡했던 마음이 두 팔 벌려 안겨주는 남편의 품에 안기며 희망으로 바뀐다. 두 손 꼭 잡고 바라본 뉴욕의 하늘에선 새하얀 눈이 축복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마치 나를 위해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듯…. 정말 그랬다. 미국에서 ‘교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나에게 한국에서 했던 교육보다 더 중요하고 더 의미있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감격스런 교육의 장(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교육 인생 2막’의 장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