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너무 바쁘게 지냈던 터라 내 생일 날 하루는 쉬자 싶었다.
허선생이 봉지째 넘겨주었던 비디오 테이프를 안방으로 가져가 쉰다는 핑계로 몇 시간을 은비와 빈둥거리며 누워서 보냈다.
그렇게 유명하다는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드라마였다.
요즘 내가 다시 전공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것이 드라마 극본이라 공부하는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아직 테이프 네 개 정도 밖에 보지 못했는데, 그 유명세에 비해 날 확 끌어당기는 뭔가가 없었다.
내가 배우고자 하던 드라마 작법 구성도 더 지나봐야 아는 것일까? 지금까지 본 것에서는 내가 배울만한 그 무엇도 없어보였다. 역시 여느 드라마답게 중간은 짜증난다. 성격이 급해서 그걸 못참고 회익~ 건너뛰어서 마지막 편을 보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소설 책은 어떤 지루한 책이라도 끝까지 잡고 읽게 되는데 왜 드라마를 볼 때는 그 인내심이 없어지면서 냉혹하게 바라보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짜증으로 인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막내가 생일 선물이라면서 하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봉투 겉 면에는 지가 좋아하는 '치까 수페르 뽀데로사'가 붙어있다. 글쎄, 이 만화가 한국에서 방영이 된 걸까? 세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데 눈이 굉장히 크다. 이 힘이 아주 쎈 주인공들은 나쁜 어른들을 날려보내기도 하고 지네들이 획획 날아다니면서 일처리를 하는 만화다.
올록볼록 엠보싱 처리된 그 스티커를 유심히 만져보니 막내는 그것은 생일 선물 겉딱지에 붙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원래 있던 거라고 밝혔다. 안을 얼른 열어보라는 의미이다.
하얀 봉투 안에는 그림 세 장이 있었다. 엄마인 나를 주인공으로 인어공주들을 그려놨다. 한 인어공주는 분홍색 머리에 분홍 눈이 너무 커서 한 참 봤더니 지도 민망한지 한마디한다.
'그게요 너무 이쁘게 그릴라고 했는데 그렇게 괴물이 되었어요.'
암튼 투실투실한 살집있는 인어공주들은 눈이 하나같이 커다래서 웃겼다. 이 지지배가 요즘의 엄마가 토실해져가는 걸 유심히 관찰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 째려봤다.
'엄마~ 아냐 아니에요 괴물 그리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래도 엄마 생일 선물이라고 그림을 그려왔는데 칭찬해줘야겠지?
'고마워~ 너무 이쁘다. 근데 이 인어공주는 꼬리가 왜이케 짧아?'
내 작은 키를 일부러 그케 그렸나 하는 맘으로 딴지를 함 걸어본다.
'푸하하하~ 엄마 숏다리라 그래서 그런게 아니고 종이가 모자라서 그냥 그렇게 그렸어요.'
그래도 딸내미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이니 안방 벽면에 부치기로 했다. 이미 안방 침대 위에는 막내의 그림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데 어디에다 부친담~
에공. 부칠 데가 없다. 일단 화장대 거울에 늘어놓기로 했다. (화장품 놓을 자리도 별로 없구만.)
큰 녀석 둘은 엄마 생일 선물에 대해선 용돈이 모자랐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 막내에게서만 생일 선물을 받았다고 하니까 큰 넘이 지네도 그림 그려서 때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하긴 그 고딩이나 되어가지고 엄마 생일 선물로 만화그림 하나 그려준다는 것이 손이 부끄럽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게는 그것도 좋은 선물임을 이 녀석들은 모른다. 지네가 다 큰지안다.
오후의 무료함 속에서 아이들과 투닥거리고 있는데 랑이 그래도 생일이니까 식구들 모여서 외식이나 하자고 전화를 했다. 회사 거래처 사람 하나랑 페루인 동업자 알프레도가 같이 나온댄다. 알프레도는 우리랑 거의 10년된 친구이다.
막내는 자기가 애지중지 키우는(?) 강아지 인형 코코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가겠다고 우겼다. (강아지 이름이 코코이다.)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또 지진이라도 나면 혼자 집에서 죽으니까 데리고 가야한다나. 그 인형때문에 매 번 실랑이를 벌이니 이제 그냥 냅두기로 했다.
지가 가방에 메고 다닌다니까.
인형 덩치가 있기 때문에 가방은 좀 커야했는데도 지 자식처럼 돌보는 인형이니 데리고 가기로 했다. 저 번에도 불꺼놓은 방에 코코를 혼자 놔뒀다고 밖에서 안절부절 못했던게 기억나서 차라리 가져가라고 했다.
저녁은 얼마전 대사님이 한국학교 선생들 초대한 그 중국집으로 가기로 했다. 시설은 낡았어도 음식 맛은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아내와 자식들을 스페인으로 보내 기러기 아빠가 된 알프레도는 수염을 제대로 안밀고 와서 볼대고 인사하는 '움베시또'를 하는데 무지 따갑다. 으~
생일이라고 다시 한번 볼을 부벼댄다. 아구 따가 따가 시로시로~
페루인 거래처 사람은 나이가 40인데도 결혼을 아직 안했댄다.
알프레도와 랑은 거래처 사람에게 결혼이 급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빨리 낳는 것이 좋은 거라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랑은 그들에게 자기의 자랑거리는 '내 가족'이라는 거다.
옆에서 흘깃 내가 쳐다보니까 랑이 묻는다.
'왜? 난 그래. 우리 가족이 내겐 명예이고 자랑이며 재산이야.'
너무 행복하며 만족하고 사는 랑을 보며 나와 아이들은 괜스레 민망해졌다. 아니, 나만 민망해졌을꺼다.
씨익~ 웃어주었다.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것은 좋은 것이니까.
한껏 기분 좋아진 랑이 맥주 한 잔을 권한다.
'살룻~(건배)'
모두 잔을 들어 내 생일을 축하해줬다. 아이들은 노란 잉카콜라를, 어른들은 맥주를 담은 잔을 들었다. 한 모금 차가운 맥주를 들이켰다. 싸르르 넘어가며 여느 때처럼 알콜끼가 엄지 발가락까지 전기를 보낸다. 오랜만의 알콜은 반잔만 마셨음에도 휘청~ 어지러움을 준다.
저녁은 맛있었고, 상차림도 훌륭했고, 분위기도 아주 좋았는데, 내 뱃속은 딴판으로 부글부글 장염끼가 있다. 뒷골도 흔들리며 아픈 것을 보니 열흘 전 시작된 몸살이 다시 시작하려나 싶어 겁부터 난다.
랑이 장난삼아 인형 코코입을 물었었는데 막내는 그게 영 못마땅한지 코코한테서 이상한 냄새도 나고 이제 자기 냄새가 안나고 아빠 냄새만 난다고 찡찡댔다.
막내랑 내 사이에 코코를 끼고 자면 밤새 막내 냄새와 엄마 냄새가 밸꺼니가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렇게 막내를 달래 코코와 막내를 안고 누웠다.
내일은 나도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야지. 한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