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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왕 중 왕, 아샨티 왕궁 박물관을 둘러보고

새해 초에 가나신학대학(The Bible College of Ghana)의 공무로 가나 북부에 위치한 다몽고(Damong)지역을 다녀 왔다. 수도 아크라에서 15시간 떨어진 거리이므로 무척 피곤하고 힘든 여정이였다.
주요 도로는 가나 정부가 외국 차관을 받아서 중간 중간 길을 잘 닦아 놓아 바람결 따라 신나게 달렸는데, 지방 도로는 탱크가 지나간 바퀴자국처럼 터덜터덜 엮어지고, 큰 우박을 맞은 것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어 허리가 문어처럼 꼬이고 어깨가 덩달아 춤을 추었다. 맞은 편에서 달려 오는 차가 지나가면서 흙 먼지를 일으키면 우리는 눈 뜬 장님이 되었다.

오후 1시에 도착하여 다망고에서 공무를 보고 그 곳 원주민들과 교제도 나누었다. 태양이 빛을 잃어버려 우리는 게스트 하우스에 몸을 기댔다.

다음 날 아침, 다몽고 교회에서 5분 거리에 600년된 라라방가 모스코 사원이 있어 가 보았다. 그 곳에 천사가 직접 계시한 내용을 적은 두루마리가 있다고 했다.
사원에는 예배드리는 금요일만 들어갈 수 있는데, 안에는 남자들만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여자는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쳐다 볼 수는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2분 거리에 고구려의 고인돌처럼 생긴 둥글고 넓적한 큰 돌이 길을 정면으로 막고 있어 길이 갈대허리처럼 휘어졌다. 그 돌을 지키는 자가 있어 나는 물어보았다.
정부에서 도로를 일자로 낼려고 그 돌을 다른 곳에 갖다 놓으니, 다음 날 다시 원위치에 돌이 와 있어 ‘이상하다’ 생각했다. 다시 마을 주민들이 그 돌을 10m 떨어진 곳으로 옮겨 놓으면 또 원 위치로 와 있어, ‘참, 이상하다’ 생각하고, 그 날 저녁은 마을 청년 3명을 그 돌 옆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지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 청년들은 사라지고 없고, 그 돌은 원 위치로 와 있어 할 수 없이 그 돌을 피해 도로를 내어 도로가 C자로 휘어졌다고 모슬람인이 말했다.

가나는 아직까지 토속신앙이 40%이므로 가나 저변에 깔려 있어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다. 아프리카 가나는 역시 아프리카 가나인 것이다.

1월 4일 수요일. 햇님도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황금빛으로 넘실거렸다. 그 속에서 우리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여러 가지 행사를 치렀다.

태양이 익을 대로 익어 찬란하게 피어나는 가운데 3박 4일의 여정 속에서 스케줄대로 움직였으니 몸은 절인 파김치가 되었다. 차를 타고 아크라로 내려오는 데 뇌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가나에 살면서 가나 역사를 이론으로만 알았지. 유적지나 박물관을 찾아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내려가는 길목이니, 조금만 시간을 할애하면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육은 피곤하지만 정신에게 만족감을 불어 넣기 위해 가나를 18~19세기 지배한 왕, 왕 중의 왕이라는 아샨티 왕국의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나 공화국은 13세기까지 수단 서부에서 융성했던 고대 가나 제국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주로 숲과 해안지대에 거주했던 아칸족이 13세기경 그들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 가나 역사에서 가장 힘센 부족에 속하는 아칸족의 갈래인 트위어계 아샨티족은 중부 삼림지역에서 일어나 강력한 중앙집권왕국을 세웠고, 18∼19세기 전성기에는 영토가 동쪽의 토고 산맥에서 서쪽의 코모에 강까지 미쳤다. 그 위세에 뒤지지 않게 아샨티 박물관과 여러 전시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산티 박물관은 수도 아크라에서 5시간 거리인 쿠마시(Kumasi)에 위치해 있다. 쿠마시는 현재 가나의 두 번째 도시이며, 아크라 수도 이전의 가나 수도였다. 이전의 수도답게 쿠마시는 인구도 많고 시장과 거리가 복잡했다.

쿠마시 시장이 뱀처럼 휘어져 있어 간신히 빠져나와 아산티 왕이 사는 왕궁으로 달려 갔다. 시야에 드러난 것은 철로 문양을 만든 왕궁 울타리가 드넓게 쳐 있고, 그 안에는 박물관과 왕궁이 보였다.

가나는 1957년 3월 7일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대통령중심제지만, 가나를 힘있게 지배해 온 왕국 아산티 왕을 아직까지 가나인들은 존경한다. 그래서 쿠마시에서 1년에 한 번, 아샨티 축제가 열린다. 그 행렬은 형형색색으로 무척 화려하여 아산티 왕국의 부귀영화를 만껏 선 보인다.

가나는 황금의 나라이다. 현재에도 아샨티 왕은 금광을 가지고 있어 부가 넘쳐난다. 아샨티 왕이 거주하는 왕궁은 신성시 여기므로 누구도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도 아쉽지만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나는 관광지나 유적지 어느곳을 가든지 외국인은 가나인보다 2배 정도 비싸게 입장료를 받는다. 하물며 병원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와 선진국과는 차이가 있다. 가나는 GDP가 $400이므로 국민 소득이 적어 빈곤한 삶을 살아가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입장료를 원화로 계산하면 1인당 3,000원 정도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뜰 안으로 들어가니 규모가 아담한 박물관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역대 아샨티 왕들과 왕족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각 방마다 그득했다.

그 중에서 흥미로운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영국이 가나를 1874년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1901년 아샨티 왕국을 영국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지배국인 영국이 아샨티 왕이 앉은 의자가 탐나서 영국으로 가져 갔다. 그 후 가나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아샨티 후손들이 수 차례 왕의 의자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의 지방박물관에서는 매 번 거절을 했다. 결국에는 아샨티 왕이 영국 지방박물관에 거액을 지불하고 그 의자를 구입해 돌려 받았다고 한다.

이어서 영국이 아샨티 부족을 점령한 후 금이 가득 채워져 있는 금항아리를 침탈해 갔다. 그 후 그 항아리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니 금은 다 사라지고 없고, 금 항아리도 겉표면의 금은 다 도려내가고, 볼품없이 동만 드러난 항아리만 보냈다고 안내자가 말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이상하게 생긴 항아리가 내 시야에 드러나 안내인에게 물어 보았다. 그 항아리는 아샨티 왕국의 한 대제사장이 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 속에는 아샨티 왕국의 영혼들이 들어 있기에, 그 뚜껑을 여는 순간 아샨티 왕국은 멸망 당한다는 경고를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 속을 들여다 본 사람이 없기에 아직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일이지만 이들은 그것을 믿고 신봉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아샨티 왕국는 왕의 부인들이 왕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왕으로 등극하면 자동적으로 선대 왕의 부인들과 결혼해야 한다. 그 부인들은 모두가 현재 왕의 부인이 된다. 그래서 아샨티 왕은 몇 십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다.
그 여파로 왕은 부인들의 시샘과 질투에 싸여 항상 독극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왕의 음식은 부인들이 만들 수 없다고 한다. 어느 누가 독을 넣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남자 주방장의 관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왕의 음식을 만들며, 그 음식을 검사한 후에 왕에게 올렸다고 한다. 이 점은 우리나라의 조선 역사와 비교해 볼때 비슷하다.

왕은 권위 의식때문에 회의 중이나 귀빈이 방문하더라도 왕이 직접 대화하지를 않는다. 항상 옆에 대리인이 있어 왕이 말하면 그 말을 전해 주고, 상대방이 말하면 그 대리인이 다시 왕에게 전달한다.

또한 왕이 무엇인가? 잘못을 했을 때에는 오직 왕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며 불호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퀸 어머니(Queen Mother) 뿐이다.
Queen Mother 는 그 ‘부족의 어머니’란 뜻이다. 그래서 왕의 행차할 때에는 4명의 건강한 장정들이 가마를 어깨에 메고 운반한다. 그런데 Queen Mother이 행차할 때는 4명의 장정들이 양 사방으로 된 가마 다리를 장정들의 머리에 이고, 가마를 운반한다.

가마의 운반 과정에서 어깨의 운반과 머리의 운반은 차이가 있다. ‘머리는 상징적으로 존귀하다’는 의미이므로 ‘Queen Mother에 대한 신뢰와 존경의 표시’ 이다.

전 대의 왕들을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 실물처럼 전시한 방과 사진들, 가구, 유품들을 이 방, 저 방 둘러 보았다. 인간사는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나 같다는 것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곳을 벗어나 코코 지역에 도착하니 어느덧 석양이 스러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눈에 선명하게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산 티코 차들이였다. 티코 택시들이 연꼬리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기름값 절약과 도로 면적을 적게 차지하는 서민들의 차, 티코가 가나의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어 귀가하는 길이 흐뭇했다.

검은 밤이 가장 깊게 빛을 뿜어낼 때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안식처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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