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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오빠






내겐 오빠가 둘, 언니가 둘이 있다.

큰오빠 큰 언니는 범생이. 성실맨이다. 작은 오빠 작은 언니는 어릴적부터 망나니짓은 도맡아 했다.

처녀로 시집와서 홀아비에게 딸려있던 이들은 우리 엄마에겐 힘든 산이었을 것이다.



작은 오빠는 엄마가 싫어하는 일은 골라서 했다. 동네 애들 패기. 돈 훔쳐서 옆 집 아이들과 뭐 사먹기. 학교 보내면 안가고 놀다오기. 거짓말도 밥 먹듯 했더랬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에겐 작은 오빠는 망나니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가출을 밥 먹듯 했던 오빠는 아버지 돌아가실 적에도 연락이 안닿았더랬다. 돌아가신지 2년 후 집에와서 아버지가 남겨주신 성경책을 안고 눈물 뚝뚝 흘리며 소같이 울었던 모습. 그대로 내 기억에 살아있다.



특히 엄마와는 앙숙이었다. 서로 성격도 안맞고 고양이와 개를 보듯했다. 그래도 자식인지라 엄마 신발 사이즈를 알고 구두를 사다드렸던 게 엄마는 감동해 작은 오빠 얘기가 나오면 구두얘기부터 하곤했다.

내 발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니? 에이 엄마. 내가 엄마 발 사이즈를 왜몰라요? 다 알지. 그랬다. 난 엄마 발사이즈를 몰랐지만 자식들 중 유일하게 엄마 발 사이즈를 알았던 자식.



오빠는 유독 나를 예뻐했다. 맛있는 것 있으면 먼저 주었다.
내 동생이야. 하고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다.
의논 할 일 있으면 나와 하려고 했다.



양식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양식집에서 일하게 됐을 때 돈까스를 해먹이고 싶어서 직장에 오라고 안달을 떨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오빠에게 몇 번 놀러가서 먹었던 돈까스는 아주 일품이었다.
평소 다른 경양식집에서 봤던 얇디얇았던 그런 돈까스가 아닌 두툼한 고기가 그대로 씹히던 아주 고급스럽던 돈까스.



학교 휴학하고 아주 어렵게 지내던 어느 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었다.
작은 오빠가 붙잡혀 들어갔단다. 엄마가 아프시다고 경찰에 거짓말도 했나보다.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려다 그랬다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배신감을 크게 느꼈다. 난 엄마는 아프지 않고 작은 오빠는 형벌을 크게 받아도 싸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민을 갔다. 그렇게 오빠와는 20년의 갭이 생겼다.

어딘가에서 잘 살겠지. 서로 연락처도 모르고 지냈다. 큰 오빠하고도 연락이 없다고 했다.



몇 달 전. 그런 작은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암 수술을 받으려면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직 결혼도 못한 오빠. 한심했다.
잘난 척은 혼자 다했으면서. 노래도 잘하고, 말솜씨도 좋고, 남들에게 그렇게 잘하면서 여자 하나 못 구해서 혼자 사냐 싶었다.
큰 오빠와 큰 언니와 연락을 해서 갔다. 그렇게 멋있던 오빠는 없고 이빨이 훵하니 빠진 노인네가 병상에 누워있었다.
날 보더니 펄쩍 뛰며 놀랐다. 반갑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한 것 같았다.
암수술은 배를 열었다가 너무 많이 퍼져서 그냥 닫았다고 했다.
우리 형제들은 이제야 돈 한 푼없이 나타난 작은 오빠가 짐스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저 암수술비며, 치료비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려를 불식시킨 것은 작은 오빠를 영웅처럼 떠받드는 동생들이었다.
대학로에서 오빠는 유명인사란다.
거기 있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밥 사주고 인간대접해주며 잘해준 사람이라서 대학로 천사라고했다. 수많은 뮤지션들, 연극인들 심지어 노숙자들까지 작은 오빠의 식구가 되어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형제들보다 더 형제스러웠다. 오빠를 위해서 조를 짜서 간병을 해주고 입원비를 마련하고, 지극정성이었다. 그동안 작은 오빠가 베풀었던 게 아주 많았다고들 입을 모았다.



작은 오빠는 자긴 아주 많이 나았다고 했다.
암치료 받으면 1년 더 살고 안하면 2달 산다고 했는데 경과가 무지 좋다고 오빠는 내게 자랑을 했다.그대로 믿었다.
아, 경과가 참 좋구나. 이제 함 얼굴볼까? 했더니 설에보잔다.

지난 금요일 16일에는 활기찬 하루,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살자고 문자도 보내왔다. 난데없이 '아름다운 세상' 컬러링도 선물로 오기도 했다. 암이 다 나아가니까 세상이 아름다운 게 새삼 느껴지나보다 했다.



화요일. 큰 오빠가 전화했다.
작은 오빠가 죽었다고 했다.

입원하라는 대학로 동생들마저 오지 말라고 해놓고 혼자 집에서 죽은 지 이틀만에 발견됐다.
충격이었다.
서둘러 빈소를 차리고 대학로 동생들은 영정앞에서 서럽게 돌아가면서 통곡을 했다. 우리 형제들보다 더 애틋하게 울었다. 과연 내가 죽었을 때 몇 명이 저렇게 와서 울어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주 많은 이들이 오빠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옷이 허술했고, 노숙자도 많았고, 발냄새도 심했고, 몸이 성치않은 이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작은 오빠는 정말 좋은 친구였나보다. 그들의 통곡소리. 우리 식구에게 그저 망나니였던 오빠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고 그들에게 우상이 되어 있었다. 상반된 모습때문에 식구들은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 오빠에게도 여자가 있었던 사실도 알아냈다. 대학로 동생들 말로는 그여자가 오빠 돈을 다 사기쳐 먹었다고 했다. 작은 오빠는 7개월 동거 끝에 집도 주고 그냥 잠바때기 하나로 집을 나와 술로 지새웠단다.



좋은 데 갔을 꺼에요 형은 나쁜 짓 하나도 안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항상 웃으며 누가 욕해도 잘해준 형이에요. 순하고 착한 형이에요.

눈물 범벅이 동생들은 앵무새처럼 그렇게 말하고 또 말했다.


입원하자고 몇 시간을 싸웠던 동생. 몇 달 하루도 안빠지고 다니다 처음으로 이틀 안간 동안 죽어버렸기에 더 죄책감을 느끼던 동생. 그런 동생들 때문에 정작 진짜 동생인 난 그들을 위로하기 바빴다.



곁을 어느정도 사이를 둬야 편안했던 작은 오빠. 아주 가까이 두기엔 버겁던 오빠가 대학로 버려진 사람들, 외로운 이들에겐 아주 가까운 혈육이 되어 있었다.


산 사람은 산다.

화장장 화로 속으로 오빠를 집어넣고 우린 대성통곡을 했다.

두 시간동안 기다려야 했다.
우린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갈비탕과 깍두기 맛은 아주 일품이었다.
지쳐서 서로 말도 안하고 국물까지 후루룩 다 마셨다.



오빠는 한 줌의 재로 남았고 우린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한줌씩 오빠를 버렸다.

오빠 미안해.
울음을 쏟자 엄마도 큰오빠도, 큰 언니도 미안하다. 미안하다. 외쳤다.


우린 작은 오빠에게 뭐가 그리 미안할까?









고정미 (2009-02-10 18:11:47)
작은 오빠와 공주님 가족 이야기...눈물이 다 찡하네요...
서울 한하늘 아래서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걸...그럼 조금 덜 미안하려나...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이제 어렵게 들어오셨으니 자주 오시고요 서울 소식도 또 공주님 소식도 종종 전해주세요.
공부는 다 마치셨나요? 여전히 바쁘고 활기차게 사시죠? 저도 이젠 사이버대학 4학년이 되었답니다. 시작이 반인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못 들어오시면 저나 한빛나리 샘에게 연락주세요. 모두 오셔서 전처럼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로 알콩달콩 멋지게 꾸며봐요. 어제가 대보름이었는데...흐린 날씨 덕에 오늘을 기대했더니, 역시 오늘도 꽝이네요.^^내일은 밤하늘이 청명하려나? ㅎㅎ이루시고자 하는 뜻 모두 이루시는 한 해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은희 (2009-02-14 11:29:51)
친구나 혈육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도 고인과 함께 일부는 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친구가 세상을 떠난 후, 제 삶의 일부가 사라졌어요.
이 글을 읽고 이은혜 선생님의 혈육의 정과 아쉬움이 느껴졌어요. 선생님의 허전한 마음이 너무 크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김태진 (2009-02-14 21:52:33)
가족이 주는 존재의 무게, 그만큼 또 그 빈자리의 뭉클한 허전함에...ㅠ.ㅠ
공주님 오라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에 와도 자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보고자 하면 금방 만날 수 있으니까 보고픔을 달래봅니다. 지금 페루에 있는 것 같던데... 예쁜 봄이 되면 만나요.^*^







서 규원 (2009-02-16 18:24:52)
선생님 힘내세요. 훌쩍 !!







천사 (2009-03-09 19:48:19)
다만희망샘, 별찬샘, 착한아이샘...
모두모두 정말 착하시네요. 저야말로 마음이 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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