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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받아쓰기 중

길거리 광고판에서 상점 간판, 안내문, 인터넷 언어, 텔레비전 자막까지
생활 속의 우리말과 글을 통해 생생하게 진단한 대한민국의 국어 솜씨

방송가에서 우리말을 가장 잘하는 남자, 정재환이 길거리로 나선 까닭은?
말의 주체성은 바로 그 나라의 존재의 주체성과 통하고 언어의 질서는 바로 그 민족의 정신 질서와 통한다. 폴란드가 자기 나라 상품에 폴란드어 상표 부착을 의무화하는 것도, 프랑스에서 '프랑스어 정화법' 등을 통해 광고와 상표에서 외국어를 과다 사용할 경우 벌금을 물리게 한 것도, 특히 최근에는 관공서의 문서 등에서 'e-메일'처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영어외래어조차 사용을 금지하고 프랑스 말을 따로 만들어 쓰도록 한 것도 자국의 언어 문화와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국어의 올바른 쓰임을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우리말에 관련된 책을 내왔다. 하지만 일반대중들은 이런 책을 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 먹고 사는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읽어봐야 지루하고 골치 아픈 얘기들뿐이라는 게 우리말 관련서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영어 관련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우리말에 관한 책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2004년 영국의 저널리스트 린 트러스(Lynne Truss)가 쓴, 영어의 올바른 쓰임에 관한 책 (Gotham 출판사)는 작년에 영국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9년 일본에서 출간된 오오노 스스무(大野晋)의 <일본어 연습장 日本語鍊習帳>(岩波書店)이라는 책은 백 수십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다.
‘이상하다, 일본사람들은 이런 책을 왜 읽을까?’ ‘왜 우리는 <한국어 연습장> 같은 책이 없을까?’ 국어에 관한 책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그리도 열심히 읽히고 사랑받는 것이 몹시 부러워, 그것에 자극받아 정재환은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생활현장의 속의 생생한 사례들로 엮은 흥미진진한 우리말 교양서

그는 방송가에서 우리말을 가장 잘하는 방송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런저런 모임이나 단체로부터 우리말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온 그는 어떡하면 사람들에게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게 강연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사진이었다. 말로만 맞춤법이 어떻고 바른 표기가 어떻고 하며 떠드느니 구체적인 사례를 사진자료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끌어가면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차 안에 늘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다니다가 길거리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상점간판이나 안내문, 공공 게시판, 광고판이 눈에 뜨이면 바로 사진을 찍어 모아두었다.

이런 자료들을 강연장에서 풀어놓으니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우선 전에는 강연장에서 졸거나, 따분한 국어 이야기 대신 방송가나 연예인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던 사람들이 시각자료가 동원되니 훨씬 재미를 느끼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연에서 거론되는 사례들이 우리가 매일 일생생활에서 부딪히는 말과 글이다 보니, 이런 얘기는 전문가나 국어학자들이 고민할 문제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바로 나 자신도 결부된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즉 가게간판을 내거는 슈퍼마켓 아주머니도, 차림표를 쓰는 자장면 집 주인아저씨도, 베란다에서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자고 아파트 게시판에 호소문을 붙이는 주부도, 잃어버린 개를 찾는 안내문을 붙이는 중학생도 모두 대한민국 국어의 수요자이고 대한민국 국어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당사자들인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정재환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우리말 글뿐만이 아니라 인터넷 언어, 방송 언어, 텔레비전 자막까지 다루고 있다. 우리가 매일 만나게 되는 생활 속의 문자환경, 언어환경 전반으로 관심의 폭을 넓힌 것이다.




시험점수를 높이는 국어 우등생을 넘어 삶의 질을 높이는 우리말 교양인이 되자

정재환은 이 책에서 대한민국의 문자환경을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우선 바르지 않은 표기와 혼란스런 맞춤법, 외래어와 외국어의 무분별한 수용을 꼽는다. 전자는 표준과 원칙이 실종된 혼란스런 국어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고, 후자는 주체성과 정체성을 잃어가는 국어를 보여주는 것이다.

‘요즘 콜이 많아서 엄청 비지하지만 그래도 해피해요, 걔는 참 터프하면서 나이브하지 않니? 오늘 런치로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포크 햄이 오래됐는지 테이스트가 낫소우굿이었어, 이번에는 아이템을 잘 초이스해야 돼...’

온 국민이 영어에 매달리는 시대가 되면서 영어는 우리의 일상언어 패턴까지 바꾸어놓고 있다. 해방 후 한 때 사람들의 일상대화가 한국어 반 일본어 반으로 이루어졌던 적이 있었다. 일제의 잔재였다. 우리말 속에서 일제의 찌꺼기를 없애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일부 어른들은 아직 사용하지만 젊은이들은 이제 도시락을 벤또라고, 손톱 깎기를 쓰메끼리라고, 전구를 다마라고, 윗도리를 우와기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리를 영어가 차지해버렸다. 길거리에도 한글이 실종된 채 영어 로마자로만 이루어진 간판이 즐비하다. 기업들도 국제화시대라는 명목 하에 앞 다투어 이름을 바꾼다. KB, KT&G, CH, KBI... 글쓴이는 가까운 중국과 일본의 길거리와 간판들을 비교해 보여주며 이것은 국제화시대의 세계적 추세가 아니라 문자언어의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우리만의 딱한 모습임을 깨닫게 한다.



글쓴이는 또한 이 책에서 맞춤법도 표기법도 중요하고, 무분별한 외래어 및 외국어 사용을 자제하여 언어 정체성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우리말 글을 사용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오르가즘 세일’ ‘졸라빨라피시방’ ‘도로변성행위 교통사고유발’ ‘아르바이트 존나급구’ ‘쌔비다 걸리면 똥침’ 등은 우리 사회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간판들이다.

국어교육은 틀리지 않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하고 친절한 우리말 글 사용으로 결국 우리 사회와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다음의 인용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자.




글쓴이 정재환

방송인. 한글문화연대 부대표.

지난 2000년 10월에 한글 학회의 '우리 말글 지킴이'로 위촉되어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2003년 2월, 성균관대 인문학부 수석졸업하며 대통령상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상’ 수상. 현재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 공부 중. 펴낸 책으로 <자장면이 맞아요, 잠봉은?> <우리말은 우리의 밥이다> 등이 있다. 1999년에 ‘KBS 바른언어상’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에서 주는 ‘푸른미디어 좋은 언어상’을 받았고, 2003년에 한글문화연대 부대표로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2004년에는 ‘교육방송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상(TV 진행자 부문)’을 받았다. 현재 SBS-TV의 <도전천곡> <백만불 미스터리>, 교육방송TV의 <코리아 코리아> 등을 진행하고 있다.



* 위 책 소개는 출판사에서 낸 '보도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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