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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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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출장 겸 여행을 다녀왔다. 필리핀은 별로 볼 것은 없고 보라카이나 세부 등 휴양지에서 쉬고 오는 것이 최고라 했지만 휴양이라는 것 자체가 나의 여행 컨셉이랑 맞지도 않을 뿐더러 그럴 시간도 없기에 아예 포기를 하고, 출장을 마치고 난 만 ‘하루 반’ 동안 어디를 경험해야 할 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마닐라 인근 지역의 최대 관광지로는 팍상한과 따가이따이가 있었다. 팍상한은 세계 7대 절경 중 하나로 카누를 타고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며 펼쳐지는 광경이 멋지다 보니 월남전을 배경으로 하는 헐리우드영화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촬영된다고 한다. 따가이따이는 따알호(Lake Taal)와, 화산 폭발로 인해 호수 가운데에 만들어진 화산섬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는 정경이 일품인 곳이라고 한다. 두 곳을 다 가보고 싶은 욕심에 일을 마치는 토요일 오후 시간에 따가이따이를, 그 다음 날에 팍상한을 가기로 계획을 짰다. 그러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될 수는 없는 법, 일이 늦어지는 관계로 따가이따이지방까지 가기는 했으나 화산섬까지 갈 수는 없었다. 결국 하루 남은 시간에 팍상한을 갈 것인 지 아니면 화산섬을 구경할 것인 지 정해야 했다. 나와 남편은 화산섬이라는 독특한 지형, 그리고 말을 타고 올라간다는 경험을 더 가치있게 생각하고 팍상한은 포기, 따알 호를 건너가 화산섬을 오르는 일정을 선택했다.

이른 아침, 호텔에서 나와 따가이따이 레조트가 있는 곳을 향했다. 배값, 말빌리는 값, 입장료 등을 지老求쨉?한국인 매니저가 이것저것 설명을 하며 한 마디 붙인다. “말을 다 타고 내려오시면 마부에게 팁을 50페소를 주세요. 대신 더 이상은 절대 주지 마세요…” 배를 탔다. 호수가 바다같이 넓게 펼쳐진 곳을 가르며 가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마침 비 온 다음 날이라 구름은 눈부시리만큼 하얗고, 밝은 햇살에 비친 물결은 반짝반짝 춤을 추고 있었다. 한 20분쯤 배를 탔을까? 드디어 화산섬에 도착했다. 섬 한 편에 여러 사람과 말이 모여있는 곳이 눈에 보였다. 음… 저 말을 타고 섬 정상까지 올라가는 구나… 말을 잘 타고 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하는 것도 잠깐, 리조트에서 미리 예약해 놓은 나의 말이 어서 타라고 기다리고 있다. 옆에 마부 또한 기다리고 있는데 언뜻 보아도 초등학교 1,2학년밖에 되지 않는 작고 마른 소녀였다. 그 어린 소녀가 내가 말을 타는 것을 도와주더니 자기도 내 뒤에 같이 탔다. 그러더니 앞부분에 설치된 손잡이를 가리키며 “꽉 잡아” 라고 한국말로 얘기한다. 그리곤 출발! 남편은 소녀보다 조금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소년마부 (나중에 알고 보니 소녀의 오빠로 11살이었다) 가 함께 탔다. 터걱터걱 산 정상을 향해 말은 걷고 아직은 어색한 나는 자리를 잡고 적응을 하느라 약간 씩 뒤척이고, 뒤에 앉은 소녀는 말이 제대로 가도록 계속 조정을 한다. 앞에 크게 드리워진 나무가 나타나자 “앞으로 숙여!” 라고 또 한국말로 외친다. ‘나도 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아가야…’ 필리핀 소녀 입에서 비록 반말이지만 인사정도의 말 외에 다른 단어가 튀어 나오니 반갑기도 하면서 어린 나이에 직업정신을 발휘한 한국어라는 생각에 그냥 안쓰러웠다. 한 5분 정도 지나자 나도 말 타는 것에 익숙해 진 탓인 지 나의 마부소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9살이라는데 한 구석이 아려온다...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말을 잘 못한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눈치다. 그래서 나는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고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나타나는 장관에 감탄하면서도 햇빛에 타지는 않을까 눌러쓴 모자를 다시 만지고 목에 두른 수건을 더 조여매 본다. 소녀는 끊임없이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한다. 뒤에 오는 오빠와 대화하는 것 같은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 지 정말 끊임없이 따갈로어로 말을 했다. 험한 길을 오르려는데 말이 정지를 한다. 그러더니 숨을 헐떡이는데 압력밥솥에서 터져나오는 소리보다 요란하다. 많이 힘든 가 보다. 아주 살짝 육중한(?) 나의 몸을 맡긴 말이 안쓰러워졌다. 그래…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가기위해 이런 고됨을 견디고 극복해야하는 거겠지… 한 2분 정도 쉬었을까? 말은 다시 힘을 내어 정상을 향해 가뿐하게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래… 고지가 바로 저기다. 조금만 힘을 내렴…’ “내려…” 정상에 도착하자 소녀는 또 한국말로 신호를 보낸다.

“음료!, 마부 사줘…” 말에서 내리자 마자 음료수를 파는 사람들이 남편과 나를 향해 마부에게 음료수를 사주라고 호객행위를 한다. 마음은 사주고 싶었는데 살짝 갈등이 되었다. 이들의 상술에 내가 말리는 것이 아닐까? 아까 매니저가 한국 사람들 기분 잘 내는 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자꾸 기분내서 팁 많이 주지 말라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인가? 그러나 나는 마음가는 데로 했다. 소녀를 쳐다보는데 소녀는 오히려 무관심하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내 옆에서 음료수 사달라는 눈빛을 보낼텐데 저 만치 자기 말 옆에 무심하게 서있는 것이 보인다. 불러서 음료수를 주었다. 쑥스럽게 받더니 저기 가서 혼자 마신다. 참 순수한 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상에서 바라다 본 호수와 화산섬의 모습은 감격과 평안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장관이었다. 놀라운 장관에 순간 숨이 막히고, 이어 구름과 섬, 호수가 조화를 이룬 모습이 일과 도심에서 찌든 마음이 정화되는 듯 마음에 평안이 찾아든다.... 바람이 솔솔부는 화산섬 정상에서의 특이한 경험은 팍상한에 대한 미련조차 없어질 만큼 경이롭고 행복한 풍경이었다. 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하산을 하기 위해 말이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왔다. 남편과 소년마부 기념촬영을 해주고 나도 소녀와 나란히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소녀가 싫다며 살짝 비키는 바람에 나만 찍었다. 정색을 하는 소녀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쑥스러워서?? 어쨌든 소녀와 기념 촬영을 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좀 아쉬웠다.(나중에 사진을 보니 나와서 좋기도 했지만...)

산을 내려오며 보이는 풍경 또한 장관이다. 눈앞에 펼쳐진 호수, 산, 호수를 가로질러 오는 배, 산 너머에 있는 집들…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정경과 거대한 자연의 어우름이 편안하면서도 훌륭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진다.내려가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올라가는 마부가 나의 말을 쓰다듬어 주다가 나의 다리가 뭔가에 부딪쳤는데 너무 아파 “아악~” 비명을 질렀더니 소녀가 더욱 놀란다. “괜찮아? 괜찮아??(요것도 한국말로.)” 너무 아픈 나머지 금방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 어린 소녀가 걱정하듯 물어보는데 아프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괜찮아…” 그러면서 나는 나의 오른 쪽 무릎을 계속 만졌다. 그러자 소녀는 내 뒤에서 손을 뻗어 내 무릎 쪽으로 가져가더니 만져준다. 손이 짧은 나머지 무릎을 주물러 주기는 커녕 아주 살짝 스칠 정도지만 아픔이 사라질 만큼 소녀의 마음이 전해졌다. 나는 이제 정말로 “괜찮아…” 하며 소녀의 손을 만져주었다… 한 5분쯤 지났을까? 소녀가 다시 아무 말 없이 나의 무릎을 다시 주물러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가슴에 짠~ 한 느낌이 왔다. 엄마가 배아픈 아이가 걱정이 되어 만져주고 또 만져 주는 것 같은 그런 따스한 배려가 느껴져 왔다. 이번에도 역시 피부만 살짝 달 정도의 감촉이었다. 나는 다시 “괜찮아… 안 아파…”하며 고개를 돌려 아이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잠깐 스친 아이와 나의 눈빛은 서로를 포근하게 느끼며 미소를 나누었다. 서로 말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1시간이 넘는 산행을 통해, 같은 말을 함께 타고 있다는 동질감을 통해 친근함을 이미 나누었다는 느낌을 가지며 … 갑자기 아이가 말에서 뛰어 내린다. 그리고 걷는다. 흔히 쪼리라고 하는 발가락 하나만 끼는 신발을 신고 산 길을 잘도 걷는다. 왜 안타고 걷냐고 하니까 걷는게 좋단다… 새카맣게 그을린 어깨, 팔, 다리… 처음엔 그냥 보이던 그 아이의 검게 탄 모습이 안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렇다. 나는 타지 않으려고 무장에 무장을 거듭했건만... 자연을 느끼러 왔으면 자연에 당당히 맞서야 하는 것은 아닌가... 푹 눌러쓴 모자, 선글래스, 긴팔 가디건, 목에 두른 수건... 이런 나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게 된다. 그리곤 더우면서도 기를 쓰고 입고 있는 가디건을 벗어본다. (한 20분 정도 벗고 있었는데 빠알갛게 타서 샤워할 때 아플 정도였다.ㅠ.ㅠ)

한 10분을 걸었을까? 아이는 다시 아주 능수능란한 솜씨로 말에 올라탄다. 이 아이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학교를 다니고 있을까? 학교를 다닌다면 어디로 다니고 있는 걸까? 아님 벌써 마부로 직업전선에 나선 것일까? 내려올 때는 긴장감이 풀려서인 지 이제 나의 관심은 온통 이 작은 소녀에게 쏠린다. 그렇지만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데다 조심스러워서 이것저것 물어보기가 쉽지는 않다. “우리 집이야…” 마당엔 빨래가 널려있고, 문고리에 예쁜 장식을 한 집을 가리키며 자기 집이란다. ‘아~ 이 아이는 이 화산섬에서 사는 구나…’ 나는 집이 예쁘다며 “nice house” 를 연발했다. 기회는 찬스라고.. 학교에 다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학교는 어디에 있어? ”저기…” ‘그렇구나… 이 작은 화산섬에도 학교가 있구나… ' '그러니까 이 어린 소녀는 직업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휴일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였구나…’ 안도같은 숨이 쉬어지며 마음 한 켠에 채증처럼 남아있던 소녀에 대한 부담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영어 배우니?” “아니…” 먼저 도착한 남편이 저기서 말에 탄 모습을 찍어주느라 기다리고 서있다. 소녀는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데… 사진을 찍히면서도 소녀의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쓰인다. 내가 내리자 남편은 수고 했다며 아이에게 팁을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팁을 받을 때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쑥쓰러워하며 고개를 숙이던 소녀의 모습이 시도때도 없이 오버랩된다. 아니 지워지지가 않는다. 남편에게 그 순진한 아이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고 하니 남편도 소년과는 대조적으로 무척 쑥쓰러워하던 소녀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소녀도 몇 번 팁을 받다보면 세월의 때가 묻으며 그 순수성과 순진함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래…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그래도 그 변하는 세상과 사람사이에서 자신의 색깔을 지키고 더 빛나게 가꾸어 가는 사람이야 말로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인정머리 없는 자본주의적 몰개성의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귀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나는 또 다시 느꼈다. 여행을 통해 얻는 것은 수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수확은 '나와 다른 삶’에 대한 경험과 그 삶에 대한 겸허한 존중이라는 것을. 과자 사달라. 학용품 사달라, 게임기 사달라... 한창 부모에게 응석부릴 나이에 뙤약볕에 모자하나 없이 산을 오르내리는 마부 소녀가 안스럽기 보다 또 다른 삶의 모습을 경험한 나의 여행에 감사하는 것은 그 천연의 삶이 지니는 고유성에 대한 존중임과 동시에 행복의 모습이나 울타리의 다양함에 대한 숙연한 감상 정도라고나 할까.
김별찬: 12월 첫날이자 이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세월이 가는 것이 무서워지는 것을 보니 제가 늙어가고 있다는 공포가 '철렁' 엄습합니다. 한마당 가족 여러분!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더욱 힘차고 알차게 보내시길 기원하며... 맨날 딱딱한 글만 올려서 여행수기 하나 올려봅니다. 여러분의 삶이 여행처럼 기분좋은 설레임이길 바라며... -[2008/12/01-11:36]-
다만희망: 20C 초 서양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느꼈을 것 같은... 영화 속 한 장면 같리도 하고...바쁜 일정 가운데 틈틈이 많은 것들을 느끼며 글로 적어내시고... 선생님, 한국은 무척 춥지요? 벌써 12월이에요. 학기초 시험 문제 출제, 크리스마스 콘서트 ... 그리고 2주 휴가가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은 휴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설렘입니다. -[2008/12/03-09:26]-
천사: 꼭 이맘 때 우리 교사들과 함께 말타기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물론 그 상황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정말 다만희망샘 말씀대로 바쁜데도 많은 것들을 손에 신이 들린듯 잘 그리셨네요. 필리핀을 다녀와보지 못한 저로선 많은 부분 낯설지만 그래도 별찬샘 덕에 간접경험을 톡톡히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별찬샘은 여행처럼 기분좋은 설레임을 말씀하셨고, 다만희망샘은 기다리는 휴가의 설렘을 나누셨는데요...전요...울 한국학교 아이들에게 2주후 마지막 종강식날 줄 상장과 선물에 이렇게 설렙니다. 모범상, 특별상, 개근상, 졸업상, 장학생, 기타 감사장등 많은 것을 주며 일년을 뒤돌아보는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은 아마도 평생 주고만 살고픈 제 맘과도 일치하는 삶 같습니다. 오늘 저는 오클랜드 영사관에 올라가 오세아니아 평통 주관 글짓기대회 시상식에 참여하고 방금 돌아왔습니다. 물론 직장은 조퇴를 하고요. 울 아이들이 받아든 상패와 상금 그리고 만들어진 책을 보며 얼마나 기쁘던지...이래서 전 평생 아이들과 살아야하나 봅니다. 내가 받은 상보다 더 기뻤으니 말입니다.ㅎㅎㅎ 추운 겨울의 북반구 샘들은 더욱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여름나라에서^*^ -[2008/12/03-19:28]-
김별찬: 다만희망샘... 한국은 춥다가 이제 조금 풀어졌어요. 몸보다 마음이 바쁜 12월이 흐르고 있어요. 다만희망샘이나 천사님은 몸도 무지 바쁘겠지만 저는 그럭저럭 지내요. 이젠 게으름이 몸에 배었는 지 나가는 것도 싫고... 연말의 바쁜 일정 잘 치르시고, 콘서트, 휴가로 이어지는 보상이 더욱 큰 기쁨과 행복이 되길 바랍니다. 천사님.. 선배님 글을 읽으니 학기를 마무리하며 바쁘고 설레던 생각도 나고, 항상 이맘때쯤 있었던 '한영영한번역대회'시상식도 생각납니다. 몇 년 만에 우리학교 아이가 상을 타서 펄쩍 뛰며 좋아하던 기억도... 첫 눈의 기억처럼, 꿈처럼 그렇게... 다시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아프기도 하고, 그래서 더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다만희망샘, 천사샘, 그 외 한마당 가족 여러분! 학기 잘 마무리 하시고, 학교로 인해 즐거운 추억 가득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2008/12/03-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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