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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께 드리는 건의서(초등학교 한자교육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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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께 드리는 건의서
-지금은 초등학교 한자 의무 교육 주장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닙니다!-


나랏일에 밤낮으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숨가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정 운영에 겨를이 없으신 줄 아오나, 자칫하면 이 나라 교육의 뿌리가 다시 한번 흔들릴지도 모르는 중대한 지경을 당하여,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건의를 올립니다.
오늘 아침《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전국 한자교육 추진 총연합회가 전직 교육부 장관을 지낸 분 가운데 13 사람의 이름을 앞세워, 또다시 망국적인 '초등학교 한자 교육' 주장을 되풀이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제 지도층 인사들의 권위를 내세워, 현 정부가 자기들의 건의를 '즉각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땅의 여론 정치, 민주 정치는 실종되고 말 것'이라고, 난데없는 정치적 협박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임 교육부 장관 가운데에서도 7 사람은 이들의 집요한 회유를 뿌리친 것처럼, '초등학교 한자 의무 교육'은 한자의 향수에 젖은 몇몇 사람들의 케케묵은 주장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대다수 국민의 생각도 아닙니다. 이야말로 시대 역행의 대표적인 발상이며, 암기 위주의 교육을 심화시켜 어린이의 창의력을 마비시키고자 하는 죄악입니다. 이에, 그들이 대통령께 '한자를 교육해야 하는 중요 사항'이라고 주장한 내용이 얼마나 궤변과 거짓에 가득 차 있는지, 그 정체를 밝혀 드립니다.

○ '반세기 동안 문자 정책이 실패하여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반문맹이 되었다.'는 데 대하여:
한자를 모른다고 '문맹' 운운하는 이들은 현실 인식조차 없는, 참으로 시대 착오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나라 안의 거의 모든 출판물은 한글로만 씌어져 나오고 있으며, 국민들은 아무런 불편 없이 이들을 통하여 지식과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젊은이들을 '반문맹자'로 몰아부치는 유일한 근거가 바로 신문 때문인 모양입니다만, 고등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제 나라 신문을 제대로 못 읽는다면 그 책임은 신문 제작자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요즘 신문들은 앞다투어 가로쓰기-한글 전용 쪽으로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 '학생들이 한자로 표기된 문헌과 책들을 읽지 못하여 전국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이 사장되어 있으며, 강의를 진행할 수 없는 실정'이라는 데 대하여:
'전국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이 한자 혼용이라는 것은 그들의 착각일 뿐, 그 수는 점점 줄어들어 이제 거의 모든 출판물은 한글로만 쓰여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한자 투성이로 적힌 전문 서적이나 학술 서적이 있다면 이는 일본 서적을 직역하고서도 마치 자기 저서인 양 하는 이들의 죄과입니다. 또한, 한문 강의가 아닌 이상, 한글 세대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한자를 섞어 강의하는 것은 교수 내용보다 권위를 앞세운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 '한자를 모르는 학생들이 사회에 배출되면 고급 지식을 요하는 지식 산업 시대에 그 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다.'는 데 대하여:
이것은 낡은 시대의 권위주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주장의 밑바닥에는 귀족들만이 한자를 즐겨 쓰던 봉건 사회에 대한 향수가 뿌리깊게 박혀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의 밑바닥에는, 옛날 우리말을 '방언'이라 하고 우리 글을 '언문'이라고 하던 한국 사람 아닌 한국 사람의 사고 방식, 일제 시대에 일본말을 '국어'라 하고 우리말을 '조선어'라 하던 그 사고 방식이 그대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자를 아는 것만이 바로 '지성'인 줄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한글 전용은 글장님을 없애고 수많은 정보와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여 전체 국민의 지식 수준을 높여 주었습니다.

○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말로 되어 있어 한글로만 적어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불확실한 어의로 국어 생활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하여:
우리말 낱말의 상당수가 한자말이라는 사실은, 우리말이 한자의 위세에 짓눌려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기를 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컴퓨터가 필기 도구를 대신하는 첨단 정보화 시대를 맞아 한글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문자로 떠올랐으며, 비로소 우리말이 되살아날 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자를 몰라서 낱말의 뜻을 잘 모른다는 것은, 한자에 익어 버린 머리로써 생각해 낸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낱말을 부려 쓰고 있지만 반드시 그 낱말의 어원을 알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원을 알아야만 뜻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은, '텔레비전'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television'을 정확히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억지와도 같습니다.

○ '한자를 섞어 쓰지 않아서 현대적인 학술 용어, 신조어 등을 스스로 만들어 쓰지 못했다.'는 데 대하여:
한자를 쓰지 않으면 새 말을 만들어 낼 방법이 없는 줄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난 봉건 시대나 일제 시대에 한자의 침식으로 순 우리말의 조어법이 쇠퇴하고 그 대신 한자에 의한 조어가 성행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요즈음에는 한자를 거의 쓰지 않게 되자 우리말의 조어법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 도시의 길이름들이 차츰 부르기 쉽고 아름다운 순 우리말로 지어지고 있으며, 젊은 학자들은 한글만으로도 훌륭한 논문을 써 내고 있습니다. 한자에 길들여져 있는 기성 세대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리말의 조어력과 응용력은 뛰어납니다.

○ '동북아 한자 문화권 시대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글 전용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대하여:
중국과 일본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이런 소리가 높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양 3국 너른 줄만 알고 세계 너른 줄은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중국이 쓰고 있는 간체자와 일본이 쓰고 있는 약자가 우리 나라 안에서 쓰이고 있는 한자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자 수천 자를 익힌 사람도 정작 중국 시내에 들어서면 그 흔한 거리의 간판조차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요? 종주국에서도 낡고 불편하여 내다버리고 있는 고전 정자를 우리만이 신줏단지 모시듯 끌어안고 쓴다면, 우리 나라는 그야말로 국제 사회에서 낙후되고 말 것입니다.
초등학교에서의 한자 교육은 절대로 안 됩니다. 이제 와서 초등학생들에게 한자 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키자는 것은 일제 때의 식민지 교육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글 전용의 추세는 봉건적 한자 세대가 물러나고 한글로써 정보와 지식의 민주화·평등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도 북한의 지도자와 역사적인 정상 합의문을 한글만으로 작성함으로써 이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30년 전에 막을 내린 초등학교 한자 교육을 부활하자는 것은, 역사에 대한 중대한 반역 행위이며 어린이에 대한 가혹한 학대입니다. 영어와 컴퓨터까지 필수 교과목이 된 초등학교에서 또다시 한자까지 가르친다면, 어린이들의 정신적 창조 활동은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 앞날의 창조적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첨단 정보화 시대의 현실에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낡은 한자 교육에만 집착하는 일부 봉건 세력의 주장에 나라의 어문 교육 정책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린이들을 자신들의 이익에 이용하려는 무리들의 망동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대통령과 교육 당국이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2002년 4월 10일

한글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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