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한마당         국외교원 한마당         국외교원 한마당

한글학회와 조선어학회, 그리고 우리말 사전

조회수 : 462
한글학회와 조선어학회, 그리고 우리말 사전


최현배·이병기·현상윤·김두봉 등이 1908년 8월31일 국어연구학회를 만든 것이 한글학회의 시작이다.
이후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 1931년에 조선어학회, 그리고 1949년에 한글학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어쩌면 한글학회보다 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을 조선어학회. 조선어학회의 최대 성과는 바로 우리말 사전의 편찬이었다.
이하 포스팅은 절대적으로 <우리말의 탄생> (최경봉 지음, 2005년, 책과함께)에 의지하고 있다.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 제1권(ㄱ~깊)은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이해서 출간되었다. 국가의 성립에 앞서 표준언어작업이 먼저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 사전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출판기념식(사회:정지용) 때 남북협상요인 편에 북한으로 보내자고 결의되었다. 북한에서도 1948년 6월 조선교육자협회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된 것을 찍은 위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사전은 1957년에 가서야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완성된다. 그럼 시작은 언제였을까?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결성된 것은 1929년(위 책에는 1926년으로 잘못 적힌 부분이 있다) 10월 31일이었다. 총 108명의 발기인이 모였다.

그럼 이 이전에는 사전이 없었을까?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이은상이 썼다고 한다)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조선민족에게 사전이 없다 함은 이미 상술한 바다. 그러나 서양인 선교사들이 예수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조선어를 학습할 목적으로 편성한 사전이 수 종 있으니, 서기 1880년에 불국 파리에서 출판된 <한불사전> 이 그 하나요, 1890년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씨의 손으로 일본 횡빈에서 출판된 <한영자전> 이 그 둘이요, 1897년 영국인 선교사 게일 씨의 손으로 역시 횡빈에서 출판된 <한영자전> 이 그 셋이다. 그리고 또 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어로 대역한 <조선어사전> 이 출판되었다.

일본어로 대역한 <조선어사전> 이라는 것은 표제어만 우리말이고 풀이는 일본어로 되어 있는 사전이었다. 이런 사전을 만드는 데만도 총독부는 10년을 소비했었다. 그런데 이 이전에 나온 조선어사전이 있기는 했다. 표제어 6,106개의 소사전 <보통학교 조선어사전> (1925)이 그것이다. 이 사전은 세간에 알려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학교의 자습서처럼 만들어진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인 모양이다.

지은이는 심의린. 1894년생으로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부를 졸업하여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조선어연구회(1921)에서 활동 중인 사람이기도 했다.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려는 움직임 또한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911년 주시경을 중심으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었다. 주시경과 제자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참여한 이 편찬작업은 불행히도 1914년 주시경의 사망, 1919년 김두봉의 상해 망명, 1920년 이규영 사망으로 진척을 보지 못했다.

다른 움직임은 최남선에 의해서 일어났다. 일찍이 광문회를 만들어서 주시경과 함께 <신자전> 을 만들기도 했던 최남선은 1918년에 계명구락부를 만들어, 1927년 사전편찬을 위한 위원회를 결성했다. 최남선은 주시경이 만들고 있던 <말모이> 원고를 인수받아 그것에 기초해서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자 했다. 정인보, 임규, 이윤재, 변영로 등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업은 만만치가 않았다. 1929년이 되자 모두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주도한 인물은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한 이극로였다. 이극로는 1912년 20세 때 만주로 가, 박은식, 신채호 등을 만나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고 1915년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와 동행하여 모스크바로 갔다가 베를린까지 가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딴 독특한 경력의 인물이다. 그는 1927년 제1회 세계약소민족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고, 귀국할 때 미국을 거쳐 이승만, 서재필도 만나고 돌아왔다. 해방 후 그는 김구 주석과 함께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북한의 첫 내각 무임소상이 되어 북한 언어연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극로의 제자 유열(한국전쟁때 월북)이 환단고기 식의 국수주의 사학에 빠져든 것도 사실 이극로의 민족주의 성향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리라.

사전 편찬이란 결국 말을 모으는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기관지를 통해 전국 각지의 말을 보내달라 했고 전 조선민의 호응 아래 사전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를 위해서 맞춤법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일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개입했고 한글학자 장지영, 권덕규, 정열모, 최현배, 신명균 등이 모두 심의위원으로 참여했다. 총독부 산하 기관에 참여한 일로 국수주의자들에게 역사학계만 두들겨 맞는 일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맞춤법이 정해지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조선어학회와는 달리 발음나는 대로 표기하자는 조선어학연구회(박승빈 설립)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934년 7월 9일 문인(조선문예가일동)들이 '한글 철자법 시비에 대한 성명서'를 냈다. 문인들이 조선어학회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어학연구소의 힘이 약화되었다. (성명에는 김동인, 전영택, 양주동,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오상순, 박태원, 피천득, 정지용, 모윤숙, 주요섭, 현진건, 채만식, 윤석중, 심훈, 이상, 임화, 노천명, 염상섭, 김광섭, 이은상, 이광수 등의 쟁쟁한 문인들이 포진했다.)

그런데 이때 한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 조선어학회가 아닌 한 개인의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다.

저자는 청람 문세영. 이 사전의 출판에는 두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세영이 조선어학회에 원고를 가지고 와 출판을 요청했으나 조선어학회가 이것을 거부하고, 원고를 기증하라고 했다는 것이 첫번째 이야기다. 문세영은 원고 기증을 거부하고 독자 출판을 감행했다. 1938년 10월. <조선어 사전> 출간.

그러나 일석 이희승은 이에 대해서 다른 증언을 남기고 있다. 문세영이 환산 이윤재의 작업을 도용하여 출간을 했다는 것이다. 이윤재는 이때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이때 문세영이 이윤재가 거의 해놓은 작업을 낼름 가로챈 것이 아닌지 의심이 있다.

문세영 역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조선어학회 안에서 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1939년 조선어학회의 준비도 모두 끝났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검열도 받았다. 1942년 드디어 조판도 끝났다. 그러나 사전은 발간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그것은 자금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일제의 문화정책 변화도 한 몫하고 있었다. 극도의 궁핍으로 자살하는 학자까지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시점에서 난데없는 사건이 터졌다.

조선어학회 사건. (사건의 내용은 한글학회 창립 100주년과 조선어 학회 사건 [클릭] 해명님 포스팅 참고)

이 사건으로 사전 원고도 증거물로 압수되었다. 해방이 된 뒤에도 원고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1945년 9월 8일 경성역의 역장이 원고를 발견했다. 2만6천5백여장의 원고가 조선어학회로 돌아갔다. 지금은 이름모를 그 역장이야말로 우리말을 살린 숨은 공로자가 아닐까?






사전 각권의 발간 연월일
첫째권 1947년 10월 9일
둘째권 1949년 5월 5일
셋째권 1950년 6월 1일
넷째권 1957년 8월 30일
다섯째권 1957년 10월 9일
어휘수 164,125


(출저: 초록불의 잡학다식)

천사: 공부하는 누리집에 갔다가 최소한 한글학회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글 같아 퍼왔습니다. 오늘의 100돌을 자랑하는 한글학회가 있기까지...수고한 모든 분들에 대해 깊이 감사함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8/09/07-18:25]-
수선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바쁘신 가운데, 우리가 알아야 할 귀한 정보까지 제공해 주시고 감사 감사.... 잘 지내시죠? 영국이 자꾸만 겨울 나라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젠 라인강변샘을 영국에서 만났답니다. 연수원에서 몰랐던 서로에 대해 더 많이 나누고 좋은 인연의 끈을 이어갑니다. -[2008/09/07-20:14]-
김별찬: 천사님 덕분에 좋은 공부했습니다. 경성역 역장님은 정말 위대한 일을 하셨네요... 너무 감사!
열심이신 수선화님... 건강하시죠? 고국에서의 끈이 다시 좋은 인연으로 맺어지고, 서로를 알아가고... 너무 흐믓합니다. 더 좋은 인연이 많이 이어지며 풍성한 하루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2008/09/09-17:24]-
천사: 수선화샘, 드디어 라인강변 샘을 영국에서 만났네요.^^ 많이 반가우셨죠?
고국에서의 만남도 좋지만 그렇게 각자의 나라에서 만나는 묘미(?), 전 정말 좋았거든요.
그 질긴 끈을 여러 동기들과 함께 이 한마당에서 나누며, 자랑스런 문자인 우리 한글로 인해 큰나무로 만나지는 귀한 인연이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 -[2008/09/12-03:54]-
천사: 별찬샘, 아고...요 며칠 컴이 속을 썩이는데...정말 답답하더군요. 학교에 공지할 건 많은데...연결은 안되고...그러고보니 편하게 쓰던 메일이, 한마당에 자유롭게 하루에도 세 번씩 드나들던 그 기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어제는 이젠 더이상 안되겠다 싶어 퇴근하자마자 전화 선을 이리저리 바꾸며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드디어 아싸~ ADSL이 열리는데... 이궁...왜 이케 고단한지... ㅜㅜ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밀렸던 댓글 달고 출근합니다.
추석,,,고국의 며느리들에겐 힘도 들지만 그래도 가족을 만나니 행복하다고 하면 사치스런 그리움인가요? 모두 몸 살피며 일하시고 명절후 몸살나지 말았으면...
남태평양 섬나라에서, 아무리 고되어도 가고픈 고향산천 내 조국의 추석을 바라보며... -[2008/09/12-04:06]-
라인강변: 이제사 들어와 좋은 글 많이 읽고 선생님들 께 추석 인사 드립니다.
풍성한 가을의 명절이 되셨기를 바라며 우리 수선화 샘 마음속에 가득 풍요로움이 함께 하십니다. 수선화 샘 만나뵙고 와서 너무 반갑고 좋았습니다. -[2008/09/15-05:10]-
천사: 라인강변샘, 여기도 다녀가셨군요...우리의 한글학회 역사, 다시 더듬어 보는 기회가 되었네요.
수선화 샘과의 두 분 우정이 날마다 더해가기를 축복합니다.^*^ -[2008/09/15-20:42]-
늘감사: 추석 지난 후에 안부 인사드려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2008/09/16-00:24]-
천사: 저도 바쁜 가운데에도 늘 이렇게 흔적을 남기시는 늘감사 샘에게 감사 감사 늘감사^*^ -[2008/09/17-04:55]-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