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석각본 3 차 탐사기 1.
(남해 낭하리 석각본은 달력도 없었을 4 천 년 전, 남해 낭하리 주변 주민들에게 개천절을 알리는 삼시랑 들의 그림 글자로 보는데 그간해독이 되지 않아 오해가 많았음으로 이에 글쓴이가 읽는 이들의 이해를 위하여 자세한 설명과 실증을 제시해 가며 쓰려니 긴 글이지만 매우 신비하고 재미난 글이니 끝까지 읽어 주시라)
* 들어 가는 말
2012. 5.23 일 꽃 보다 좋은 신록의 계절, 한민족사를 밝히는 단체의 고향과 같은 (사) 한배달 이사장 박정학 박사와 그의 부인이며 특히 환단고기 이유립 선생의 제자였던 전 여사, 그리고 전 경기대 교수였고 1 대 국사찾기 협의회 의장 안호상 박사에 이어 3 대 회장을 하시고 지금은 본각선교원 원장인 고준환 박사와 글쓴이 카페 '천부경과 천부인' 운영위원인 '좋아' 박중면 님과 남해 낭하리 석각본을 세번째 찾아가 보니 낭하리 석각본의 주체가 되는 환웅상 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글쓴이가 2006 년 음 10 월3 일에 찾아 갔을 때도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일이 하도 많이 일어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번 2012.5.23일 찾아 왔을 때도 참으로 이상한 것 천지였다.
아래 사진은 글쓴이가 첫 번째 왔을 때인 2006 년 음 개천절에 철조망으로 출입금지를 시켰던 사진으로 2007년 음력 개천절에 찾아 갔을때 철조망이 없어서 그 입구를 찾지 못했는데 이번 2012년 5 월 23일에 갔을 때 잘 찾아보니 철조망 대신 출입금지 간판만 쓰여 있어 그 입구를 찾는 단서가 된 사진.
2012. 5.23일 좋아님이 찍은 입구
* 옛 기록이나 전설로 본 남해 낭하리 석각본
우선 옛 기록인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야기부터 읽어보자.
* ...亦嘗聞南海道 郎河里 之溪谷及鏡珀湖先春嶺與夫烏蘇里以外巖壁之間時或有發見彫刻非梵非篆人莫能曉此 非神誌氏之所作古字 ...太白逸史神市本記
( 또한 소문을 듣건대,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 것 이라 했으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 태백일사 신시본기)
* 大辨說註曰 南海縣 郎河里 之溪谷巖上有神誌古刻 其文曰 桓雄出獵致祭三神 又曰 大始傳古只憑口舌久而 後乃形以爲畵 又復畵變而爲之字盖文字之原...
(대변설大辯說 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
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 진시황때 서불(徐示)이 불로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또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을 보면
*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에서 보이고 있다. (이하 생략)
*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고각(古刻)
이상과 같이 역사적으로도 아직까지 해독이 되지 않던 남해 낭하리(지금은 양아리라 하나 언제 또 지명이 바뀔지 모르기에 원명대로 낭하리라 함)고각본은 그 고각(古刻)사진이나 전해오는 그림, 또는 인테넷 사진은 거꾸로 된 것이고 그 거꾸로 된 이유가 있었다.
아래 화면은 흔히 인터넷 상에 뜨는 그림으로 맨 좌측이 낭하리 석각본으로 거꾸로 되 있으며 다음이 평양 법수교 밑에 있다는,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는 기천문(祈天文)이고 다음이 창성 조적서 비 이며 다음 맨 우측 사진 위가 깨진 토기에 새겨진 원시 한글 가림토이고 그 아래가 갑골문이다.
글쓴이가 낭하리 석각본을 바로잡아본 그림
* 낭하리 석각본 해독
우선 위 그림에서 큰 사람이 수레에 타 있고 그 뒤를 天자가 밀고 있다. 그러나 환웅이 아무리 큰 사람이라 큰 그림을 그렸다 해도 天이 그 수레를 밀다니? 이는 우리 조상이 그린 금문을 보면 안다. 즉 天자가 지금 한자로 변하기전 우리민족은 네 활개를 편 사람을 大로 그렸다. 따라서 사내는 大 밑에 점이 붙은 太 자이나 大는 여인을 포함한 보통 사람이고 보통 사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 뛰니 하늘 이라는 'ㅡ' 이불을 덮어 현재 天자가 된기록이 금문상 나타난다 즉 이 天자는 한자의 발달 과정을 말 하는 고조선 글자다.
*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글쓴이는 낭하리 고각을 찾으러 갔다가 상주 해수욕장 민박집에서 숙식을 한 다음 낭하리 석각본을 찾는다니까 친절하게도 민박집 아주머니가 차로 데려다 주기에 보리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로 올라가며 찾으려고 헤맸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등산객들도 모른다 했다. 앉아서 핸드폰(조식법(調息法- 환웅, 단군때 부터 하던 한민족의 단전호흡인데 단 해가 솟아 오르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것은 글쓴이가 추가) 쳤다. 즉 해오름 관법에 들어갔다. 깊히 깊히 들어갔다. 하느님은 보통때는 낮잠을 주무시느라로 잘 받지 않았는데 다행이 그 날은 낮잠을 주무시지 않고 바로 받았다.
' 저는 우리 라구 하는 놈 인디유. 낭하리 석각본은 어디 있는기유? '
' 잉 우리 라면 내가 처음 말을 만들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고 나를 욕하던 바로 그 고얀놈 이구나'
' 예 그래유. 하느님이 처음 天地人 원방각으로 말을 만드시고 그 천지인 원방각으로 신지가 글자를 만드니 그때부터 거짓말과 결국 거짓말 밖에 되지 않을 책이 만들어져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지 안남유'
' 과연 옳은 말이로다. 내 실수로 말과 글자를 만들지 않아서 모든 사람들이 순진하게 이심 전심으로 살아 가게 했다면 이 犬같은 세상은 오지 않았을 건디...'
' 그래유. 하느님이 그 천지인으로 말과 글자만 안만들었어도 지금 살인이나 하는 문화는 없었을 긴디...알아 주시니 고마워유.그렁게 석각본 위치나 알려 줘유'
' 그건 우리 아가한테 물어봐라. 여기는 내 며느리 관할이다'
' 아가,며느리가 누군디유?'
' 이런 멍청한 놈 있나? 내 며느리는 곰네 밖에 더 있냐?'
' 아 웅녀 말씀인가유? '
' 그랴 인석아. 웅녀는 한자고 우리말로 곰네다'
' 그래유? A~C . 웅녀한테 다시 해오름 관법을 하려면 또 한참 수고 해야 겠네유“
' A~C 가 뭐냐? '
' 에구 하느님이 영어도 모르남유?'
' 정말 고얀놈이로다. 내 한테 영어로 욕을 하니다니...'
다시 웅녀한테 해오름 관법이라는 핸드폰을 쳤다.
' 그래 너 하느님한테 실컷 야단 맞았지 히히. 그렇다면 내 시녀를 보내주마'
그리고 처다보니 쌍홍문 아래에서 그곳에 등산왔던 어떤 아기씨 둘이 쉬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글쓴이가 처다보자
' 차 한 잔 드릴까요?'
' 예 예 나는 낭하리 석각본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인디유'
' 낭하리 석각본요? 그럼 잘못 오셨어요. 우리는 금산 정상까지 갈려고 온 등산객 이지만 그런 중요한 유물을 연구 하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모셔다 드리지요. 우선 차를 드시고 우리와 함께 내려가요'
정말로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낭하리 석각이 있는 위치는 이 보리암 등산로 입구에서 국도를 따라 자동차로 한 20 분으 더 가야 한단다. 글쓴이는 그들의 차를 얻어 타고 그곳으로 갔다.
그 고각 있는 길은 그 입구가 철조망으로 통제 해 놓았다. 그러나 돌멩이로 지질러 놓은 돌을 치우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 올라가는 오솔길은 먼저 보리암 올라가는 길 보다 덜 경사가 지고 바위나 돌도 적었으며 흙길이고 경관도 좋았다.
생각해보니 반만년 전 선조들은 구태어 보리암 등산로를 택하지 않고 이 길을 택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때는 보리암은 그만두고 불교가 생기기 전이니까 구태여 그 급경사이며 암벽 투성이 인 보리암 코스로 다녔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또 그 바로 위가 웅녀 상이 있는 토굴이라니 일반 백성들은 당연히 낭하리 고각이 있는 이 길로 다녔을 것이며 지금 보리암 등산로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 석각본 중 Y 자 의 정체
산 중턱까지 올라가자 Y 자형 세 갈래 길이 나오고 이제 좌측으로 조금가면 그 현장이란다.
아래 사진 상으로는 Y 자 길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출입구를 막아 길이 너무 피폐해 졌고 거기다가 장마까지 져 길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분명 좌측 덤불 뒤로는 가는 길이 선명하고 우측도 마찬가지 이었다.
2006 년 음 개천절에 찍은 사진
ㅗ
그러나 이번인 2012. 5. 23 일에 가 보니 아래 사진과 같은 Y 자 길은 막아놓고 대신 좌측 석각본 쪽 좁은 곳으로 길을 돌려놓았다.
2012. 5.23일 조아님이 찍은 사진, 입구는 출입금지라 해 놓고 앞으로 개방하려는지 길을 잘 해 놓았다
좌측으로 조금가니 드디어 현장이 나온다. 그 현장이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대로 방치해 놓았었는데 남해군에서 철책을 두르고 안내 판도 써 붙였다 하니 고마웠다. 이 안내판을 보고 이것이 경남 기념물 제 6 호 라는것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올라 오는 길도 막아 놓았는데 누가 보라고 이 안내판을 써 붙였을까?
이 안내문은 이번 2012.5.23일 갔을때도 그대로 였다.
이 안내문 내용은 글쓴이의 추측대로 서불(徐市)이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가 남긴 흔적이라고 했지만 이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글쓴이가 말한대로 진시황때는 이미 대전(大篆) 소전(小篆) 등 한자가 있었기때문이고 그 그림에는 불로 초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며 더욱 확실한것은 그 그림 글자 석각본을 보면 이는 진시황때 대전 소전이 만들어기전 최소한 2 천년 전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2006년 갔을 때 남해군에서 탁본을 뜨다가 원본 훼손을 방지하고 사진이나 찍으라고 힌 페인트 칠을 해 놓은 모양인데 는이는 아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진으로는 세밀한 선이 보이지 안을것이니 탁본을 해 갔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혹 석각의 자획이 마모 될지도 모르니 아예 사진이나 찍어 가라고 선이 분명하게 페인트 칠을 했을것이라고 생각했고 웅녀의 시녀들 이야기로도 중국, 일본인들이 한국사람보다 더 와서 사진을 찍어 간다는데 이는 진시황때 서불이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이곳을 들러 일본으로 가 일향국(日向國) 을 세운것이 현 일본이기 때문이다.
* 아직까지 전 하는 석각본이 거꾸로 된 이유
우리는 이 현장에 들어와 바위(거북바위)를 한 바퀴 돌아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에서 찍다보니 위 역사에 전하는 그림이나 아래 사진과 같이 그림이 꺼꾸로 된다.
이 부근의 지형과 지질을 조사해 보았다. 이 부근엔 바위가 없고 땅도 그냥 흙 뿐이다. 그렇다면 이 거북바위는 몇 만년전 위에서 굴러 내려와 옆으로 세워져 밖힌 것이고 바닦이 바위가 아니니 그간 지각 변동, 또는 침강에 의해서 이제는 자빠졌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사진 찍기 좋은 장소를 골라 찍는다는것은 이 바위가 자빠졌단는것을 생각지 못한것일것이며 따라서 아직까지의 모든 탁본이나 사진이 꺼꾸로 된 원인이 될것이다. 바위 위에 올라가 다시 찍어 보았다.
다시 설명하면 그 바위가 원래 대로 있는것이 아니라 서 있던것이 쓰러진 것이다. 쓰러졌다는 증거는 그 바위 밑 부분이 칼로 자른듯이 서 있기 좋게 일직선이라는 것이다. 지금 길을 고쳐 놓기전 들어오는 길쪽 에서 보면 그 돌이 흙 위에 서 있기 좋게 일직선이고 또 그 바위 이름이 거북 바위인데 옛날의 거북은 울진 반구대 석각본이나 경주 무덤에서 보듯 거의 엎드린 여인을 표한다. 따라서 그 거북바위는 혹 그 아래 큰 암석이 있고 거기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 어디선가 그곳 흙위에 굴러와 거기에 세워져 밖힌것이 것이 그간 지진등으로 옆으로 쓰러진 것일 것인데 만약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 석각본이 있는 위치가 제사 지낼때 지방 붙이는 자리였을 것이며 당시 삶신할매께 다산과 순산을 비는 삼시랑이나 주민들은 단풍이 드는 10원 상달 초사흘 초승달이 샛별과 만나는 일년에 단 한번뿐인 날을 개천절로 전해 듣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웅녀 할머니 시녀들 사진, 천사의 얼굴을 내 맘대로 공개 할 수 없는데 다행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천사들 초상권 침해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2012.5.23일에 가 보니 어떤 탁본도 할 줄 모르는 어는 넘이 검정 페인트를 질질 흘리며 부어놓고 탁본을 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일행과 석각이 새겨진 거북바위 에서
그렇다면 Y 자 밑에 붙어있는 꺼꾸로 된 Y 자는 어디 있을까?
우리가 올라올때 아스팔트 국도에서 철망을 처 놓은 샛길로 올라왔다 즉 ㅗ의 세갈래 길을 올라 왔는데 그곳 지형은 산 줄기 이므로 약간 높았으며 그렇다면 옛날 길은 ㅗ 자의 양쪽 끝이 처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옛날길은 Y 와 꺼꾸로된 Y 자가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이는 분명 그 석각이 있는 장소의 지도라는 추측이 맞는다. 웅녀 할머닌 시녀 들에게 물었다.
' 여기서 더 올라가면 또 Y 자 같은 세갈래 길이 나오남유?'
' 또 Y 자 같은 길은 없는것 같던데요'
' 그럼 저 Y자 같은 것이 붙은 그림은 이곳을 찾아오는 지도라는 제 추즉이 맞는것 같습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Y자 길은 여기서 끝이 나고 들어 오는 길은 저 천사 들이 서 있는 반대 방향이다.
그렇다면 고대 선조들이 이 그림을 새길적에 일부러 한 바퀴 돌아와서 보라고 새겼을것 같은가?
만약 이 천사들이 서있는 부분이 침강되지 않아 세로 서있던 바위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들어 오자 마자 그 그림이 보였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림은 제사 지낼때 지방 붙이는 곳 처럼 바위 머리가 되며 따라서 꺼꾸로의 그림이 아니라 바로 잡힌 그림이 됬을것이다.
' 아기씨들 아니면 이 흔적을 도저히 찾지 못할뻔 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금산 정상을 가신다더니 쌍홍문 까지 등산을 거의 다 하시고도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가 점심이라도 대접 할까요? 아니면 저 위로 더 올라가면 이 석각과 관련된 사진을 더 찍을 수가 있을까요?'
'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더 올라가 보세요. 더 올라가면 단군전각이 있고 그 뒤에 자연이 만든 웅녀상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시다 보면 이곳과 관련된 바위가 또 있을 지 모르잖아요'
하긴 그랬다. 저 환웅 수레 바위는 좋은데 먼저 쌍홍문에서 찍었던 바위와 같은 기둥은 아직 찾질 못했다.
시녀들 말을 들으니 옆으로 조금만 가면 바위가 있고 그곳에서 바로 앞에 있는 바닷물을 찍을 수 있다 하여 가 보니 정말이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깜짝 놀랄만한 바위가 보이는것 이었다.
즉 아래 그림과 같이 환웅을 밀고 올라가는 정확한 그림이 보였다.
물론 아래사진은 수레도 없고 바퀴도 없으며 또 수레를 밀고있는것이 天 자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바위를 보고 이는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했을 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이번 2012. 5.23 일 갔을 때는 그 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쥐가 물어갔을 리도없고 아마 환웅님이 곰네님과 숲 속으로 거시기 하러 가셨나?
2006년에 왔을 때도 웅녀님 시녀 말 대로 바로 앞 바위 위에 올라가 환웅상을 찍었는데 이번에는 없다.
먼저 환웅상이 있던 위 아래를 찾아 봐도 아무래도 환웅님은 웅녀님과 데이트 하러 가신것 같다.
* 환웅상 바위는 틀림없이 있었는데
다시 Y 자 길로 나와 우측으로 올라 갔다. 역시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이 모호 했다. 그러나 분명 전에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었다. 한참 올라갔다. 올라가다 보니 우측에 바위 들이 나타나는데 이 바위들은 정상까지 이어져 있어 만약 그림을 그린다면 낭하리 석각 우측 기둥이 될 수도 있을것 이라고 생각 했다. 그렇다면 좌측 좀 낮은 바위 기둥은 어디 있나?
조금 더 올라가니 좌측 바위와 환웅 수레 바위가 보였다.
그러나 우측 좌측 바위를 한꺼번에 찍으려면 위로 올라 가는 길에서 좌측 골짜기로 얼마를 들어 가야 하는데 가시 덤불이 길을 막아 조금 밖에 들어 가지 못했다.
글쓴이는 이 사진 보다 더 좋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어 읽는이들 한테 알리고 싶은 욕심으로 가시 덤불을 헤치고 좌측 골짜기로 깊숙히 들어갔다. 손과 얼굴 모두 가시 덤불에 긇히건 말건 마구 들어갔다. 그러나 가면 갈 수록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과 소나무 들이 하늘을 가려 그야말로 캄캄했다. 더구나 그날 빗방울인지 눈방울 까지 날리며 하늘은 음산한데 바람까지 스산하게 불어 댔다.
또 승냥이인지 산 짐승이 꿩 토끼 들을 잡아 먹은 흔적이 여기 저기 있어 겁이 더럭 났다. 더구나 점심때가 지나고 이 산을 두번이나 오르내리니 무척 목이 마르고 시장해서 진이 빠지고 더욱 으스스 했다.
* 천지 만물에 감사 하자.
주위를 보니 부러진 나무가지가 있었다. 이것을 주어가지고 몽둥이을 만들었다. 이런 경우 산 짐승은 용케도 진 빠진 사람을 알아보고 덤비는 수가 많단다.
그러나 곧 몽둥이를 버렸다. 전에 도사님들이나 큰 스님들은 아무리 깊은 산중을 밤에 다녀도 결코 호랑이가 해 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를 해 준다지 않던가? 사람에게 살의가 있다면 동물들은 먼저 알아 보고 덤빈단다. 그러나 살의가 없고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면 호랑이 조차도 그 사람을 보호한단다.
천지 만물에 감사 하자. 천지 만물에게 감사하면 천지 만물은 절대로 너를 해하지 않고 보호 한다. 그러니 산 짐승과 대결 하겠다고 몽둥이를 든 내가 얼마나 수양이 부족한 인간인가?
나는 적당한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 천지 만물에 감사 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한테...아니 곰네 할머님한테 해오름 관법의 핸드폰을 치려고 좌선을 했다.
' 곰네 할머니 웅녀상은 어디 있는지 도와 줘유'
' 잉 그래서 내가 그 석각을 찾게 천사도 보내 주지 않았더냐? 글구 너 내 산에서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몽둥이 까지 버렸으니 더욱 기특하다. 산짐승은 걱정말아. 내가 보호 해 준다.글구 산토끼를 보내 네 길을 안내 할테니 따라가 보거라'
' 예 고마워유. 근디 날씨나 호랑이등 산짐승은 다 하느님 소관인디 왜 이 산 만큼은 할머니 소관이래유?'
' 잉 조금 더 올라가 보면 그 이유를 안다'
' 근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맥이 빠져 도저히 더 못 올라 가겠는디유. 뭐 산 열매나 다래등 좀 먹을거좀 없남유?'
' 멍청한 녀석. 네 배낭을 열어 봐라'
배낭을 열어 봤다. 그런데 배낭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물병과 초코렛 등이 들어 있다. 평소 집 사람은 등산 할때는 아무리 작은 산 이라도 얏 보지 말고 비상 식량을 가져 가야 한다더니 미리 준비 해 넣은 모양이다.
물과 초코렛으로 기운을 차리고 배낭을 걸머메자 정말 것짓말 처럼 산토끼 한마리가 눈앞에서 알짱 댄다. 산 토끼는 용 케도 가시 덤불이 없는곳을 골라 정상 쪽으로 올라 갔다. 산토끼는 정말 내 길을 안내 하는것 같았다. 조금 올라가다 내가 못 따라가면 뒤를 힐긋 돌아보며 기다려 줬고 내가 올라가면 그제야 앞장서 올라 갔다. 나는 이 산토끼가 분명 나를 인도하는것으로 확신했으니 신이 났다. 할렐루야...아니지 얼싸 좋다 하며 따라 올라 갔다.
* 태극기의 반가움
얼마를 올라가니 아 이렇게 반가울수가 있을까? 외국에 나갔다가 태극기를 보면 눈물이 나는데 여기에도 단군 성전에 태극기가 게양되 있는것이 눈에 들어오니 얼마나 반가우랴? 단군성전에 올라가보니 하느님, 황웅, 단군상과 산신령 그림등 장엄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나 오늘이 진짜 개천절 인데도 불구하고 조용했다.
작은 돈 이지만 여비를 털어 성심을 바치고 절을 세번 하고 내려왔다.
그곳에는 거의 글쓴이 또래의 남자가 있었고 부인 들이 김장인지 무슨 일인가 했다.
' 이 단군 성전이 오래전 부터 있었나요?'
' 이 성전이 지어진것은 몇 십년 안되지만 일연 선사님이 오래전 부터 토굴 같은곳에서 성모님을 모시고 있었답니다'
' 성모님 이라니요? 혹시 웅녀 할머니를 말씀 하시는것 아닙니까?'
' 예 이 산은 원래 금산이 아닙니다.금산이란 이성계가 여기서 도를 닭고 왕이 된다면 그 은덕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기로 했는데 막상 왕이 되니 차마 그럴 수는 없어 비단금(錦)자르 써서 금산이 된것이지 원래 이름은 성모산 이었습니다.'
이 말은 나도 아는 이야기 이다. 그러나 이 산의 원래 이름이 성모산이라면 바로 곰네산, 즉 웅녀산이 아닌가? 그래서 하느님 한테 핸드폰(해오름 관법)을 칠적에 이 산 만큼은 우리 며느리 한테 맛겼단 말인가? 참으로 어제저녁 통화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적중했다.
그러나 이 산이 정말 성모산 이라면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한다.
' 왜 이 산이 성모산 이라고 하나요? 누가 언제서 부터 그런 이름을 붙였나요?'
' 자세한건 모릅니다. 아주 옛날 그러니까 단군때 부터 여기에는 저기 계시는 성모님 신상이 있었고 거기에 기도 하다 보니 성모산 이라 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단군정전 후면 우측으로 제단이 있고 거기에는 아주 오래되 눈 귀 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 없어진 자그마한 여인상이 있었다.
내가 깜짝 놀라며 사진을 찍으려 하지 그 분은 깜짝 놀라며 찍지 말란다.
글쓴이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에 낭하리 석각 해독한것을 혹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프린트 해 가지고 간것이 있는데 그걸 보이며 말 했다.
' 저는 여기 놀라온 사람이 아니고 이런걸 조사 하러 다니는 사람인데유. 이 낭하리 석각은 흔히 서불이 불로초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 하지만 제가 해독해보고 또 오늘 현지 답사해 본 결과에 의하면 틀림없는 환웅님을 모시고 천제를 지낸 흔적입니다. 이 환웅님 기사와 저 성모님 신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많은 독자님들이 우리 뿌리를 알게 하여 될 수 있는한 여기에 많이 오게 하려는데 왜 찍지 말아야 하나유?'
' 아 그런 일을 하시는군요? 그럼 어쩌나? 우리 선사님께서 아직 때가 아니니 사진은 못 찍게 엄명을 내렸는데...여보 전화좀 걸어서 승낙좀 받아봐요.'
김장을 하는 그 부인에게 말했다.
' 안되요. 먼저번에도 어떤 학자님들오 오셔서 찍자는 것도 거절 했구요. 심지어 중국, 일본 학자등 외국에서 오신 분들도 많은데 모두 못 찍어 갔어요'
' 계연수,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다 만들어 놓고도 당시 일제하라 발표를 못하고 때를 기다리던것과 같은가요? 그러나 이미 환단고기는 1984 년에 발표 됬고 이제는 우리가 국권을 잡은지 오래인데 저 성모님상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될수 있는한 많이 알려서 우리 뿌리를 찾는 사람이 많을 수록 좋을 텐데...'
' 아니 요즘도 단군상 목자르는거 보지 못했어요?'
이 주인집 남자는 외출한 선사님께 핸드폰 이라도 쳐서 사진을 찍게 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 아주머니는 막무내기다.
* 비 바람등 하늘이 만든 웅녀상
그러나 아래 사진은 다음해 개천절날 몰카로 찍은 사진
또 다른 아주머니도 달려와 그 낭하리 석각 그림과 내 설명을 듣고 이 그림이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 하자 매우 신기해 했는데 그 분은 나중에 글쓴이 카페의 회원이 되셨다
나는 그 선사님 이라는 분의 정체가 궁금했다.
' 선사님은 누구고 어딜 가셨는데요?'
' 아 원래 이 단군성전 짓기 전부터 여기 토굴에서 수도를 하고 계신 77 세 되신 할머니가 있으신데 그분을 우리는 선사님 이라고 부릅니다.
부언 - 2012년 5월에 가 보니 일연선사는 돌아 가셨음
그 분은 지금 음력 개천절을 지내시러 다른 지방에 멀리 가셨어요'
' 혹 그분이 1960 년대까지 진도지방에 남아 있던 세습무 당골레가 아닌가요?'
' 에이 당골레 라니? 무당이 아니예요. 선사님 이에요 선사'
이분은 세습무 당골레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것 같고 그져 무당이라면 요즘 푸닥거리나 하는 강신무 정도로 아는 모양이었다.
딴 이야기,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땅은 거의 황사가 부는 사막이고 지금 발해만을 끼고 도는 만리장성 서남쪽 산동반도의 불한= 밝한(卞= 弁 韓 ) 과 만리장성 동쪽과 한반도를 포함한 만주와 일대의 말한 (馬韓) 을 제후국으로 두고 만리장성 부근 가운데 에서 선한_= 신한(辰 = 辰> 秦韓 의 천제국으로 양쪽 제후국 삼한을 을 다스리던 밝달 임금 (진시황의 진한 < 秦韓> 밑이 禾인가 天인가만 다른 > 奏>를 보고 신채호도 우리가 주신대 제국이 있었다 하나 이는 한자를 잘못 읽은 탓인지 우리 역사에서 주신국은 찾을 수 없었음 )은 단군왕검 혼자 전국에 그의 도를 펼 수 없으니 각 지방에 심시랑 또는 단골> 당골레를 두고 사법 행정, 무속, 즉 누가 분쟁이 있으면 판결 해결해 주고 또 아이들 혼인날짜나 제례뿐 아니라 심지어 굴뚝 고치는 날 까지 관장 하신 분이 있었고 일반 백성은 보리때 보리 한말, 벼때 벼 한말씩 바치고 그저 아이들 감기만 들었어도 단골집을 드나들기를 지금 단골집 드나들듯 했으며 그래서 지금 단골의 어원이 바로 이 단골이다.
그러나 그는 낭하리 석각 그림과 설명서에 매우 흥미가 있는것 같고 또 그 산꼭대기 단군성전에서는 인테넷도 될 수 없으니 그 내가 프린트 해 가지고 간것을 드리기로 했다.
다른 아주머니도 그 유인물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는 부산에서 기도차 온 손님이라 했고 환단고기도 읽을 정도로 우리 역사에 관심도 많았으며 인테넷도 한다니 난 그 아주머니에게는 명함을 건네며 인테넷에 들어가 보라고 했다.
그럼 왜 이산이 웅녀 산인가? 하긴 여기에는 전에서 부터 임신과 출산을 관장했던 삶신할매, 즉 아기를 낳으려면 빨리 나가라고 우리의 볼기짝을 때려 엉덩이가 시퍼렇다는 그 몽골반점의 원인 삶신할매인 웅녀나 (지금 무당, 무속, 미신이라고 비하하는 샤먼(shaman),머니즘은 곰네 할머니가 삶신 할매기 때문인데 우리까지 샤먼이 미신이라고 비하 하고 있음)
또는 그를 대신하는 삼시랑, 당골레가 수도를 했고 일반 백성이 그 당골래 한데 기도를 드리기 위해자주 올라오다 보니 이 산이 웅녀 산이라 했을 것인데 단군성전에서 수도 하는 이들은 이를 신성시하기 위해 성모산 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단군의 도를 세습 하였으니 세습무(世習巫)라 하는데 지금 무당은 단군의 도는 전혀 아는바 없이 그저 신이 내려 흉내나 내고 푸닥거리나 하니 단군의 도와는 전혀 관게가 없는 강신무(降神巫) 일 뿐인데 그 분은 무당이면 같은 무당인줄 알고 펄쩍 뛴 것이다.
* 지명이 말해주는 낭하리
위 환단고기 내용만으로 낭하리 고각이 환숫(桓雄)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지명에서 혹 환숫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까? 글쓴이는 낭하리 고각을 탐사하고 돌아와 다음 일요일 혼자 등산을 해 가며 더 곰곰히 행각해 봤다. 지금 그 동네 이름은 남해군 양아리(南海郡 良阿里) 양이 마을 이라 하고 또 두모리 석각본이라고도 하니 얼마나 또 바뀔지 모른다. 그러나 환단고기 기록에는 남해현 낭하리(南海縣 郎河里)라 하니 낭하리 석각본 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인들이 왜? 낭하리 라고 했는지 그 뜻을 몰라가지고는 낭하리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의 원조 금문은 우리 조상이 그린 그림 글자로 교통 표지판 처럼 음이 없이 뜻만 통 하는 그림글자 였지만 갑골문> 대전> 소전 > 예서 > 해서로 중국인들에 의해 음이 붙여지고 모양이 현형되 오다가 우리 에게 들어온 것은 삼국 초 이니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한다면 미국 자동차 박람회에 가서 달구지의 원조가 우리이니 자동차의 원조도 우리라고 하는 말과 같다.
지금 전국에 걸쳐 있고 우리가 맥도 모르고 부르는 우리 행정 지명과 촌노들이 말하는 우리 지명을 비교해 보자. 몇 가지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지명중에 大田 이 있는데 과연 우리 선조들이 대전 이라고 했을까? 이는 큰 밭 이란 뜻의 한밭 이 한자로 기록하다 보니 일제때 大田이 된것이지만 6.25 전후만 하더라도 우리는 한밭 이라 했고 작은고개 라는 애오개가 이제 아현동 이 됐으며 전에 말한 글쓴이의 고향 틀무시는 지금 기지시리(機池市里) 인데 그 이유는 틀무시는 애초 틀못이던것이 틀은 베틀機자를 쓰고 못 은 못 지池를 쓴것이며 市는 틀못에우리가 그 즐겨 붙이는 약방의감초격 접미사 이, 즉 갑순이 갑돌이 하는 이 가 붙어 틀못이> 틀무시 가 되고 그러다 보니 里에 불과한곳에 市 가 붙었으며 이 순수한 우리 지명을 한자로 쓰자니 機池市里 가 되었다 했다. 각설 그만하고...
그렇다면 낭하리(郎河里)도 한자가 들어오기 전 분명 우리말이 있었을 것이다. 뭐라고 했을까? 글쓴이는 걸으며 생각 하다가 깜짝 놀랐다. 그 전 우리말로는 틀림없이 '앵무리' 였을 것이다. 왜 앵무리 인가? 한자로 기록되는 郎 은 바로 삼시랑(三侍郞)을 말 한다. 가림토를 창제한 사람도 삼낭(三郞) 을보륵이고 ‘고려팔관잡기에 또한 말하되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를 뿌리고 재물을 관리하는자를 업(業)이라하고 교화와 복에 대한 위엄을 주관 하는 자를 랑(郞) 이라하고 무리를 지어 공 이름을 주관 하는자를 백(伯)이라 하니 즉 옛날 하느님 시대에 발달된 풍습이다.’ (高麗八觀雜記亦曰三郞倍達臣也主稼種財理者爲業主敎化威福者爲郞主聚衆願功者爲伯卽古發神道也)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郎은 분명 삼시랑을 말하고 그 이외도 우리 사서에서 삼시랑은 그냥 간단하게 郎 이라 한 기록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郎, 즉 삼시랑은 하느님, 환숫, 밝달임금(단군) 등 삼신을 받드는 직책이고 또 지금 전라, 충청지방의 할머니 들이 자녀를 10 여명 이나 낳았고 누가 ' 할아버지와 금슬이 좋아 자녀를 많이 두었느냐?'고 물으면 ' 금슬은 무슨 놈의 금슬? 삼시랭이 가 주책이 없어서 그렇게 됬다고 한다. 즉 삼시랑은 옛 부터 우리의 임신과 출산을 담당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지금 국어사전에서 화랭이 를 찾아보면 이는 ' 男巫', 즉 남자 무당으로 나오는데 화랭이의 원 말은 환한나라 앵이(앙이, 옹이)즉 환한것이 송판의 앵이 처럼 뭉처진것을 말하니 바로 환앵이가 화랭이가 되고 이것이 화랑도(花郞道) 가 됬으며 또한 이것은 풍월도(風月道) 풍류도(風流道)라 하는데 風은 바람이고 月은 달 이며 流도 달릴 류 이니 역시 달 이다.
또 딴말...따라서 풍월, 풍류란 바달 >밝달 이며 배달(培達)은 바로 밝달 의 변음이니 지금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환숫께서 세웠다는 배달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이두 문자로 본다. 즉 단재 신채호 같은이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단군이나 조선 소리가 없는 중국의 사대 사상 글이니 일연의 삼국 사기만 못하다고 하나 김부식은 책임있는 역사서를 당시 학자들과 상의해서 쓴 역사의 기록이나 단 승자인 신라의 기록에서 썻으니 없는 단군이나 조선 소리를 만들어서 쓸 수도 없고 어떤 기록이 있다 해도 고구려 성벽이나 광개 토대왕 비에 새겨저 있듯이 한자를 우리말 순서로 기록한 이두이니 졸렬해서 취하지 않았다 했다. 그러나 그 보다 364 년이나 늦은 일연의 삼국유사는 이두가 유행할 때 이고 역사책이 아니라 신비한 것이나 즐기는 불교 서적이니 누가 책임을 물을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 최초의 나라는 檀君의 우리말 밝달임금이 첫땅, 새땅 이라는 의미의 아사달(阿斯達)에서 일어선 아사선(阿斯鮮)인데 이를 역시 고려말 일연이 이두로쓴 중국의 고기만 보고 조선이라 한 것이니 밝달 임금은 단군이 어느 넘인지 조선이 어느넘이 세운 나라인지 모르는 일연의 작품을 우리는 단군이니 조선이라 한다. ( 우리 말에 감둥이와 검둥이가 같은 말이듯 아래아점 글자로는 처음 빨래가 아시빨래이고 처음 갈이가 아시갈이 이듯 아시 아사는 같은 말이고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말에서 朝日新聞이 아사히신문 이다)
딴 소리 그만하고 위 앵무리 의 앵 은 옹이, 앙이의 앙 에 우리말에 거의 붙어 다니는 접미사 이 가 붙어 앵이가 되고 이 앵이 한자로 바꿔 쓰면서 환앵이가 무당인 화랭이가 되고 또 이것이 화랑(花郞)이 되듯 이 앵이 郎 이 됬을 것이다.
또 앵물이의 물 은 낭하리의 하 가 물河자 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낭하리 석각 그림이나 또 그 석각 그림에 있는 쌍홍문 앞에서 바닷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앵무리 의 리 는 지금 里 가 아니고 위 틀못이 가 틀무시 가 된것같이 앵물이> 앵무리 가 됬을 것이다.
계속
한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