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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의 조어력에 대한 이야기


흔히 한자말에 비해서 우리말의 조어력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자말을 가지고 말을 만들기는 쉬운데, 우리말로 말을 만들면 불필요하게 길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동안 한자말에 눌려 우리말이
기를 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랫동안 생존해 온 언어라면 세계 어느 나라 말이든 나름대로 조어력을 갖추고 있듯이,
우리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말만들기의 힘이 풍부합니다.
잠깐 틈이 나서 들어온 김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보겠습니다.

우리말이 만들어진 모습은 무척 슬기롭고 효율적입니다.
‘길다’는 ‘길’에 ‘-다’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이지요. ‘길’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길고도 멀어서 끝나는 데를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속성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길’에 ‘-다’를 붙여 ‘길다’라는 동사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원리로 ‘빗’의 주된 용도를 나타내는 동사를, 물건의 이름인 ‘빗’에 ‘-다’를 붙여서
‘빗다’라고 만들었습니다. ‘신’에 ‘-다’를 붙여 ‘신다’가 됐고, ‘품다’는 ‘품’에 ‘-다’를 붙인 말입니다.
어떤 사물의 속성을 그대로 밝혀서 동사로 만든 것들이
우리가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기본 어휘들입니다.

또, ‘솔다’는 말이 있는데, 이때의 ‘솔’은 가늘고 좁다는 뜻의 말입니다.
바느질할 때, 옷의 겉과 속을 뚫고 가느다랗게 이어진 봉합선을 ‘솔’ 또는 ‘솔기’라고 합니다.
소나무 잎을 솔잎이라고 하는 것도 그 잎 모양이 가느다랗고 좁기 때문이지요.
이 ‘솔’에 ‘-다’를 붙여서 ‘솔다’라고 하면, ‘좁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도 한국의 나이 든 세대 가운데는 ‘좁다’는 말을 ‘솔다’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기본 어휘들을 바탕으로 우리말은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져 왔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솔’의 경우만 보더라도, 솔에는 가느다랗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이 솔을 반복해서 ‘솔솔’이라고 하면, 가느다란 것이 계속 이어지는 모양을 말합니다.
그래서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모양을 “연기가 솔솔 난다.”고 하는 것이지요.
또, 냄새가 가느다랗게 이어져 맡아지면 “냄새가 솔솔 난다.”고 말하며,
“솔솔 부는 솔바람”은 가늘게 부는 바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말에서 형용사는 이보다 더 차원 높게 만들어져 왔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마음에 느끼는 것> 은 대개 ‘-프다’를 붙여 말을 만들었습니다.
‘아프다’가 그렇고, ‘배고프다, 슬프다, 구슬프다, 서글프다’ 들이 그렇습니다.
‘고단하다’는 몸이 지친 것이지만, 여기에 ‘-프다’를 붙여 ‘고달프다’고 하면 마음이 지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말 조어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늘다’는 물체의 모양에 불과하지만, ‘가냘프다’고 하면 ‘가늘고 얇게 느껴진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가냘픈 여인의 몸매’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인 느낌을 말하는
측면이 강한 것이지요.

대개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겠지만, 나름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소 학구적인 내용으로 한마당의 좋은 분위기를 망가뜨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재미있게 글을 쓸 줄 모르니, 그저 이렇게라도 참여해 봅니다, 여러분의 마당에.

휘리릭~










로체스터 (2009-11-24 18:13:46)
어머...! 어머...! 어머나...! 아쿠~~~~~, 우리 성기지 샘, 안녕하세요?
배달말 입성을 ... , ' 휘리릭~ ' (휫바람이유? 호르라기유?) 과 함께~~~!
여기...미국 로체스터까지.....들리네유. ㅎㅎㅎ 자다가...깨어났우. 왠 휘리릭~?

자다가...깨어나서, 한국말의 조어력에 대한 강의를 읽는 배움도...이만 저만 행복!
음.., 가날픈 여인의 몸매...., 고것이...한 밤중에 깨어난 왕누나에겐 부끄럼이오.ㅎ
방가,방가...성 샘. 아주 명 강의를 가져오셨다오. 다시 돌아가..자야하나???







수선화 (2009-11-24 21:14:44)
배달말 샘
샘들의 글 속에서 13기 연수생을 위한 샘의 열정을 읽었습니다. 안녕하시지요? 샘 이 자리를 빌려 혹시 동일어 정리해 두신 게 없나 묻고 싶습니다. 아님 출간된 책도좋구요. 학생들의 어휘 확장과 짓기 지도에 꼭 필요한데, 대학 다닐 때 그런 연구를해 본 적은 있지만 자료로 나와 있는 것은 보지 못했어요. 대학 다닐 때 나이보다 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엔 나와 있을 법도 한데.... 샘 아시면 알려 주세요. 가끔 오셔서 아카데믹한 글로 저의 비어가는 머리에 생수를......기대합니다.







별찬 (2009-11-24 23:19:33)
고맙습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배달말 (2009-11-25 09:35:52)
이선생님, 안녕하세요? 동일어라면 동의어와 동음어를 모두 말하시는 것인지요? 한국어 동의어 사전은 아직 제대로 된 것이 없는 듯합니다. 제가 주로 참고하고 있는 것은 한국문화사에서 나온 사전인데, 이 사전엔 동의어와 동음어가 대충 정리되어 있습니다. 반의어까지 선보이고 있어요. 하지만 많이 부족합니다. 학회에서 해야 할 사업 가운데 하나이지요..







본댁 (2009-11-25 14:35:29)
배달말샘, 재미있는(!) 그리고 필요한 내용입니다. 조어력에 대한 이야기(2)를 기다려도 되나요?







수선화 (2009-11-26 07:31:46)
성선생님. 선생님이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동의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사실 글을 올리고 동일어라는 부분이 잘못 되어 고치려고 했는데, 여기 글쓰기에서 글을 올린 다음 글을 수정하려고 하면 썼던 글이 다 지워져 버려서 다시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뒀답니다. 선생님께서 제 질문의 의도를 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기본 동사, 형용사, 부사 등에 관한 정리가 되어 있으면 아이들 짓기 지도에 많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영국은 그런 자료들이 많아 어렸을 때부터 짓기를 할 때 늘 사전을 보며 동의어 반복을 피하는 연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어휘확장도 되고 창의적인 문장을 만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처럼 연구하시는 분들이 참 귀한 것 같습니다. 부럽기도 하구요..... 선생님 답변 감사합니다.







천사 (2009-11-27 08:15:48)
배달말 성기지 샘. 공부시켜주는 귀한 글...글을 재미있게 못쓰는 것이 아니라 꼭 알아야 할 글을 올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고맙습니다. 수선화샘과의 대화에서 이제 저도 고개가 끄덕여 지는걸 보니 한국어문화학과 공부를 하고 있는가 싶습니다.^^
배달말 샘. 바라고 원하는 것들...모두가 이루시는 샘이 되시길 바라며 한글학회의 귀한 모퉁이 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안개꽃 (2009-11-27 08:49:49)
와우! 머리에 쏙쏙.....
예쁜 우리 말에 또한번 감탄합니다. '솔다' 정겨운 오솔길이 생각 나네요.
좁다란= 솔다란 ㅋㅋㅋㅋ 이렇게 써도 되는지~~~~~~
배달말님, 앞으로 종종 부탁드립니다. 아름다운 우리 말 , 열공합니다.







배달말 (2009-11-27 13:28:16)
정선생님, 안녕하세요? 오솔길은 참 멋진 말이에요. '외롭다'와 어근이 같은 <오> , '가느다랗다'의 <솔> 이 어울려서, <오솔> 이 되었어요.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외롭게 보이는 가느다란 길'이란 뜻으로 만들어졌을 거예요. 멋있죠?







게으른생각 (2009-12-01 00:31:29)
성기지 선생님, 너무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 잘 읽고 새롭게 한글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물의 속성을 그대로 밝혀서 동사로 만들자면, '기지다'는 '성실하고 참되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ㅎㅎ







가나다 (2009-12-02 10:59:36)
성기지 선생님...
배움과 유익한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길.... 선생님..또 배움의 길로 인도하소서...ㅎㅎㅎ







늘감사 (2009-12-03 23:02:38)
배달말 선생님, 당장 고급반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겠네요. 글 읽는 동안 고개가 절로 끄덕끄덕 거리는군요.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냥 오솔길은 오솔길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풀어서 읽고 보니 더 정감있게 들립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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