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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한 엄마, 무식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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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ㄴ ㄷ ㄹ ㅁ ㅂ ㅅ G N D L M B S “선생님… 글쎄 송이가 한글 발음표를 직접 만들어서 공부하고 있어요. ㄱ 밑에는 알파벳 G를, ㄴ 밑에는 N, ㄷ 밑엔 D ... 이렇게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무심코 영어로 말하면 '엄마, 한국말로 해주세요” 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어 공부에 열중한답니다…” 교장이 되고 처음 맞는 여름방학 때 송이 어머님이 감격의 목소리로 전화하신 내용이다. 처음 한국학교에 와 한글을 배운 아이가 겨우 한 학기 배우고 스스로 표를 만들어 한국말 공부를 한다는 소식에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해서 학교 누리집에도 글을 올렸던 기억이 난다. 송이는 백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아이다. 그럴 때 아이의 얼굴은 거의 백인 모습에 가까운데 송이는 더욱 백인다운 용모로 어여쁜 금발인형을 보는 느낌이다. 하긴 혼혈 아이들은 정말 모두가 다 예쁘다. 서구적 시원함에 동양의 아기자기함이 오묘하게 깔린 느낌이랄까? 그리고 유전적 관계가 멀어서 그런지 참 똑똑하다. 그러니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6살 나이에 한글과 영어와의 상관관계를 발견하여 표까지 만들어 공부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송이가 똑똑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한글이 과학적인 글자로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송이어머님이 처음 한국학교에 송이를 데려오시면서 했던 말씀이 기억난다. “제게 소원이 있어요… 송이가 자라서 인생의 고민이 생겼을 때 저랑 한국어로 상담하기를 원해요. 영어로 아닌 한국어로요…” 그런 어머님의 남다른 각오(?)로 시작된 한국어 공부인지라 방학을 맞아 집에서 실시한 한국어 교육도 남달랐다. 어머니는 2달이 넘는 방학동안 송이가 한국말을 잊어버릴 까봐 케이블을 신청했다고 한다. 틈만 나면 한국말 프로를 보았고, 집중적인 한국어 청취로 송이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엄마의 감격은 터질 듯 커지며 예쁘디 예쁜 딸이 더욱 사랑스럽다. 송이도 마찬가지다. 한국어를 공부하다 혹은 한국 프로그램을 보다 모르는 말이 나올 때 척척 알려주는 엄마가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고 위대하다. 송이에게 엄마는 소리 나는 ‘한영 사전’인 거다. 한국어 만능인 엄마가 곁에 있으니 한글 공부가 더욱 신나고 송이에게 엄마는 또 다른 의미로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한국어를 매개로 모녀 간의 애정과 신뢰가 더욱 돈독해지자 뿔이 난 건 아빠다. 송이가 한국어에 재미를 붙이며 엄마하고의 대화만 부쩍 는데다 아빠가 못 알아듣는 한국어로 자주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했는 지 물어보면 ‘아빠에겐 비밀!’이라며 엄마랑만 속닥인다고 하니 아빠로선 여간 서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런 송이가 귀엽기만 하건만 당하는(?)는 아빠는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것이 속상하고 답답하기만 했을 거다. 위기의식을 느낀 아빠는 슬슬 모녀의 한국말 대화에 끼어들며 같이 배우기를 청하니 그 누구보다 송이가 제일 신나 한다. 제니 역시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영어를 주로 쓰게 되고 한국어 실력이 같은 기간 다닌 다른 친구보다 많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게다가 주말이면 복잡한 맨해튼을 벗어나 롱아일랜드 별장에 가서 지내고 싶어하는 아빠 때문에 결석도 많이 했다. 오직 엄마의 바람으로 한국학교를 다니다 보니 가족이 함께 움직여야 할 일이 생기면 무조건 결석이다. 이래저래 제니는 한국학교를 4년이나 다녔지만 그 기간에 비해 한국어 실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꾸준히 다녀 중급반인 우리 반으로 진급을 했으나 여러모로 따라오기 힘들어 했다. 그러나 제니 어머님은 서툴게나마 한국어를 하는 딸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바로 전 학기에는 ‘동화대회’에 출전해서 은상을 받았기에 이젠 아빠까지 합세하여 한국어 교육에 협조를 하며 이제 가족 모두가 더욱 신이 나서 한국학교에 온다. 그런 제니가 더 이상 한국학교를 오지 않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유는 제니의 영어실력 때문이다. 미국학교에서의 영어 실력이 자꾸 떨어져 학교에서 진단한 결과 한국어를 동시에 배우고 있기 때문이란 결과가 나왔다. 학교에선 당장 한국어 공부를 중단하라는 통보를 했고, 제니 엄마는 눈물을 머금고 한국학교를 중도하차 시켜야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한국어가, 제 1언어인 영어 향상을 방해한다고 하니 달리 잡을 방도가 없었다. 정말 한국어 때문에 그럴까? 그리고 정말 도중하차라는 방법 밖에는 없는 걸까?? 이중언어에 대한 여러 가지 글들을 찾아가며 나름대로 문제 해결법을 찾아보기도 했으나 비전문가인 나로선 역부족이었기에 눈물을 머금으며 제니를 보내야 했다. 내가 이중언어교육 전공자가 아닌 것이 그렇게 아쉽고 한탄스러운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한 학부모로부터 제니가 다니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앞에도 말했듯이 맨해튼엔 사립학교가 무수히 많은데 그 중 제니가 다니는 학교는 ‘이중언어’에 배타적인 학교란다. 그래서 아이에게 언어상의 문제가 발생하면 제 2언어교육 때문이라는 결론을 많이 낸다는 것이다. 갑자기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러나 어쩌랴? 미국에서 한국어는 소수(minority) 언어이고 또 주말 한국학교라는 곳이 당연히 미국학교에 비해 소수(minority)이니 이래저래 힘이 빠지는 일이다. 세월이 몇 년이 흘러도 그렇게 한국학교를 중단한 제니 생각이 가끔 난다. 그러던 중 제니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한국학교 다닐 때는 제니가 엄마와 한국말로 대화도 했으나 그 이후 한국말과담을 쌓게 되면서 이제는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제니 엄마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제니 엄마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와 석사학위를 받고 직장생활을 하다 미국인 남편과 결혼을 했다. 사업하는 남편을 도우며, 박물관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통역 일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다. 큰 키, 서구적인 미모, 세련된 차림이 돗보이는 분으로 한국학교에선 ‘일일 교사’로서 가르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멋진 분이 제니에게는 실력없는 엄마로 비쳐진단다. 제니가 공부하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엄마에게 물어보곤 하는데 엄마가 영어로 설명해주는 부분이 그 아이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엄마가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뇌의 구조가 이미 한국어로 굳어져 있는 상태에서 배운 영어이기 때문에 오는 ‘절대적인 한계’건만 제니가 그것을 알 리 없다. 그런데 제니의 눈높이에 맞춰 그 아이의 실력과 정서에 딱 맞게 가르쳐주는 아빠의 설명은 그야 말로 귀에 쏙쏙 들어오니 제니는 이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빠에게만 물어본단다. 제니 눈에는 지식 수준과 상관없이 아빠는 유식한 사람, 엄마는 무식한 사람으로 이분되어 버린 것이다. 만약 제니가 한국말을 아주 잘해서 엄마가 한국말로 설명을 해주었으면 제니 엄마가 무식(?)하다는 오명을 받지 않았으련만 제니에게 한국말은 이미 먼 나라 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니 안타까울 뿐이다. 제니 어머니는 한국말로 대화는 커녕,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의 눈에 무식한 엄마로 비춰지는 상황이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속이 상했을까? 전해들은 나의 마음도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가득 차게 된다. 외국에 이민간 한인 부모는 한국어를 가르치느라 열성이고, 한국의 엄마들은 영어를 가르치느라 열성이다. 둘 다 모국어 외, ‘제 2언어’에 열중이다. 즉 세계화 시대에 있어 ‘이중언어’가 언어교육의 대세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영어 교육’과 ‘미국의 한국어 교육’ 열풍에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전자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기로서의 제 2언어’ 라는 성격이 강하고, 후자는 아이의 ‘정체성’ 확립의 목적이 더 강한 제 2언어라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서 본다면 어려서 배우는 외국어는 아이의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볼 때 요즘 ‘밥그릇과 국그릇이 바뀌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일고 있는 한국의 영어 광풍을 보며 ‘언어와 정서’에 대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언어엔 그 언어를 계속 사용해 온 그 민족의 ‘정신’과 ‘문화’가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는 다른, 그들 만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제니엄마는 제니의 나이 때, 그 정서로 배운 영어가 아니기에 설명에 있어 틀리거나 적합한 단어를 쓰지 못했다기 보다는 제니 또래의 아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영어에 실어 보내지 못한 것은 아닌 가 싶다. 아무리 여러 나라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그 사람 특유의 고유한 생각을 여러 언어에 똑같이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런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고 본다. 말로 사람을 설득하거나 나의 주장을 말하는 일, 그리고 글을 쓰는 문제는 수학같이 한가지 정답을 요구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와 한국어만 해도 그렇다. 영어가 파란 그릇이라고 한다면 한국어는 분홍그릇이라고 할 정도로 두 언어는 너무나 다르다. 그러므로 똑 같은 나의 생각일지라도 파란 그릇에 담길 때랑 분홍 그릇에 담겨져 있을 때의 느낌은 결코 같은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언어교육은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언어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생각을 온전히 잘 나타낼 수 있는 튼튼한 모국어의 그릇을 갖추는 일 말이다. 특별히 어린아이의 교육에 있어서는 더욱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의 영어교육은 청년이나 성년이 되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공부하는 교육과는 다른 차원에서 연구되고 교육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주 어려서 습득하는 제 2언어가 그 아이의 정서 또는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를 점검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하게 할까?’도 중요하지만 어린 나이에 영어교육에 몰입되었을 때, 아이의 정서 또는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우리 어른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다. 진정 훌륭하고 실력있는 인재를 키워내고 싶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유식한 엄마는 한국어나 영어를 잘하는, 혹은 지식이 많은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녀 교육에 있어, 눈에 보이는 실력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아이의 심리, 인격적 측면도 사려 깊게 살피는 엄마가 아닐까? 우리 아이들은 기능 하나만 더 추가하면 Upgrade 되는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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