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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된 티와 10년 된 청바지

제목 : 19년 된 티와 10년 된 청바지

이 은혜


정리를 하자 싶으면 늘 난감해진다. 무얼 버려야 할 지. 무얼 갖고 가야 할지 결정 못하고 미적거리기 때문이다.
추억이 담긴 물건이나 옷을 버리지 못하고 싸들고 다니니까 남편은 내가 외출한 사이 버리지 못한 물건을 다 버렸다고 으름장을 놓아본 적도 있다.
무엇을 소중해 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버렸다고 통박을 놓으니 슬그머니 버렸다던 보따리를 도로 내놓았었다.
정리를 잘 하는 어떤 이는 내게 말한다.
'1년 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고 입어보지도 않은 것은 버려야 해.'
하지만 난 그걸 못하니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오늘은 큰 맘 먹고 버려보자 싶다.
서랍 속에는 그 동안 역사를 같이한 옷들이 날 올려다본다. 다 꺼내어 한 쪽으로 쌓은 뒤 차곡차곡 정리를 해 나간다. 오른 쪽은 버려야 할 옷, 왼쪽은 그래도 입을만한 옷이지만 어려운 현지인에게 줄 옷, 앞에는 계속 갖고 싶은 옷…….
‘그래. 이 옷을 입었을 때는 비가 많이 왔지. 이 목도리를 선물 받았을 때 참 기분 좋았어.’
옷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다.
아……. 회색 면 티가 나왔다.
이민 나갈 준비를 하며 수원 남문 백화점에서 산 것이다. 모자가 달리고 박스 티인데 어찌나 편하고 맘에 드는지 첫 날엔 아예 입고 잤었다.
뒷면에 하얀 색으로 커다란 말이 시원스레 그려져 있다. 임신으로 배가 남산만 해진 체형을 충분히 커버해줘서 멜빵 청바지를 입고 그 위에 걸쳐 입으면 누가 봐도 배가 좀 나온 여학생 같았다.
펼쳐 보았다. 면이 좋은 거였는지 아직 쓸만하다. 아니 좀 낡은 티가 나는 게 더 정감가고 짠한 맘까지 일으킨다.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기 전에 서해로 남해로 동해로 친구들과 여행을 갔었다.
다른 옷도 가져갔을 터인데 사진에는 이 회색 티의 임신부만 웃고 있거나 심통이 나 있거나 무표정으로 있다. 또 같은 모습의 사진은 설악산에서 웃고 있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팔레르모 공원에서도 웃고 있다.
이민 생활 초창기에 누구나가 덤벼보는 ‘알마센’을 했다. 큰 슈퍼마켓이 아니고 작은 가게라고 볼 수 있다. 아주버니가 차려놓았는데 대학원을 마치러 한국에 갈 예정이라 나밖에 가게를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 고등학생 시누는 공부를 해야 했고 남편은 자기 일로 바빴다. 시부모는 스페인어를 전혀 못해서 도와주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가게 일은 다 내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었고, 젖먹이 아들 윤희가 가끔 젖을 찾으려 하니 헐렁하고 편안한 이 티를 주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이니 대화 소통이 제대로 안되어 답답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손님들과 친하게 지내며 정을 주려고 했을 때 그들이 모두 내 가게에서 좀도둑 노릇을 하며 물건을 하나씩 버릇처럼 훔쳐간다는 걸 알았다. 이것을 문화차이라 봐야 이해가 되는 것일까? 배신감이 들며 괘씸했다. 일에 대해 가게에 대하여 힘만 들고 정이 안 갔다.
게다가 아주버니네, 우리가족, 시누, 시부모와 한 집에서 사는 아르헨티나 생활은 조선시대 시집살이가 연상될 정도였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적응이 필요한 시기라 식구 모두 이민 스트레스로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다. 그래서 제일 지내기 어려웠던 사람은 층층시하에서 지내는 나였다. 구전 시집살이 민요 중에 ‘미련퉁이 서방님’이란 대목을 들은 기억이 있다. 눈치 없고 철없던 남편은 그 민요에 걸맞은 노릇을 해줬다. 사업을 한다고 밖으로만 돌았다. 덕분에 외로운 이민생활은 눈물바람으로 지새우기 일쑤인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위에 친구도 없었고, 한국의 친정은 너무 멀었다.
저 나무를 슬쩍 밀치면 우리 동네가 보일, 옥상에 올라가 고개를 빼어, 저기야 내 살던 곳이...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그런 거리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잠을 못자 칭얼거리는 아이를 업고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시골에서 자란 내가 늘 보던 북두칠성 대신 남십자성이 보인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슬픈 마음으로 살던 시기였기에 ‘이방인’ 이라는 의미를 주는 별자리가 쓸쓸하고 서글펐다.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면 버릇처럼 티를 만지작거리며 가곡을 불렀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낮게 부르는 내 노래 소리에 아가는 등에서 새록새록 숨소리를 내며 자기 시작했다.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 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 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그러게……
난 왜 어이타가 이렇게 먼 아르헨티나까지, 떠나와 살게 되었을까?
눈 밑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아릿했다. 눈물이 쏟아져 내려 아이 업은 손으로 번갈아 닦아냈다. 별도 반짝이고 바람도 시원한 밤에 아가 숨소리를 들으며 평화로워야 할 그 시간에 울고 또 울었다.
차츰 가게 손님들을 다루는 법도 익히며 씩씩해져갔다. 스페인어 제대로 못하는 한국여자라고 얕보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거나 업신여기는 아르헨티나 남자들과 당당히 맞서 싸우기도 했고, 도둑질 해가는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에겐 나도 얼굴 뻔뻔하게 대놓고 제발 도둑질 좀 하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달러파동이 났다.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올랐다. 도매상에서 물건을 해와 가격 붙여 팔고, 다시 사러 가면 두 세배 올라있어 손해 볼 때가 더 많았다. 손이 모자라 도무지 젖먹이 딸린 애 엄마 혼자 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었다. 남편은 다른 사업을 벌여 놓아서 나 몰라라 했고, 아주버니가 한다고 차려놓은 가게지만 대학원을 마쳐야 한다며 한국으로 모두 나가버렸다. 달러 파동으로 인한 사회불안으로 여기저기 폭동이 일어나 몽땅 털려나가는 가게도 있었다. 업종을 바꿔야 하는 위기에 있었다.
마침 시아버지와 남편이 산타페 주의 ‘세레스’라는 곳에서 양봉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게를 접고 양봉 일을 도와주게 됐다. 양봉일은 여름 한철 바쁘다. 그래서 그 기간에는 같이 가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며 벌집의 기초인 소초를 나무판에 붙이는 소소한 작업을 도와주었다.
첫 해엔 구두쇠인 시아버지 고집으로 창고 안에 텐트를 치고 지냈다. 침대 대신 빈 벌통을 깔고 시아버지와 남편과 아들과 한 텐트에서 지내야 했다. 너무 더운 여름이지만 밤엔 온도가 내려갔기에 참을만했다.
창고 주위는 지평선이 보이는 갈대밭이었다. 화장실이 따로 없던 터라 들판에 삽으로 흙을 퍼내고 널빤지 두개를 얹어 놓은 게 다였다. 하지만 그 곳은 뱀이 우글거리는 지역이었다. 볼 일보러 갔다가 몇 번 뱀과 맞닥뜨리고 난 뒤엔 도저히 갈 엄두가 안나 심한 변비로 고생해야 했다. 겁 많은 날 이해 못하는 시아버지와 남편은 따로 화장실을 만들 생각을 안했다. 그래서 주말에 쉬는 때에 도시로 나가 커피숍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외딴 곳에 외국인 젊은 여자와 아이만 있다는 것은 공격 목표가 될 수 있기에 시아버지와 남편은 창고 문을 아예 밖에서 커다란 자물쇠로 잠그고 갔다. 갈대밭 가운데 있던 창고라 흙바닥엔 많은 개미굴이 있었다. 야외용 버너로 닭도리탕을 하다 국물을 바닥에 조금 쏟았었다. 그걸 기억 못하고 있다가 어두운 조명 때문에 국물 때문에 모인 개미떼를 발견 못하고 밟았다. 푹신거리며 밟힌 개미떼에 무릎까지 빠졌다. 그로인해 급성 알레르기가 되어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었다.
양철로 만들어진 창고는 한 낮이 되면 달궈져서 가만히 있어도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입을 수 있는 옷은 땀 흡수가 잘되는 면 밖에 없다. 그래서 회색 티는 해마다 쫓아가서 내 몸에 걸쳐졌다.
둘째를 임신해서 산달이 가까워 올 때 여름이 와서 시골로 내려갔다. 꾀도 나고 가기 싫어하니 창고 생활은 면해서 집을 얻게 됐다. 하지만 너무 작은 집을 얻어서 화장실 문이 변기에 걸려 제대로 다 안 열렸다. 그래서 들어갈 때마다 불룩 나온 배가 문손잡이에 자꾸 걸렸다. 게다가 부엌 시설도 없어서 그 좁은 화장실에서 설거지도 해야 했고, 빨래도 해야 했다. 좁은 화장실에서 나온 배로 쭈그리고 앉아서 빨래를 한다는 게 만만치 않았다.
아프리카 살인 벌과 교미가 된 아르헨티나 벌은 사나왔다. 그래서 우주복처럼 철망이 달린 작업복으로 완전무장 해야 한다. 40도에 육박하는 후덥지근한 여름날씨에 그 옷을 입고 일한다는 것은 한증막 환경과 같다. 땀으로 젖은 옷은 벌의 공격성을 높였다. 그래서 오전 오후 갈아입어야 하기에 매일 두 번은 빨아줘야 일을 할 수 있었다.
임신한 배가 딴딴하게 굳고 몸이 무겁게 느껴진 어느 날 빨래는 밀렸지만 더위 먹었는지 힘이 없어 좀 쉬고 싶었다. 대야에 빨래를 담고 비누도 풀어놓았다. 한 숨 자고 할 요량으로 누웠다.
첫 애 윤희가 4살 때였는데 한창 장난꾸러기 짓을 할 때였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화장실에서 철퍼덕 철퍼덕 빨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가보니 아들 녀석이 작업복을 질근 질근 밟고 있었다. 비눗물 잔뜩 묻은 내 회색티를 주물럭거리며 장난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 바닥과 벽, 제 옷 할 것 없이 비눗물 투성이였다. 너무 짜증이 나서 다짜고짜 엉덩이를 때려줬다.

“야 이 녀석아 엄마가 지금 얼마나 피곤한데 너까지 말썽이야!”

아들 녀석은 울면서 말했다.

“엄마,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요.”

“엄마가 왜 미안해. 네가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해야지.”

“내가 엄마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려고 엄마 옷 빨아주는데 때렸잖아요.”

코가 찡하며 가슴이 뭉클했다. 고맙고 대견해서 아들 녀석을 안아줬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우리 윤희에게 정말 잘못했어.”

회색 티는 이렇게 많은 장면을 담고 있다. 이미 편하게 입는 면 티가 아니라 이민 생활의 애환이 담겨있는 역사이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지역인 산타페 세레스 지역은 35년 만에 장마가 졌다. 엘니뇨현상이라고 했다. 구릉이 없는 지구 대평원 팜파 지역인 아르헨티나. 사방 물에 잠긴 마을과 목장과 농장은 속수무책으로 물만 빠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많은 소들이 수영장이 된 목장에서 둥둥 헤엄치며 다니다 풀을 못 뜯어먹어 굶어 죽어갔다. 계상이 네 단씩 있는 수 천통의 벌통도 물에 잠겼다. 수 없이 들인 노력과 정성이 물에 다 잠겨버린 것이다.
물이 빠진 벌통은 나무가 뒤틀려 있었고, 그나마 남은 벌은 전염병으로 죽어갔다. 그렇게 양봉도 막을 내려야 했다.
인간의 노력보다 하늘의 처분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농사는 이제 하기 싫다고 남편은 페루로 재이주 한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사고 싶은 것을 사라고 했다. 이미 절약 정신이 몸에 밴 난 무얼 사야할 지 몰랐다. 그래서 옆 가게에서 청바지를 하나 샀다. 팔년 반의 아르헨티나 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돈 주고 산 옷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이민 생활을 마감하는 기념 옷처럼 돼버렸다.

순박한 아르헨티나 교민과 달리 처음 도착했을 때의 페루 교민은 사기성 있는 사람들이 득시글댔다. 나중에 거의 다 다른 나라로 가거나 한국으로 되돌아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난 후였다.
중고자동차 수입을 해서 팔거나 부속을 팔게 되었는데 사람 믿기 좋아하는 남편은 그들에게 사기를 되풀이해서 당하게 되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살았다. 부업으로 교민 상대 비디오 가게를 아파트 거실에 차려서 장사를 했다. 김치, 고추장 된장을 담가 팔았다. 대여해 주려면 복사 본을 떠야하니 이틀을 꼬박 새워서 일을 했어도 어학원 코스를 밟아 졸업도 했고 카톨릭대학 인류학과에 등록해 공부도 했다. 꿈이 컸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중남미 문화 전문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 와중에 참 여러 종류의 인간에 의해 아픔을 당해야했다. 도박에 미친 이웃집 여자들과 사이가 안 좋게 되자 자신들이 해놓은 일을 도리어 뒤집어씌워 욕을 하고 다녔고, 은혜를 베푼 이들에게 수 없는 배신을 당함으로 페루에 와서 난 사회가 무서움을 배웠다.
그래도 가족에 대해 갖는 희망이 있었기에 늘 꿋꿋하게 잘 지냈다.
하지만 배우자의 배신은 너무 열심히 살았던 대가에 찬물을 끼얹었기에 절망을 주었다. 내 마지막 보루인 가정이 흔들리니 살기 싫었다.
죽기를 원하던 나는 맨 발로 절벽 끝에서 센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임신 5개월이었다. 아가는 죽지 말라고, 살려달라고 발길질을 시작했다. 셋째를 임신하고 첫 태동을 그 절벽 끝에서 느낀 것이다. 살려달라고 보내는 몸부림은 전율적이어서 목숨을 놓기가 어려웠다. 아가에게 너무 미안해서, 못난 내 자신이 비참해서 서러운 눈물이 쏟아졌다.
이래도 살아야 하는구나.
왜,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내가 이러고 있을까?
'페루가 싫다.'
돌아가자. 한국에 가면 내가 편히 살 수 있는 공기와 따스함을 주는 내 핏줄이 있잖아.
남편이 용서를 구했다. 용서가 안됐지만 아이들을 버리고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사는 것이란 그저 살 수 있는 것이다.
남편은 사업의 근간이 여기라는 이유로, 이미 커버린 아이들은 학교 문제로 한국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나 하나 희생하고 살면 여럿이 행복한데…….’ 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엄마와 아내 자리에 있기로 했다. 그러나 우울했다.
산다는 것과 살아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한 번 시작된 우울의 늪은 때때로 날 아프게 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서 그랬는지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철이 일찍 들었다. 말썽을 부리는 것도 없었다. 무엇을 하든 엄마를 위해서, 맛있는 것이 있으면 엄마 준다고 들고 왔다. 어찌 보면 철없는 엄마와 애어른 같은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내 맘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내게 기쁨이 되어줬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잘 자라주었다. 아이들은 이 부족한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에 보답해 정말 이제는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
아들 윤희가 중학생 되던 어느 날 회색 티를 발견했다. 맘에 든다고 자기가 입는다고 했다. 녀석이 뱃속에 있었을 때 입고 찍었던 사진을 보여줬다.

'와~ 이거 엄마가 나 뱃속에 있을 때 입고 계셨던 거예요?'

녀석은 그 옷에 대한 의미를 아는지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며 동생에게도 물려준다고 아껴 입었다.
이제 아들 녀석은 키가 180센티를 바라보는 고등학생이다. 그 티는 작아 보이고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둘째 딸이 입는다고 제 방으로 챙겨서 갖다 놓고 한동안 입고 다녔다.
그렇게 아이들을 거쳐 내 방 옷장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
옷 정리를 다 끝내고 19년의 역사를 가진 회색 면 티를 입어본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떠나며 사 입은 10년 된 청바지를 꺼내 입는다.
요새 유행은 밑이 나팔모양으로 넓어지거나 통바지인데 이건 그냥 좁다고 느껴질 일자바지이다. 그래서였는지 이젠 외출복보다는 그림을 그릴 때 작업복으로 입게 된다.
오랜만에 그림이나 그릴까?
남반구 페루 리마는 봄이다. 그러나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의 안데스는 계절이 없다. 흙먼지만 일으키는 메마른 산이다.
수원은, 월악산은, 남이섬은 가을이겠구나.
한국 방문이 주로 여름이나 겨울에 행해졌기에 가을을 못 본 지가 벌써 19년 된다.
가을 풍경이 떠오른다. 그 이미지가 날 사로잡는다.
온 산야를 울긋불긋 물들이는 단풍. 노란 은행나무, 주렁주렁 탐스러운 감나무, 아람열린 밤송이, 바람에 흔들리던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벼이삭들, 풍성한 내 고향의 가을이 사무친다.
구석에서 먼지 쌓여 있던 이젤을 꺼내고 유화물감들을 꺼낸다. 나무 팔레트에 먼저 갈색과 진초록을 짰다. 숲 배경을 먼저 그려본다. 고동색과 노랑색, 빨간 단풍 가지를 표현해본다. 온 산에 열매가 가득이다. 알록달록 번지는 산과 들이 감동이다.
그리다 노란 은행잎 물감과 자주 단풍이 바지에 묻어버렸다. 이왕 버린 김에 붓에 물감을 잔뜩 묻혀 바지에 쓱쓱 문질렀다.
화판과 청바지에 단풍이 들었다. 고향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가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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