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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세상은 누구를 위한 세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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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세상은 누구를 위한 세상인가?
― 영어를 모국어의 상위 언어로 떠받드는 식민 근성을 버리라 ―



새 정부의 중점 정책이 다른 것도 아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영어로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짧은 5년 임기 동안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모양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부터 국어와 수학마저도 영어로 가르치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한다는 기상천외한 교육 정책까지도 서슴없이 거론되고 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도 영어로 배워야 하고, 함수와 도형도 영어로 배워야 할 판이다. 이것은 영어 실력 향상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이 영어로 설명하는 훈민정음 창제 정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 어려운 함수와 도형을 도대체 어떻게 영어로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지금도 농촌에는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한 이들이 많다. 많은 국민들이 한글 맞춤법 등 어문 규범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여 일상생활의 국어 사용 능력이 매우 낮은 현실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국어 기본법’을 마련하여 세 해 전에 국회를 통과시켰고, 전국 곳곳에 국어 상담소를 설치하여 국민의 국어 생활을 돕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제 겨우 우리 말글의 규범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새 정부가 영어 광풍을 일으켜 그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인수위원회의 영어 지상주의와 무조건적인 영어 몰입 정책을 보면, 새 정부의 5년은 마침내 영어 세상이 될 듯하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사는 세상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것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맞이할 5년은 영어 능력에 따른 사회 분열이 심화되고 영어 귀족 계급이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군림할 영어 세상이다. 과연 이는 누구를 위한 세상이 될 것인가?

지난날 어두웠던 시대에는 일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우리말 수업 대신 일본어 교육을 강제하여 식민화에 골몰하더니, 이제는 새 정부가 발 벗고 나서서 초등학교 교육 현장에서부터 영어 몰입 교육으로 아예 우리말 발전의 싹을 자르려 하고 있다. 새 정부는 어찌하여 스스로 미국의 식민지화를 자초하는 것일까? 조선 왕조 500년 동안에는 한자-한문 때문에, 일제 35년 동안에는 일본어 때문에 우리 말글은 한 번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 또 다시 미국 말글로 우리말 우리글의 움트는 싹을 짓밟으려 하니, 나라의 앞날에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여 답답하기 그지없다.

새 정부의 영어 지상주의가 갖가지 정책으로 무모하게 펼쳐진다면, 영어 못하는 사람이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은 말 못 하는 벙어리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미국말 실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국 사람이 한국 땅에서 발 디딜 곳이 없어진다는 상상을 해 보라. 국민들은 영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교육에 더 많은 돈을 쏟아 붓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육에서 영어 몰입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학교에서 아무리 잘 가르쳐도 학습 성취도에는 개인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영어 실력이 생존의 절대적인 수단이 된 만큼, 학교 밖의 사교육 시장은 무한정 커질 것이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예측은 삼척동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새 정부가 끝끝내 영어를 모국어의 상위 언어로 떠받들어 4300여 년 역사의 이 땅을 영어 세상으로 만들려 한다면, 우리 사회는 새 정권 첫 해부터 국론이 사분오열되고, 갖가지 시행착오로 엄청난 혈세를 낭비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5년 동안에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가혹하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국민 대다수는 이러한 사태를 결코 앉아서 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디 현실을 바로 보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천추의 한을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기를 바란다. 인수위에서 발표한 영어 교육 정책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도 조롱과 비웃음을 받고 있다. 언어 정책은 부동산 정책과는 다르다.



2008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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