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7월 26일)은 이 글쓴이 성(姓)씨의 본향
종친회(정식 명칭으로는 대종회)에 다녀왔습니다.
대종회 신주(信柱) 회장이 편찮으셔서,
주희(周熙) 회장 대행 체제로 운영이 되고 있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주희(周熙) 회장 대행 홀로 고군분투하시던데,
청년 세대의 분발이 더욱 요구됩니다.
유명인들을 적잖이 배출한 성(姓)씨입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실감이 나지 않으실 것이고......
유명 영화배우 강석우 종친도
신천 강씨입니다.
(대종회 사무실, 왼쪽부터)복창(福昌) 부회장, 주희(周熙) 회장 대행, 글쓴이, 창섭(昌燮) 부회장
주희 회장 대행께서 이 글쓴이에게
문중 일원으로서 다방면에서 일을 많이 한다고,
격려하시며, 복어 불고기로 푸짐한 점심 대접을 해 주시고
일필휘지 문장을 두 개나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래에 이 글쓴이가 원문과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世事難成 渴求卽得
海崗
세사난성 갈구즉득
(세상 일이 이루기 어려우나 갈구한 즉 얻을 것이니)
해강 강주희 씀
주자권학문(朱子勸學文)
少年易老 學難成
一寸光陰 不可輕
未覺池塘 春草夢
階前梧葉 已秋聲
海崗 康周熙
소년이노 학난성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나니)
일촌광음 불가경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길소냐.)
미각지당 춘초몽
(뒤뜰 연못가의 봄풀은 아직 꿈도 깨지 않았는데)
계전오엽 이추성
(뜰앞의 오동잎은 이미 가을 소리를 내더라.)
해강 강주희 씀
☞주자권학문(朱子勸學文) : 주자라 불리던 주희(1130~1200)의 글이다.
남송 때의 사람으로 이학(理學)을 집대성하여 유교에 철학적 기초를 부여한 인물이다.
(왼쪽부터)복창(福昌) 부회장, 창섭(昌燮) 부회장, 주희(周熙) 회장 대행, 글쓴이
대종회 살림살이를 도맡아 처리하는 장 여사
간만에 종친 어른들을 뵙고, 한 조상을 근간으로 뿌리를 뻗어온
혈육의 정(情)을 거듭거듭 느꼈습니다.
이 글쓴이가 성(姓)씨의 본향을 방문하던
하필이면 그날, 대한민국 뉴스에는 족보 사기단 소식이 떴습니다.
기분이 씁쓸하더군요.
아니 씁쓸한 게 아니라
기분이 정말 분노(Anger) 수준으로 치달았습니다.
희귀 성씨를 가진 사회 지도층 인사 8000여명에게
가짜 족보책을 만들어 팔고 문중 발전기금 명목으로
14억여원을 가로챈 15명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겁니다.
이들은 피해자들이 그동안 종친회 일에 소홀한 점을 강조하고
'우리가 희귀 본관인데 호주제 폐지로 여자 성을 따르게 하는 추세 때문에
대(代)가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며 강권하는 수법을 썼답디다.
이 글쓴이는 이런 뉴스를 들으면 거의 돌 지경이 됩니다.
조상 어른들을 능멸하고 조롱하는 짓들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야, 이 사기꾼 놈들아, 너희들은 종친이 없더냐?'
지하에 계신 그쪽 선조님들이 끌끌 혀를 차시며
그렁그렁한 눈물로 가슴 아파하시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그러거나말거나, 오늘도 지구는 돌고 지구촌은 뉴스로 넘쳐납니다.
런던하계올림픽경기대회 축구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멕시코와 0:0으로 비겼고,
북한 지도자 김정은 부인은 이설주로 밝혀졌으며(참 나, 이런 것도 뉴스라고),
중국에 감금 중이던 김영환 씨는 전기 고문을 당했다고 발언했으며,
대한민국 통진당은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던 의원 나리 제명에 실패했으며,
이 글쓴이는 고공 행진 중인 대한민국 폭염 속에서 빌빌대고 있습니다.
인천국제공항 도착 시엔 예상보다 한국 날씨가
그렇게 후텁지근(0, 후덥지근X)하진 않더니,
요즘 바짝 덥네요. 모두 건강 챙기시기 바랍니다.
[2012 런던 올림픽 기념 특별 보너스]신천 강씨(信川 康氏) 출신의 체육계 유명 인사들
신천 강씨(信川 康氏), 지구촌에 대한민국의 강렬한 상무 정신을 심다!
아래 사진은 신천강씨대종회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 [배경 음악은 베르디(Verdi)의 개선 행진곡(Grand March)이다.]
1. 강세철(康世哲)
(1950, 60년대 대한민국 프로 권투 선수이며 대한민국 최초로 동양 챔피언 등극)
◇ [동양복싱연맹(OBF)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강세철 선수(1927년~2007년 5월 24일)]
인터넷의 위키백과에 언급된 강세철 선수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강세철(康世哲, 1927년~ 2007년 5월 24일)
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최초로 프로 복싱 동양 챔피언을 지낸 전직 복서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1942년 전라남도 목포시로 이사했고, 정광중학교를 나왔다.
힘이 넘치는 펀치를 무기로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무적의 중량급 복서로 이름을 날렸다.
강세철은 1960년 10월 대한민국 미들급 5대 챔피언에 오른 데 이어
그 다음 달엔 1960년 11월 20일 서울 운동장 야구장 야외에 마련된
특설 링에서 필리핀의 러시 메이온을 5회 1분 52초만에 케이오로 눕히고
당시 신설된 동양복싱연맹(OBF) 주니어 미들급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는 대한민국 프로 복싱이 국제 무대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요컨대, 김영삼 대통령의 '대한민국의 세계화 선언'이 나오기 한참 전에
바로 이 강세철 선수가 이미 대한민국 세계화의 선구자였다는 말이 된다.
신천 강씨(信川 康氏) 대종회의 일원인 글쓴이에게는
참으로 한없이 가슴 벅차고 자랑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강세철 선수의 젊은 날의 초상이
아래 일본의 리키도잔(力道山=역도산)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등과 찍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 [빛바랜 사진 속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는 강세철 선수의 젊은 날의 초상]
강세철 선수는 은퇴 후인 1960년대에
명동과 서울역 주변에서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 복서로 이름을 날린
그의 둘째 아들 허버트 강(본명 강춘식=康春植)의 매니저로서
기어코 아들을 동양 챔피언으로 만드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어쩌면 그렇게도 부전자전이라는 사자성어가 기가 막히게 딱 들어 맞는지.
2. 허버트 강(Herbert Kang, 본명 강춘식=康春植)
(1960, 70년대 대한민국 프로 권투 선수이며 아버지에 이어 동양 챔피언 등극)
◇ [동양복싱연맹(OBF) 페더급 챔피언 허버트강 선수(1947년 8월 3일~ )]
허버트란 이름은 부친이 존경하던 휴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
미국 부통령의 이름을 비슷하게 따서 부친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라고 하는데,
인터넷의 위키백과에는 유감스럽게도 허버트강 선수의 이력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 [출국을 위해 김포국제공항(당시엔 인천국제공항이 없었음) 국제선 청사에 선 허버트 강 선수(가운데)]
1970대 말 파나마의 파나마시티 현지로 날아 가,
11전 11승 11케이오승으로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던
파나마의 '지옥에서 온 악마' 엑토르 카라스키야(Hector Carrasquilla)를
4전 5기 끝에 3회 케이오로 때려잡고 WBA(세계권투연맹) 주니어 페더급
초대 세계 챔피언에 올랐던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 권투 선수 홍수환(洪秀煥) 씨는
언젠가 중앙 일간지를 통해서 허버트 강 선수를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허버트 강은 권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불세출의 선수였다.
보기 드물게 맷집, 주먹을 다 갖추고 있었다. 상대방의 주먹을 맞아 주면서
질리게 한 다음 한 방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공포의 주먹 소유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초의 동양 챔피언인 강세철 씨이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그가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일본에서 택시를 타고 한국인임을 밝히면 운전사는 대부분 내게 이렇게 물었다.
“‘하바토 고’(허버트 강의 일본식 발음) 압니까?”
◇ [허버트 강 선수는 일본 정벌에 나서 시바타 구니아키(柴田?明)를 6회 케이오로 떡(?)실신시켰다.]
허버트 강은 만나는 족족 일본 선수들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일본 선수가 쓰러지면 카운트를 셀 필요도 없었다.
허버트 강의 경기가 벌어지면 의사들이 링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떡(?)실신한 일본 선수를 들 것에 싣고 나갔다.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허버트 강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 그도 결국 세계 챔피언이 되지 못한 채 동양 페더급 챔피언으로 만족해야 했다.
천부적 재능이 있더라도 연습을 안 하고 노니까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아래 동영상 시작 단추를 누르면
폭발적인 대시가 인상적인 허버트 강 선수 경기 모습을 볼 수 있다.
◇ [1972년 5월 5일 장충체육관에서의 허버트 강 선수 경기 모습.
폭발적인 대시가 인상적으로 검은 팬티를 입은 선수가 허버트 강 선수이다.]
천부적 재능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허버트 강 선수가 세계 챔피언에 오르지 못한 것이
신천 강씨(信川 康氏) 대종회의 일원인 글쓴이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3. 강기욱(康基郁)
(1960, 70년대 대한민국 축구 선수이며 1974년 독일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에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
◇ [맨오른쪽이 강기욱 선수. 그 옆이 변호영 선수와 박수덕 선수.]
강기욱 선수의 선수의 부친이 발산파 집성촌에 살고 있다는
발산파인 글쓴이 부친의 한참 전 증언을 새삼스레 떠올려 보자면 ,
강기욱 선수가 발산파 39世孫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축구 선수로서는 178센티미터의 비교적 단신이었으나 피나는 점프 훈련으로
체득한 엄청난 점프력으로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했다는 증언도 아직 생생하다.
인터넷의 위키백과에는 유감스럽게도 강기욱 선수의 이력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출생년도는 현재 미상이며, 다만 1940년대 중반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1973년 11월 10일 독일(그때에는 그냥 서독)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 예선 (홈 앤드 어웨이) 대한민국과 호주의
2차전 경기가 서울 동대문 운동장(그때는 그냥 서울 운동장)에서 열렸다.
호주 시드니 원정 1차전(10월 28일)에서 0대0으로 비긴
대한민국은 호주를 홈으로 불러 들여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전반 15분 김재한의 선제골과 고재욱의 추가골로
2골을 먼저 넣고도 뒷심을 발휘하지 못해 2대2로 비기고 말았다.
◇ [선제골을 작렬시킨 김재한 선수의 환호도 물거품이 됐다.]
홈 앤드 어웨이가 모두 무승부가 됐기 때문에
FIFA(국제축구연맹)의 결정에 따라
대한민국과 호주는 제 3국인 홍콩에서 재경기를 벌였다.
의기소침한 대한민국은 기사 회생한 호주에게 후반 13분
이세연 골키퍼가 골문에서 조금 앞으로 나와 있는 사이
기습적인 통한의 중거리 슛 결승골을 허용해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1973년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큰 아쉬움을 남긴 해였으나,
어쨌든, 당시 독일(그때에는 그냥 서독)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 예선 경기에 출전한 강기욱 선수의 이름 한자 표기를 중국 기사에서 찾아냈다.
'진주 강씨라니까!' 어쩌고 나올 수 있는 헛소리들을 아예 차단해버리기 위함이다.
아울러, 현재 중국이 사용 중인 한자 간체가, 한자 정체에 익숙한 대한민국 사람들에겐
다소 까다로울 수도 있기에 글쓴이가 친절하게 오른쪽에 한글 번역을 덧붙여 보았다.
1974年第十?世界杯?????(1974년 제10회 독일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1973. 11. 10)
?? 2:2 澳大利?(대한민국 2 : 2 호주)
?球?金在?、高在旭(득점=김재한, 고재욱)
?督:?丙大(감독 : 민병대)
守??:卞?瑛(문지기 : 변호영)
后?:金?坤、?基?、康基郁、朴永泰(수비수 : 김호곤, 유기흥, 강기욱, 박영태)
中?:高在旭、朴秉?(미드필더 : 고재욱, 박병철)
前?:?范根、朴利天、金在?、丁圭?(공격수 : 차범근, 박이천, 김재한, 정규풍)
◇ [중국 신문에 보도된 제10회 독일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출전
대한민국 축구 선수단 명단에 강기욱 선수의 이름이 선명하다]
강기욱 선수는 1976년 홍콩 프로 축구 리그 세이코 팀에 전격 입단했다.
독일에 진출했던 갈색 폭격기 차범근 선수보다 앞서는 역사의 대족적이다.
아래는 강기욱 선수(맨오른쪽)의 홍콩 진출을 보도한 신문 기사 내용이다.
◇ [강기욱 선수(맨오른쪽)의 홍콩 진출을 보도한 신문 기사]
홍콩 프로 축구 리그 세이코 구단의 웹사이트에서 강기욱 선수의 이름 한자 표기를 찾아냈다.
역시, '진주 강씨라니까!' 어쩌고 나올 수 있는 헛소리들을 아예 차단해버리기 위함이다.
세이코 구단의 영문 웹사이트에서는 강기욱 선수의 이름 영문 표기가 Kang Ki-Wook으로 되어 있었다.
◇ [홍콩 프로 축구 리그 세이코 구단의 웹사이트에 소개된 구단에서 활약했던
유명 선수들의 명단에 강기욱(오른쪽 밑에서 9번째)이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4. 강득수(康得壽)
(1980, 90년대 대한민국 프로 축구 선수이며 1986년 멕시코월드컵 본선 무대에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
◇ [어시스트의 달인, 찬스메이커로 불렸던 강득수 선수(康得壽, 1961년 1월 1일 ~ )]
인터넷의 위키백과에 언급된 강득수 선수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강득수(康得壽, 1961년 1월 1일 ~ )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및 지도자이다.
한양공고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81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하였다.
럭키금성 황소(현재 FC 서울)의 창단 멤버로 성인 선수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86 시즌에 K-리그 도움상을 수상하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1990년 프로 축구대회 보도 기사에서 강득수 선수의 이름 한자 표기를 찾아냈다.
이 역시, '진주 강씨라니까!' 어쩌고 나올 수 있는 헛소리들을 아예 차단해버리기 위함이다.
◇ [1990년 프로 축구대회 보도 기사에서 강득수 선수가 개인상 후보로 언급되었다.]
아래는 조광래 전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 공개한 추억의 사진인데,
강득수 선수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서 1986년 멕시코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을 확증해 주는 부인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역사적 증거이자 사료임에 틀림이 없다.
◇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대표팀 선수단 일원인 강득수 선수(왼쪽에서 두번째)가
멕시코 국립 인류사 박물관을 방문, '불의 신' 조각상 앞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오른쪽부터 차범근, 조광래,변병주,이태호, 강득수,유병옥 선수]
[특종]2012년 지구촌 각국, 대한민국 신천강씨대종회 열풍에 휩싸이다!
천사 (2012-07-28 12:09:25)
세상에...어머나...어쩜 이렇게 잘 만드셨대요. 대단하십니다.ㅎㅎ대통령 담화문 사진은 더욱 이색적이네요.^*^
신청 강씨도 있고 진주 강씨도 있는 것을 오늘 알았네요.
암튼 다양한 일을 하시는 옵서버 샘 땜시 다양한 정보를 접합니다. ㅎㅎ
신천 강씨 소개에 앞으로 강샘의 이력도 함께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