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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Richard? 안녕하세요. 선생님?’ -꾸러기 '천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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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Richard? 안녕하세요. 선생님?’ ‘Good morning Richard 목사님? 안녕하세요 집사님?’ 10 년 전 뉴질랜드 봄 하늘 아래서 나누던 리챠드 목사님과 나와의 첫 인사다. 리챠드 목사님은 첫 인상이 전형적인 키위(뉴질랜드 사람을 지칭하는 말)였고, 친절하고 말쑥한 영국 신사였다. 1997 년 추석을 일 주일 앞둔 초 가을… 남편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맏이가 어딜 외국에 나가 사냐며 이민 가기 싫다고 3 년을 버티다 끌려온(?) 그 서럽던 가을… 끝내는 시어머님까지 아들에게 항복당하고, 따라가서 임자님 아들 밥해 주라고 등 떠밀려 온 곳이 바로 제 2 의 고향 뉴질랜드이다. 영어를 굉장히 잘 하는줄(?) 알았던 남편을 따라 당시 6 세 8 세인 두 아들을 데리고 첫 발을 디딘 곳은 교민 한 가정도 없는 외딴 도시 마타마타란 곳이다. 오자마자 관광객 상대 휴게소를 운영했는데 두 달 만에 IMF 를 맞아 가게는 문을 닫고 난 아무하고도 말 할 상대가 없는 낯설고 외로운 이민살이를 시작한다. 진실한 크리스챤이 되기를 소망하는 나는 차로 1 시간을 달려가야만 하는 해밀턴 한인교회를 매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다녔는데…바로 이때 만난 키위 목사님이 리챠드 로렌스 목사님이다. 목사님은 이미 내가 이민 오기2 년전부터 키위와 한인이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으로 살아가는 독특한 우리 교회의 특성상 한국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영어로 인사해도 우리말로 대답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아는 문장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지만… 이러면서 목사님은 본인이 시무하는 교회의 한 부서인 한인파트가 점점 커지고 이민이 활성화 되면서 한국 교인도 늘자 아예 목사님은 우리를 돕기위해 영어선생님이 되는 티솔코스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된다. 이 당시 회화 준비없이 갑자기 끌려온 내 영어 수준과 목사님의 한국어 수준은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둘 다 겨우 서로 다른 언어로 간단한 인사말 밖에 할 줄 몰랐으니까… 이때 우리의 첫 번째 관계는 키위 목사님과 한인 성도였다. 이러는 사이 난 2 년간의 마타마타에서의 한 가정뿐인 외롭고 서러운 교민 생활을 접고 해밀턴으로 이사를 왔고 곧바로 와이카토 한국학교에 교사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그 이후 난 교민끼리 만나 예배드리는 일요일만 기다리는게 아니라 토요일도 기다렸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학교는 토요일만 운영하는 주말 학교였기 때문이다. 토요일 아침,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가르치고 또 열심히 배우려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을 보노라면 내 막힌 언어의 장벽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낯선 나라에 아무 준비없이 무조건 남편만 믿고 따라온 내 불찰도 크겠지만, 정말 나이먹어 영어를 배우고 다른 언어로 말하며 살려하니 고역이었는데…바로 토요일만 되면 살 맛나는 내 세상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아교육학을 전공하고 현장에 10 년간 근무하다 온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언어장애 중증에 해당되는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아줌마일 뿐이었다. 그러나 토요일 오전은 우리말로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글과 말을 가르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모든 고충이 몽땅 해소되는 정말 유쾌한 시간이었다. 학교 교사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맘으로 시작하는게 일반적인 일이지만 나는 먼저 내 기쁨에 토요일을 기다리는 철부지 교사였던 거 같다.ㅎㅎㅎ 단, 후회가 되었던건 유아교육 자료를 몽땅 고국에 헌납(?)하고 온 일이다. 그것은 교재 부재의 현장을 만날 때마다 늘 느끼는 안타까움이었다. 그 이후 누군가 이민을 간다고 하면 꼭 본인 전공과 관련된것은 챙겨가라는 당부까지 하게 되었으니 그 아쉬움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가리라 본다. 나와보니 우리 고유의 것이 가장 소중하고 언어 장벽으로 쓸데 없을거라고 여겨졌던 내가 배운 지식이 얼마나 고마운지 새삼 깨달았으니까… 난 해밀턴에 올라온 이후 학교 봉사와 함께 가장 먼저 한게 영어 공부였다. 이솔코스 (ESOL-English for Speakers of Other Languages)라고 아줌마들이 배우는 기초반에서 영어를 배우는데…아무리해도 현장 영어는 늘지 않고 책상 영어(?)만 느는 한심한 날 보며 다시 유치원 자원봉사를 시작했다.마타마타에서도 가게가 문을 닫고 아무 대책없던 상태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1 년 파트타임 일까지 하다 온 경험이 있기에 또 어느 유치원을 선택해 회화도 배울겸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운 도둑질(?)이 이것이고 또 우리나라와 뉴질랜드 유치원은 어떻게 다른 유아교육 제도를 갖고 있나 싶어 배우려고 도전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난 자원봉사와 동시에 대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목사님은 티솔코스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2001 년 8 월 우리는 다시 한번 관계 개선을 하게 된다. 목사님이 지금까지 20 여년간 하시던 목회를 잠시 멈추고 대학교로 들어가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님이 되는 길을 결정하게 된다. 한국사람의 상식(?)으로는 목회자가 다른 길로 가는게 이해가 잘 안가지만 아무튼 여기는 종종 있고 또 우리처럼 크게 놀래지도 않는다.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시며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니 지금까지 지내던 것처럼 친구로 잘 지내자’는 말씀을 남긴다. 이때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어 목사님은 학교에서 난 유치원에서 근무를 하며 만나게 된다. 두 번째 관계다. 목사님이 학교로 돌아가던 그 해 난 하나님 은혜로 자원봉사를 하던 유치원에 풀타임 교사로 취업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는데… 말 한마디 서투른 나로선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아는 이 직업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아니, 내가 교사와 아이들로 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었으니 아무리 이 분야에 10 년 넘게 있었어도 눈치의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목사님에게 개인 영어 지도를?’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당시 목사님은 윈텍이라는 대학에서 인기(?)있는 영어 교수님 이었는데 내 특별한 부탁에 허락을 하시고 나와 개인지도 영어 선생님이란 또 하나의 관계를 갖게 된다. 난 한국어를 가르쳐 드릴테니 나에게 유치원 교사로서 정말 필요한 가르치는 영어를 알려 달려며 ‘목사님은 교사를, 난 제자’가 되는 길을 택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이 것이 세번째 우리의 관계였다. 이렇게 영어공부를 하는 사이 답답하기가 이를데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차라리 목사님이 한국어를 배워 대화하는게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바로 이 때 나에게 한국학교 봉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준 기회가 생겼다. 지금부터 3 년 전인 2003년 여름, 한글학회에서 주관하는 ‘국외 한국어 교사 연수회’에 뉴질랜드 대표로 참여하는 기회가 온 것이다. 2 주일간 각 나라에서 참가한 40 여분의 선생님들과 함께 연수를 받으며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인 우리 한글의 재 인식과 학교봉사에 대한 내 인생의 커다란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그래서 돌아오자 마자 조금은 안일하게 하던 교사 생활을 접고 보다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한국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이 당시 난 학교 교장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민역사가 10 년도 채 되지 않으며 또 해밀턴 교민수도 많지 않았기에 우리 학교 규모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가족처럼 그렇게 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연수는 내 생각을 완전 뒤집어 놓는 기회가 된 것이다. 열심히 하면 학생이 더 늘 수도 있고 우리말을 배우고자 하는 차세대 꿈나무들에게 더 다양한 기회를 제공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행사나 학교 학습 목표등을 수정하고 여러가지 계획을 갖게 되었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바로 우리 한국학교에 외국인반을 만들게 된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가르쳐 우리의 말과 얼을 알게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외국인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쳐 아직도 6,25 이후의 자기네 나라가 도와준 그런 가난하고 낙후된 한국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우리나라를 바로 알리고 싶었다. 그 결과 지금의 로미오반이 생겼고 일 년 뒤 이어서 중급반인 줄리엣반이 생긴다. 이 때 목사님은 당연히(?) 우리 학교 외국인반 학생 1 호로 등록하였고 나는 교장선생님 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네번째 관계 개선이다. 올 초 …우리 학교는 커다란 위기를 맞는 사건이 발생한다. 외국의 여느 주말학교가 그렇듯 우리도 토요일마다 현지 초등학교를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그만 그 임대료를 7 배나 기습 인상하는 11 년 역사이래 최대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난 40 일 금식기도를 하며 해밀턴 시내 초,중학교 2 8 곳에 학교 렌트를 알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득보다 실이 많은지 이런저런 핑계를 되며 돌아오는 답글은 모두 NO 였다. 그동안 사용했던 학교에서 요구한 임대료는 우리학교 일 년 예산이었으니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게 된 것이다. 이 때. 목사님은 기도하는 나에게 용기주시며 본인이 따로 학교를 연결해 교장도 만나고 약속도 받아내며 함께 학교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치 본인이 집에서 쫒겨나게 되어 자신의 집을 찾듯이… 고등학교도 알아보고 교실 7 개와 교무실 강당을 수용할 수 있는 각 단체나 교회에 편지도 보내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러시며 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늘 ‘미안하다’며 실망하지 않도록 날 위로하고 또 위로한다. 이제 우리는 사용하던 학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날이 일 주일 앞으로 다가온다. 내 마음은 한 데로 나 앉게 될 우리 아이들 생각에 하루종일 눈물이 마를길이 없고, 유치원 근무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게 학교 찾느라 유치원 아이들 수업 중에도 어디 우리가 공부할 만한 장소만 있으면 알아보러 나오는 일을 반복한다. 이 때 바로 텀 종강식 전 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교회를 빌리는 일을 리챠드 목사님께서 해내신다.아멘. 여러 절차를 밟아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우리의 상황이 너무 긴박해 그만 급행으로 해결을 해주신다. 정말 할렐루야가 저절로 나온다. 목사님이 시무하던 교회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뛰시는 모습에 키위들이 감동했나보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학교를 교회로 옮긴 어느 날 아침,교무실 문이 안 열린다. 남자 선생님들까지 동원해 씨름을 하는데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열쇠로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봐도 열리지를 않는다.목사님이 오셔서 한번 더 시도를 해보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이 때 목사님이 한 마디 하는데 모두 까르르 넘어갔다. ‘우리 다같이 도둑이 되자’하시며 쳐다 보았기 때문이다. 함박웃음을 띤 모든 교사는OK 싸인을 주고 차로가서 연장을 가져다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곧 수업 시간인데 아침 교사회의는 커녕 교무실 문도 못 열게 되었으니 비상 수단을 강구한 것이다.그 날 목사님은 번호가 달린 새로운 열쇠와 자물쇠를 사다가 집에서 드릴을 가져와 교무실 문을 고쳐주었다. 내 집처럼! 이 또한 얼마나 감사했는지… 그 이후 우리는 지금 11 년간 5 번째 이사다닌 아니, 쫓겨다닌 학교 중에서 가장 편안하게 공부하고 있다. 현지학교가 아닌 교회다보니 아이들 책상 속 물건이 아예 없기에, 망가지거나 없어지는 일로 항의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개학식 첫 날, ‘우리가 사용하는 학교는 내 학교가 아니니 그 어느 것에도 손을 대거나 만지면 안 된다’는 신신당부의 말을 안해도 되니 지금의 학교 상황이 너무나 감사하고 선생님들 또한 만족해한다. 이럴수록 난 더더욱 뒷처리를 열심히 하고 토요일 수업을 마친다. 늘 그러듯이 모든 이를 섬기는 교장이 되기를 바라며… 리챠드 목사님은 3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학교에 잘 다니고 계시며 오늘도 반갑게 인사를 한다. ‘교장선생님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네. 조금 피곤했지만 잘 지냈어요. 리챠드 목사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는 아침에 4 km 마라톤을 하고 왔어요.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이어지는데… 10 년전,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란 단어밖에 모르던 목사님. 이제는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메일을 주고 받는 사이로 변했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우리학교 교훈 중 하나가’ 한국인으로 뉴질랜더로 세계인으로’이다. 그 누구보다 한국에 대한 사랑이 넘치며 모든 한국 음식을 좋아하지만 특히 설렁탕을 즐겨 먹는다는 목사님에게 ‘뉴질랜더로 한국인으로 세계인으로’란 교훈을 드린다면 어떨까! 목사님으로, 친구로, 선생님으로 이제는 매 주 토요일 아침 키위 커피를 타다주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인 리챠드 목사님에게 이 뉴질랜드의 맑고 푸르고 드넓은 화창한 봄 하늘 만큼이나 우리말과 글이 늘기를 소원한다. 아래글은 목사님이 지난 주말에 보낸 편지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음악을 듣고 있어요. 오늘은 어머님을 만나고 슈퍼마켓에 갔어요. 내일 비가 오겠어요 (?) 이번 저녁에 할 일이 많아요? 벌씨 10 시가 됐어요!!! 한국어는 재미있지만 아주 어려워요. 한국어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님. 리차드 드림. 어느날 한복이 예쁘게 장식된 작은 엽서를 한 장 내 보이신다. ‘저…교장선생님…이 엽서를 제가 만들었는데요, 학교 기금 마련을 위해 만들어 팔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또 하나의 감동을 낳는 순간이다. 내 눈은 이내 한없는 한국어 사랑을 넘어 우리 한국학교, 더 나아가 한국을 사랑하는 그 분의 파란 눈 망울로 빠져 들어간다. 사랑과 감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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