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9일. 국경일로의 부활 후 2 번 째이자, 한국에 와서 처음 맞는 한글날이다. 남편 회사일 돕는답시고 평촌에 묻혀 살며, 핑계도 많아 9월에 있은 한글학회 행사도 돕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이 항상 깔려있던 차, 감격 같은 날 회사에 그냥 있기에는 양심이 꺼린다. “김한빛나리 선생님, 한글날 일손 많이 필요하시지요? 도우러 갈게요.” 큰 맘(?)먹고 한글날 하루를 위대한 훈민정음 앞에 바치기로 했다.^*^ ‘한글날 대한민국 큰잔치 조직위원회’는 561돌 한글날 국경일을 맞아 그야말로 큰 잔치를 준비했다. 한글날 기념식과 함께 한글학회에선 한말글이름을 가진 이 글짓기 대회와 휴대전화 쪽글 시상식, 한글날 맞이 시국 선언문이 있었고, 역사박물관 광장에서 펼쳐진 다채로운 행사는 가을햇살만큼 빛이 났다. 외국인 한글 쓰기 대회, 한글목판 찍어주기, 한글문화 상품전, 사물놀이, 축하공연 등 많은 사람들이 한글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 외 10월 6일부터 26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행해진 각종 대회,공연, 예술제, 토론회, 어가행렬 등 이곳에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행사를 다 경험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한글학회 부스에 마련된 ‘한글날 공휴일 서명 운동’에 기록을 하면서 국민모두가 이 날을 더욱 뜻 깊게 기리고 누릴 수 있는 날이 되길 소원해 본다. 몸만 왔지 도와주는 일없이 오히려 행사를 즐기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데 손전화가 울린다. “김근순입니다….” 뉴욕에서 모셨던 교장선생님이시다. 남편 이박사님이 한글날 기념 ‘대통령 문화훈장’을 받는 관계로 서울에 오셨단다. 교장선생님 내외 분을 뵌다는 설레임과 두 분의 한글, 한국사랑의 헌신이 훈장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기쁨으로 내 마음이 꽉 차오른다. “한빛나리 선생님…. 죄송합니다. 뉴욕에서 너무 귀한 분이 오셔서 끝까지 못 도와드리고 가야할 것 같아요…” ‘어서 가십시오…’ 나의 등을 밀어주는 한빛나리 샘에 대한 감사함과 죄송함,본격적인 한글날 축하 공연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나중에 두 분을 모시고 와서 창가, 북춤 등 빛나는 우리 공연을 보았다) 을 뒤로 하고 달려가는 나의 가슴엔 그분들과 함께 한 8년의 세월이 출렁이는 파노라마가 되어 요동친다. 한국학교의 토요일은 서로 말 한마디 나눌 시간도 갖지 못할 만큼 매우 바쁘고 정신없다. 그 중에서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가장 바삐 움직이는 분이 있다. 그 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면 종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딸랑딸랑..”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의태어적인 ‘소리’라기 보다는 은은히 울려 퍼지는 여운의 느낌.… 그것은 천사의 날개 짓같은 은빛 반짝임이 날아다니듯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나는 그것을 ‘사랑의 종소리’라 부르고 싶다. 그렇다…. 그 분의 말씀은 쓴 잔소리까지도 아름다운 종소리처럼 들린다. 그 분이 한국학교에 쏟아온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 지를 알기에… 뉴욕드로드웨이한국학교 2대 교장, 김근순 선생님… 뉴욕에 살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 감사한 만남을 꼽으라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근순 교장 선생님’을 꼽으며 그 분과의 만남은 ‘뉴욕 생활 최대의 축복’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교사로 채용해 주시고, 틈만 나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주시던 사랑…… 그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새로 교사가 채용되면 복도든 교무실이든 심지어 개인 시간을 내 당신의 연구소에서 수업 방법 등 한국학교 교사로서 갖춰야 할 것들을 지도하고,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시며, 수 많은 경험을 들려주시고… 그 분의 20년 브로드웨이 한국학교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다양함에 해가는 줄 모르고, 그 헌신에 감탄이 끝이 없을 정도다. 초대 교장이 한 학기만 하고 사직하셨으니 김근순 교장 선생님의 역사가 바로 브로드웨이 한국학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분의 젊은 날 20년은 한국학교와 교포2세 교육에 바쳐진 것이다. 파란색 카리스마와 분홍빛 다정함, 대범한 추진력과 꼼꼼한 치밀성, 이성적 논리와 감성적 유머… 서로 상반되는 부분을 때에 맞추어 조화롭게 운영하실 때마다 그 실력과 인품에 감탄을 한다. 그렇기에 모든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에게 모두의 선생님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학교의 20년을 등대처럼 밝혀주셨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이의 등대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분 나름의 많은 스트레스와 희생이 동반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 마지막으로 재직하신 ’04년 봄학기는 유난히 힘든 일이 많았다. 아침 8시 40분, 그 때 울리는 전화소리는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 까 … 교사 한 명이 다리를 다쳐 못 온단다. 수업 20분을 남기고 학교를 못 오겠다니… 교육행정은 물론 한국어 교육의 베테랑이신 교장 선생님의 대체 수업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한 숨 돌리는데 이번엔 무용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 못 온다고… 속은 탈대로 타서 숯덩이가 되셨겠지만 합반을 시키고, 음악 수업으로 대치하고… 흔들리는 모습 없이 일을 해결하는 그 분을 우러러 보며 모든 것을 품고 있는 큰 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수업이나 선생님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 분에겐 어쩌면 약과일 지 모른다. 교무실에 들어오니 학생 두 명이 눈에 띈다. 얼굴에 상처가 나고, 한 명은 입이 찢어져 피까지 흘리고 있다. ‘아이고…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그렇게 복도에서 뛰지 말라 주의를 주었건만 개구장이 두 명이 서로 전력질주를 하다 부딪친 거다. 정말 산 넘어 산이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로하고 응급처치를 해주곤 학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놀라서 달려온 학부모들. 다친 아이를 보더니 울기부터 하는 어머님이 있는 가 하면, 부모가 같이 와 학생지도를 지적하며 항의를 하는 학부모… 반응이 다양하다. 그러한 다양한 반응에도 교장선생님은 때론 부드럽게 때론 강하게 처리하시며 모든 사태를 마무리 지신다. 그 어떤 일이 생겨도 교장 선생님은 항상 척척이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교장’이라는 자리는 실력으로나 인격으로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임을 실감하며 교장 선생님이 안 계시면 학교는 무너질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교장 선생님이 그만두신단다. 마음의 결정은 진작 하셨지만 교사와 학부모들이 동요할 까봐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것도 교무인 나한테만 말씀을 하셨다. 순간 앞이 깜깜해졌다. 김근순 교장 선생님 없는 학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분을 붙잡고 싶었지만 여러 상황이 그럴 수 없는 불가피함이 있음에…. 뉴욕, 아니 전 미국에서 우리 교장 선생님 같은 분을 모신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기에 그 분의 반의 반, 아니 반에 반의 반이나마 채워줄 수 있는 분이 오시기 만을 간절히 바랄 수 밖에. 시간이 너무 촉박하게 그분의 퇴직을 알았기에 나의 머리는 분주히 움직였다. 어떻게 하면 그 분이 헌신한 20년을 기리고, 떠나시는 자리를 빛낼 수 있을까? 거창하진 않지만 마음을 다해 이임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프로그램을 짜고, 초대장도 만들며 여러모로 바쁘고 힘이 들었지만 그 분에 대한 내 사랑이 그 모든 것을 커버해주었다. ‘사랑의 종소리…’ 이임식의 주제를 그렇게 정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의 여운을 아름답고 의미있게 꾸미고 싶었다. 내 마음의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어 비록 서툰 플륫 솜씨지만 매일 ‘사랑의 종소리’ 곡을 연습했고, 재학생, 교사, 학부모의 순서 또한 그 분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어떻게 잘 전달할 까로 고민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담은 좋은 글이 없을까? 우리반 아이들에게 글쓰기 숙제로 “교장선생님”이라는 제목을 주었다. 나의 생각은 적중했다. 학생들 마음에 자리잡은 교장 선생님… 아이들의 눈망울을 통해본 그 분의 사랑과 헌신이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순수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아이들 모두의 글을 다 낭독하게 하고 싶었지만 한 명만 낭독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엄선한 끝에 어린 작가 ‘진영’이(‘작전실패’ 진영이 기억나시지요?^*^)의 글을 뽑았다. “내가 다니는 한국학교에는 교장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 꼭 닮은 교장 선생님이 여러분 계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교장 선생님을 하루 종일 여기 저기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체육관에서, 수업 시간에 교실에서, 간식 시간에는 식당에서, 음악 시간에는 강당에서,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정문 앞에서 교장 선생님을 만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여기 저기에서 열심히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어떤 과목 선생님이신 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노래도 가르쳐 주시고, 아프면 Band-Aid 도 감아 주십니다.” ' 김근순 교장 선생님… 당신의 한국학교에 대한 사랑과 봉사는 뉴욕브로드웨이 한국학교에 영원이 남아 보석처럼 빛날 것입니다. 한국문화 연구재단 교육원 부원장으로서, 입양인 한국학교 교장으로 끊임없이 한국어 교육에 종사하며 한국어,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그 우수성을 교포사회에 전하고 계신 당신의 숭고한 헌신이 더욱 훌륭하고 값진 업적을 이루어 낼 것이라 믿습니다. 얼떨결에 교장이 되었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당신에게 배운 것을 흉내 내는 것이었습니다. 교장이라는 자리가 주는 외로움과 힘듦으로 지칠 때마다 당신의 지혜와 용기를 닮고자 했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교장선생님은 제 인생의 등대처럼 빛나고 계십니다…' 교장 선생님에 대한 제 사랑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글로 담기엔 너무나 역부족이지만 홍수처럼 차고 넘치는 당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이렇게나마 담아봅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