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고쳐야 합니다
권 재일
한글학회 회장
한글학회와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는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고 민족문화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이제 헌법을 누구에게나 알기 쉽고 우리말답게 고칠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언어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언어는 단순히 그러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구실도 합니다. 그래서 한 국가나 민족은 공통된 언어 구조에 이끌려 공통된 정신과 생각을 가지게 되고 고유한 문화를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이를 사용하는 국가 또는 민족, 그리고 그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말도 우리의 얼을 기르면서 우리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맡아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말의 가치를 높이 인식하고 이를 올바르게 가꾸어가야 합니다.
국가의 헌법은 물론 온갖 법령을 비롯하여 국가기관이 사용하는 언어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령과 행정에 쓰이는 언어는 모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훨씬 더 쉽고 정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국가가 제정한 법령과 작성한 행정문서가 어렵고 분명하지 못하였다면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는 제대로 된 법령과 행정 언어를 사용하여 국민들의 올바른 언어생활에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본 법률은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하던 일본 법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많아서 법률 문장에는 지금 우리가 쓰지 않는 일본 한자어와 말투, 낯선 한자어가 가득합니다. 2016년에 헌법재판소에서 공문서는 한글만 쓰기가 헌법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결했음에도 지금의 헌법은 아직도 한글과 한문 섞어쓰기 문체입니다.
이제 정치권에서 헌법을 개정한다 하니, 물론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위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국민 모두가 알기 쉬운 헌법, 그리고 우리말의 가치를 드높이는 헌법으로 거듭나도록 용어와 문장을 바로잡아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국민 누구나 헌법을 쉽게 읽으면서 국가의 운영 원리,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한글학회와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향으로 헌법을 고치기를 제안합니다.
첫째, 어려운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고, 우리말답게 문장을 다듬어야 합니다. 잘 쓰지 않는 한자어는 쉬운 말로 바꾸고, 일본어 말투를 자연스러운 우리말 말투로 고쳐야 합니다. 또한 한 문장을 길게 적은 문장들도 간결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둘째, 한자 능력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이 있는 한글과 한문 섞어쓰기 문체를 한글만 쓰기 문체로 바꾸어야 합니다.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 제14조에서는 공문서의 한글만 쓰기를 규정하였고, 2016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공문서 한글만 쓰기 규정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면에서 전혀 헌법 정신에 어긋나지 않으며, 한자어를 반드시 한자로 표기해야 할 까닭은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오늘날 글자생활에서 한글과 한문 섞어쓰기 문체는 의사소통에 방해가 되므로 반드시 한글만 쓰기로 바꾸어야 합니다.
셋째, 이미 2004년 헌법재판소 판결과 2005년에 제정된 국어기본법에서 밝혔지만, 대한민국의 공용어는 한국어이고 공용문자는 한글이라는 규정을 새 헌법의 총강에 넣어야 합니다.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는 우리말을 한국어로 하고 우리글을 한글로 하는 것이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기본적 헌법 사항이라고 밝혔고, 국어기본법 제3조에서는 한국어가 대한민국의 공용어이며 한글이 국어를 표기하는 우리의 고유 문자임을 규정하였습니다. 민족의 정체성과 언어생활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헌법에 이 조항을 반드시 넣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허 웅 선생은 『한글새소식』 제181호의 ‘헌법 개정에 즈음하여’라는 글에서 “헌법을 한글로만 적는 것은 민주주의 실천의 첫걸음이며, 새 시대에는 어려운 글자와 알지 못하는 말로 국민을 내려다보는 허세를 그만 두어야 하며, 헌법 문장의 짜임새는 논리적으로 잘 다듬어야 한다.”라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한글학회와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는 개헌 논의가 활발한 지금 국회와 정부가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에 앞장서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지난 달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응답한 의원 100%가 어려운 용어와 일본어 말투로 된 문장을 쉬운 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고, 72.4%가 한글과 한문 섞어쓰기를 반대하고 한글만 쓰기를 찬성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국회의원의 뜻을 국회와 정부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거듭 헌법을 알기 쉽게 바꾸는 일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 일에 한글학회 회원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함께 참여하여 이러한 뜻이 꼭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이 글은 『한글새소식』 제547호의 머리글을 옮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