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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02

선생님들요...
02년이 끝났습니다.
지난 토요일 저희 쮜리히 한국학교에서 연말 학예회가 있었거든요..

해를 보지 못한지 벌써 오래 된 것 같네요. 지난 토요일날도 역시 햇빛 한 조각 없는 회색 하늘이었지만 저희들은 거기 여념할 한가함이 없었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중요한 행사가 코 앞에 있었으니까요.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 학교를 가면서 '여보. 2시까지 꼭 와야되. 당신이 사진 담당이야.' 하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고... 차에서는 해연이와 해섭이가 해야하는 부분을 다시 점검하느라 바빴지요. 잘 못했어도 '잘했다. 잘했다. 그런데 이건 전통타령이니까 할아버지들이 말씀하시는것처럼 말해야 돼!' 사기를 치는건지, 사기를 북돋는건지 나 자신도 헷깔리면서, 나서기 싫어하는 해섭이의 용기를 끌어내야 했고, '해연아. 너는 동시니까 아주 예쁘게 박자가 살아나게 외워야 돼!' 하며 오빠 칭찬에 질투로 다글다글 끓는 해연이를 또한 진정시켜야 했지만 속으론 ' 고맙다. 고마워.. 그래도 이렇게 따라주는 너희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점심도 못 챙겨준 에미인데...'

학교 행사장에 가서는 내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살필 겨를도 없습니다. 당장 내게 주어진 의무들을 처리해 나가기 바쁘지요. 지난 주 수업시간에 오늘을 위하여 만든 별 장식, 지난번 백일장한 글들을 벽에 붙이고, 초 켜는 컵장식도 식탁에 올려 놓아야 했지요. 우리반 아이들 총연습도 한번 해야 했고...
드디어 2시 30분...
백여명의 학부모와 친지들을 모시고 행사가 시작 됐습니다.
특별 활동 장구반 아이들의 장구연주로 시작된 아이들 잔치는, 병아리반과 채송화반의 동시, 노래, 개나리반의 2인극-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마리 염소의 다양한 변주-, 진달래반의 노래와 각자동시 외우기, 성인반의 연극-꽃집의 아가씨(저는 꽃집의 아가씨 노래만으로도 뿅 갔어요. 약 3분간 우리 엄마들은 모두 60년대로의 여행을 했나 싶었습니다.)-, 무궁화반의 장기자랑, 두번째 장구연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등반의 연극 '여인 천하'로 끝이 났습니다.
우리말 발음도 어색한 아이들이 ' 어마 마마, 억울하옵니다.'같은 대사를 하면서 엉엉 우는척 하지를 않나, 내시분장을 하고 무대 끄트머리에 허리 구부리고 서서 발을 달싹이며, '경빈 드시옵니다' 하질 않나...
자신의 아이들이 무대에 나올 때마다 부모들은 입이 한바가지 벌어졌고 눈물마저 글썽....
선생들은 그야말로 감동. 감동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언제 저렇게...' 우리 스스로 평소에 인식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내실을, 우리의 노력의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아직 받아쓰기도 엉망, 발음도 엉망, 띄어쓰기도 엉망,.... 엉망인 것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아이들에게서 이만큼을 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일년내 겨우 24회의 수업일, 취학 후 많은 시간을 대부분 현지학교에서 독일어를 하면 지내게 되는 아이들의 상황, 잘 못하면 그만큼 사기도 저하되면서 서서히 한국말을 멀리하는 아이들의 자연스런 심리.... 이런 열악한 조건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이만큼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교사들에게는 '감동'이란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식사, 손님접대, 뒷정리... 이 모든것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동이 너무 커서 그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전 술이 없어도 취하는 모양입니다.
우리 선생들은 행사장 아래 식당에 가서 뒷풀이를 했습니다. 못 말리는 것은 그자리에서 벌써 내년 연극에 대한 구상을 한다는 겁니다(누구냐? 3회 이동순 선생님). 이거 중독 아닙니까? 세상에 긍정적인 중독, 생산적인 중독이 있다면 이런거 아닙니까? ....

또 한 고비를 이렇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02년을 이렇게 보냅니다. 학교일이 끝나면 한 해가 다 간 듯합니다. 성탄, 연말 연시 이 모든건 일한 후 오는 안온한 휴식에 듭니다. 02년은 지독하게 바쁘게, 많이 터지고 깨지고 휘둘리고...그러면서 이렇게 뿌듯하게, 터질듯이 뿌듯하게 그렇게 지나 갑니다. 그리고 저는 만 40고개를
넘어버립니다...

이제 다 끝났다 생각하니 목이 따끔거리는 것이 몸살이 오나봅니다.
선생님들도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주 만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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