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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학생의 정체성은?

한국에 돌아와 채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모 기관으로부터 ‘미국교과서의 특징’에 관한 발표를 부탁 받았다. 발표까지 하기엔 나에게 역부족인 주제였지만 나의 경험과 함께 미국에 있는 지인(知人)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은 생각에 승낙을 하였다. 마침 남편이 미국에 출장을 가 있었기에 미국 교과서도 구해올 수 있어 좋았다. 우선 궁금한 것과 조사할 것을 설문지로 만들어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교사, 학부모, 사범대생, 한국학교 제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정성스럽게 작성한 설문지가 하나씩 도착하며 인적 연락망이 있다는 것의 힘과 소중함을 새삼 느끼며 감사해하던 기억이 새롭다.

“학기 초, 미국 초등학교 교무실은 20명 남짓한 아이들의 방문으로 항상 혼잡하다. 아이들에게 학교의 시설을 반 별로 보여주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교무실에는 교사 외, 교장 비서, 손님, 건물 관리인 등 여러 사람들로 복잡하다. 아이들은 그 어수선함 속에서도 담임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교무실 풍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교사의 지시에 따라 다음 장소를 향해 질서 있게 움직인다. 교장실, 미술실, 화장실 등을 차례로 지나며 그 가운데서 만나는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적절히 아이들을 환영한다. 자유로운 가운데 질서가 지켜지는 풍경이다. 학교의 건물은 같은 것이지만 아이들 각자에 따라 마주친 눈빛이 틀리고, 경험한 사람이 틀리기에 교무실, 교장실, 복도에서 느낀 그들의 느낌은 모두 틀릴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학교라는 건물과 조직을 획일적이고 딱딱한 방법으로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만나며 학교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익혀 나간다….” 발표한 글의 서문 중 일부다. 학기초, 미국학교를 찾아갈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 때마다 본 위의 풍경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그 인상이 내 마음에 남아있다가 개인중심, 개인존중의 미국 교육을 접하면서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겪은 개학식 및 애국조회 날의 기억이 겹쳐진다. 전교생이 모두 운동장에 나와 조금이라도 줄이 삐뚤면 엄청난 호통을 들어가며 거의 군인 자세로 ‘의식’을 치렀던 일종의 훈련같았던 학교의 첫 날, 한 달의 첫 날.. 그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말이다. 부동자세가 체질적으로 안 맞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감시하는 선생님에게 툭툭 혼이 나야 했고, 몸이 약한 친구는 혼절하여 실려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교장 선생님 말씀은 또 왜 그리 긴 지… 운동장에서 애국조회다 무슨 식(式)이다 할 때 나는 학생이 아니라 군인으로 취급되어졌다는 생각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교사를 할 때인 90년대까지도 애국조회가 있었고, 나 또한 줄이 조금이라도 비뚤어 졌거나 자꾸 몸을 움직이는 학생들을 호랑이 눈으로 쳐다보고 혼을 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70. 8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의 가슴엔 이젠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있겠지만 이건 정말 없어져야 했던 군사독재 시절의 학교 문화였다는 생각이다. 만약 아직도 이러한 문화가 학교에 잔존해 있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고층건물, 무서울 정도로 변화하고 있는 기술의 발전이 아무 의미없는 발전이라는 생각이다. 정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발전은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발전이 아닐까? 어쨌든 우리는 딱딱한 자세, 지루한 훈계식의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시작으로 학교를집단적, 획일적으로 알아가는 반면, 미국의 학생들은 반 친구들과 소단위로 장소를 옮겨가며 직접 학교의 구석구석을 보고 느끼며 ‘개인적’으로 호흡한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집단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를 들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이것은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느냐와 존중하지 않느냐의 문제로 까지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처음엔 막막하게 시작했던 작업이 여러가지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난 윤곽은 ‘자유정신’이었다. 교과서 선정, 채택, 사용자 손에 넘어가서도 결국 중요한 핵심은 ‘자유’였던 것이다. 그래서 발표 주제의 제목을 '미국 교과서와 자유정신'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교과서도 국정교과서에서 검인정교과체제로 바뀌면서 채택이나 사용에 있어 자율이 많이 주어졌지만 자율만큼 학생들을 자유롭고 다양하게 키우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내가 발표한 기관에서 올해 교과서 사업에 참여한 다른 발표자와 교수, 현직 교사를 대상으로 평가회를 가졌는데 아직도 한국에선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이지 ‘교과서로’ 가르친다는 풍토는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는 한국의 입시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교사들의 창의적이고 다양한 수업의 부재를 탓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분명 학교에게 교과서 채택의 자율을 줘놓고, 근현대사 교과서의 극히 일부분이 현정권을 옹호하는 세력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교육청에서 교장들을 호출하여 문제가 된 교과서 채택을 하지 말라는 압박(?)을 주는 행태가 이루어지는 현 환경에서는 더욱더. 똑 같은 학교 교육, 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쳐도 교육대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말 많은 것이 변한다. 내가 받았고, 가르쳤던 교육의 형태는 학생을 주도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다. 어른이자 먼저 배운 교사들이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향해 앞에서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 말이다. 그러할 때 교사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의 ‘전수자’이며 그 전수에는 획일적이고 집단적인 강의형식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학생들이 목표에 잘 도달했는 지를 즉각적이고 객관적인 점수로 확인하며 학생들을 서열화 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교육은 자유롭거나 다양해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미국 교육의 교사는 학문의 전수자라기 보다 학습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에 중점을 둔다. 목표를 향해 옆에서 같이 가는 형태다. 그러니까 학생들과 눈높이가 같아지며 스스로 대답을 찾게 하기에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며, 획일적인 답보다 그 사고의 과정을 더욱 중요시 하기에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무언가를 가르치는데 있어 집단으로 접근하느냐, 개인으로 접근하느냐의 차이는 수업 방법과 함께 평가 뿐만 아니라 우리가 키워낼 인재의 모습이 달라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사의 강의를 경청하고, 지시를 잘 따르고, 숙제를 잘 해오는 전통적인 모범생만이 진정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교육 주체인가를 생각해 볼 문제이다.

새 정부의 정책에는 자유경쟁과 자율을 중요시 하는 것이 많다. 그래서 정권 초기, 0교시, 우열반 편성 등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융통성 있게 운영하라는 방침이 내려졌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방침은 얼마 가지 않아 많은 반발로 무효화되었다. 학교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결국 그 자유는 부메랑이 되어 아이들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의 교육이 오직 ‘공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상 학교에 자율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아이들은 더욱더 공부의 노예가 되어야 하고, 학교는 입시를 위한 학원의 기능밖에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학교가 학원으로 매진해야만 명문학교 취급을 받는 현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른들이 자율이라는 명목 하에 휘두르고 있는 교육 정책에 우리 아이들은 더욱 한숨을 쉬고 고개를 떨구며 움츠려 지고 있다. 우리의 교육 대상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자율은 이미 자유가 아니고, 아이들의 목을 죄어오는 사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나 철학이 공부로 서열화시키는 집단적 사고가 아닌, 개인의 존엄에 관한 시각으로 선회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 학생들의 정체성은 ‘성적으로 서열화 되는 정체성’밖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몇 점짜리, 나는 몇 등짜리라는 숫자로 말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갖기를 바란다. 성적과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이 개인 스스로 각자가 가진 그들만의 정체성을 찾으며,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급선무이자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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