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러한 ‘-어하다’를 형용사가 아닌 동사에 붙여 쓰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감격해하다’와 같은 말도 그러한 경우이다. ‘감격하다’는 본디 동사이기 때문에, 동사를 만들어 주는 ‘-어하다’를 붙여 ‘감격해하다’로 쓸 수 없다. 그밖에도 ‘감탄하다’나 ‘당황하다’ 들과 같은 동사들도 마찬가지로 ‘감탄해하다’, ‘당황해하다’처럼 쓸 수 없는 말들이다. 이 말들은 그냥 ‘감격했다’, ‘감탄했다’, ‘당황했다’처럼 쓰면 된다.
여행하다 보면 버스나 열차를 환승하게 되는데, 이를 우리말로 “갈아타다” 또는 “바꿔 타다”로 뒤섞어 쓰는 경우가 있다.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고 안동에 가려면, 경부선 열차로 영천까지 가서 다른 열차로 옮겨 타야 한다. 이때에 “영천에서 열차를 바꿔 탔다.”와 “영천에서 열차를 갈아탔다.”라는 표현이 혼동돼서 쓰이고 있다. 이 경우에는 ‘바꿔 탔다’보다는 ‘갈아탔다’가 더욱 알맞은 표현이다.
‘환승’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갈아타다’이다. 다시 말하면, ‘갈아타다’는 자기 의도대로 탄 것인 데 비하여, ‘바꿔 타다’에는 자기 의도와는 달리 ‘잘못 타다’는 뜻이 보태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바꿔 탔다는 말에서 ‘갈아탔다’는 뜻이 다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잘못 탔다’는 뜻이 더 강하게 들어 있다.
“거짓말은 눈꼽만큼도 못 한다.”에서 ‘눈꼽’은 [눈꼽]으로 소리 나더라도 ‘눈곱’으로 적는다. ‘눈곱’은 ‘눈’과 ‘곱’의 합성어인데, ‘곱’은 동물의 기름을 가리키던 순 우리말이다. 또, “눈쌀을 찌푸렸다.”에서 ‘눈쌀’은 비록 [눈쌀]로 발음되더라도 ‘눈살’로 적는다. ‘눈살’은 ‘두 눈썹 사이에 잡힌 주름’으로서 ‘눈’과 ‘살’이 합쳐진 합성어이다. 마찬가지로, ‘남에게 미움을 받을 만한 데가 있는 사람’을 가리켜 ‘밉쌀스럽다’, ‘밉쌀맞다’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때에도 ‘밉살스럽다’, ‘밉살맞다’가 바른 말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아이들 등쌀에 못 견디겠다.”처럼, ‘몹시 귀찮게 수선부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은 된소리를 표기에 그대로 반영한 ‘등쌀’이 맞다.
“별들만이 소근소근 속삭이는 밤하늘에”, “인부들이 한 곳에 모여 수근거리고 있다.” 들에서 ‘소근소근’과 ‘수근거리고’는 남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들은 표준말이 아니다. ‘소근소근’은 ‘소곤소곤’으로 써야 하고, ‘수근거리다’도 ‘수군거리다’로 바로잡아야 한다. ‘수근덕거리다’도 마찬가지로 ‘수군덕거리다’로 써야 한다.
‘궁시렁거리다’처럼 받침소리를 잘못 내는 경우도 있다. 무언가 못마땅하여 군소리를 듣기 싫도록 자꾸 한다는 뜻으로 흔히 ‘궁시렁거리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구시렁거리다’로 해야 맞다. “뭘 그렇게 혼자 구시렁거리고 있니?”가 올바른 표현이다. 말하는 사람이 어린아이인 경우에는 ‘구시렁거리다’의 작은 말인 ‘고시랑거리다’로 표현할 수도 있다.
‘병이 나다’라 하기도 하고, ‘병이 들다’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몸살이 났다’를 ‘몸살이 들었다’라 하면 무척 어색하고, 반대로 ‘감기 들었다’를 ‘감기 났다’라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몸살은 병의 기운이 몸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들다’가 아니라 ‘나다’로 말한다. 이에 비해 감기는 밖에서 몸 안으로 한기가 스며들거나 병균이 침입해서 생기는 병이기 때문에 ‘나다’가 아니라 ‘들다’로 말한다.
‘감기 들다’를 ‘감기에 걸렸다’라고도 말한다. ‘걸리다’라고 말했을 때는 뭔가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있는 경우이다. 옆 사람 답안지를 몰래 보다 들키면 ‘걸렸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감기에 걸렸다’라고 하면 스스로 몸 관리에 부주의해서 감기 병균이 들어왔다는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농촌의 바쁜 일손을 도웁니다.”라는 기사문이 보인다. “구멍 난 양말을 기웁니다.”라는 문장도 눈에 띈다. 모두 잘못된 표현들이다. ‘돕다’, ‘깁다’와 같은 (ㄹ을 제외한) 받침 있는 용언의 어간 뒤에는 ‘-ㅂ니다’가 아니라 ‘습니다’가 붙는다. “일손을 돕습니다.”, “숙제를 돕습니다.”처럼 ‘돕다’는 ‘돕습니다’로, “양말을 깁습니다.”, “치맛단을 깁습니다.”와 같이 ‘깁다’는 ‘깁습니다’로 써야 한다.
‘-ㅂ니다’는 받침이 없는 용언의 어간에 붙지만, “달도 차면 기웁니다.”, “승부가 크게 기웁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받침이 ㄹ인 용언(‘기울다’)의 어간 뒤에도 붙어 쓰인다. “(가게에) 갑니다.”는 자동사 ‘가다’에 ‘-ㅂ니다’가, “(밭을) 갑니다.”는 타동사 ‘갈다’에 ‘-ㅂ니다’가 붙은 꼴이다. 양말은 ‘깁는’ 것이고, 승부는 ‘기우는’ 것이니, “양말을 기웁니다.”처럼 혼동해서 쓰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남을 놀라게 하다’는 뜻으로 쓰는 말은 ‘놀라다’의 사동사인 ‘놀래다’이다. 입말에서 흔히 ‘놀래키다’로 쓰고 있지만 이는 ‘놀래다’의 방언(사투리)이다. 물론 사투리라 해서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표준말을 써야 하는 언론에서 “그의 은퇴 선언은 유권자들을 깜짝 놀래켰다.”처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놀래켰다’를 ‘놀랬다’로 바로잡거나, 이 표현이 어색하다면 ‘놀라게 했다’로 바꿔 주면 자연스럽다.
‘놀래키다’ 못지않게 자주 사용하는 말로 ‘혼내키다’도 있다. “말 안 듣는 아들을 혼내키고 싶다.”와 같이 쓰는데 ‘혼내키다’ 또한 표준말이 아니라 특정 지역 사투리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되도록 표준말로 “혼내고 싶다.”나 “혼내주고 싶다.”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치인을 혼내키는 방법”이란 말도 “정치인을 혼내는 방법”으로 고쳐야 어법에 맞다.
집에 손님을 맞이할 때, 애써서 갖은 반찬들을 한 상 가득 준비하고도 “차린 건 없지만 많이 잡수세요.”라고 겸손해 하는 것이 우리네 문화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경우로, 칠순 잔치 등에 청첩장을 보내면서 “조촐한 자리지만 꼭 참석해 주세요.”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서는 ‘조촐하다’란 말을 ‘변변치 못하다’란 겸양의 표현으로 쓰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조촐하다’란 말은 본디 “아주 아담하고 깨끗하다”란 뜻을 가진 낱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자리를 마련한 쪽에서 쓸 말이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이 주인에게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하고 칭찬할 때 쓰는 것이 알맞다. “아주 아담하고 깨끗한 자리”에 만족했다는 인사로 건네는 표현이다.
“사업을 크게 벌렸다.”, “잔치를 벌렸다.”라는 말들은 바르지 않다. ‘벌리다’는 “둘 사이를 넓힌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두 팔을 벌리다.”, “입을 벌리다.” 이런 말들에서는 ‘벌리다’로 쓴다. 또, “자루를 벌렸다.”라든가 “두 손을 벌렸다.”(오므라진 것을 펴다)처럼 쓸 때에도 ‘벌리다’라고 한다. 이런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물리적인 거리를 떼어서 넓히는 것을 ‘벌린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어떤 일을 계획하여 시작하다.” 또는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다.”는 뜻으로 쓰는 말은 ‘벌이다’이다. “사업을 크게 벌렸다.”를 바루면 “사업을 크게 벌였다.”가 되고, “잔치를 벌렸다.”도 “잔치를 벌였다.”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환경 운동을 벌이다.”라든지, “노름판을 벌였다.”, “시내에 음식점을 벌였다.”, “시장에 좌판을 벌였다.” 들과 같은 경우에도 ‘벌이다’를 쓴다.
“~하고자 하오니”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띈다. 여기에서 연결어미로 쓰인 ‘-오니’는 그 뒤에 종결어미를 ‘-옵니다’로 대응시키지 않는 한, 평서체인 ‘-니’로 고쳐 써야 한다.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 관계나, 목적어와 서술어의 호응 관계가 들어맞아야 하는 것이다. “10시부터 회의가 진행되오니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란 문장은 이러한 호응 관계가 맞지 않는 경우이다. 이 문장은 “10시부터 회의가 진행되니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가 자연스럽다. 아니면 “10시부터 회의가 진행되오니 꼭 참석하시기 바라옵니다.”로 고쳐 써야 하는데, 이는 현대 언어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고자’를 흔히 ‘~코자’로 줄여 쓰고 있는데 이렇게 줄여 써도 우리 말법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곧 “진행하고자 하니”를 “진행코자 하니”로 바꾸어 써도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를 “진행코저 하니”처럼, ‘~코저’로 쓰면 틀린다. 기본형이 ‘~하고자’이므로, 굳이 줄여 쓰려면 ‘~코자’로 써야 한다.
“한국어가 많이 늘은 이주 여성”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늘다’처럼 어간 받침이 ㄹ인 말들은 시제를 나타내는 어미를 붙일 때 보통 ㄹ이 탈락된다. ‘많이 늘은’이 아니라 ‘많이 는’이라고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떡을 썰은 뒤에’도 ‘떡을 썬 뒤에’가 된다. 그런가 하면 우리 귀에 익은 대중가요 가운데, “거칠은 벌판으로 달려가자.”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에서의 “거칠은 벌판으로” 또한 “거친 벌판으로”라 고쳐야 옳다.
합성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대체로 ㄹ이 ‘ㄴ, ㄷ, ㅅ, ㅈ’으로 시작하는 말 앞에서 탈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찰밥’, ‘찰떡’, ‘찰흙’이라고 할 때의 ‘찰’도 ㅈ으로 시작하는 ‘-지다’ 앞에서 ㄹ이 없어지고 ‘차지다’가 된다. 이런 예로, ‘바늘’과 ‘질’이 합쳐질 때에도 ㄹ이 탈락되기 때문에 ‘바늘질’이 아니라, ‘바느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복 저고리 치맛단을 끌고 다니다 보면 끝이 닳아서 없어질 수가 있다. 땅에 끌리도록 길게 입는 청바지도 마찬가지다. 또, 교실 책상을 오랫동안 쓰다 보면 네 귀퉁이가 닳아서 뭉툭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어떤 물체의 끝 부분이 닳아서 없어지다”는 뜻으로 쓰이는 순 우리말이 바로 ‘모지라지다’이다.
우리 옛날 영화에서는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를 ‘바라보일 만한 정도로 뒤에 멀리 떨어져 따라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 꼭 맞는 순 우리말이 ‘바람만바람만’이다. “그는 슬픔에 찬 그녀의 뒤를 바람만바람만 따르고 있었다.”처럼 말할 수 있다. 뒤를 쫓는다는 ‘추적’은 한자말이지만, ‘추적추적’이라 하면 “비나 진눈깨비가 축축하게 자꾸 내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순 우리말이다. 뒤를 쫓다가 사이가 꽤 떨어지면 ‘멀찍이’라 쓸 수 있지만, 이와 달리 ‘멀짝멀짝’은 “겉으로는 된 듯하면서 조금 무른 모양”을 나타낼 때 쓰는 순 우리말이다.
어떤 특정한 일이 일어난 때를 기리어 1년씩 기준하여 헤아리는 단위로 ‘주년’과 ‘주기’가 있다. 해마다 돌아오는 그 날을 순 우리말로 ‘돌’이라고 하는데, 이 돌이 돌아온 해를 바로 ‘주년’이라고 한다. 4월 7일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지 꼭 123년이 되는 날이므로 이 날을 ‘『독립신문』 창간 123돌’이라 하고, 올 한 해를 ‘『독립신문』 창간 123주년’이라 부르는 것이다.
‘주기’는 사람이 죽은 뒤 해마다 돌아오는 그 죽은 날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주기’는 바로 제삿날이 된다. 지난 3월 7일이 한글 타자기 발명가인 공 병우 선생의 24주기였다. 이때 ‘주기’ 대신에 ‘주년’을 사용하여 올 한 해를 ‘공병우 선생 서거 24주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돌아가신 날이 24번째로 돌아온 해이기 때문이다. 다만, ‘주기’에는 이미 사망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때에는 ‘서거’를 떼고 그냥 ‘24주기’라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꽃’을 달고 있는 우리말은 매우 많다. 잠깐 동안 눈이 꽃잎처럼 가볍게 흩뿌리듯이 내리면 ‘꽃눈’이고, 비가 꽃잎처럼 가볍게 흩뿌리듯이 내리면 “꽃비”이다. 비나 눈이 아니라 진짜 꽃잎이 바람에 날려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것을 “꽃보라”가 날린다고 한다. 이렇게 꽃보라가 날리는 들판을 걷다 보면 꽃향기에 취하여 어지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것을 “꽃멀미”라고 한다. 꽃을 단 우리말은 사람에게도 여럿 있다. 아이가 자라서 사춘기가 되면 덩치도 부쩍 커지고 목소리도 변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어릴 때 보지 못하던 새로운 기운이 솟아난다. 이처럼 사춘기에 솟아나는 기운을 “꽃기운”이라고 한다. 꽃기운을 잘 이끌어주어서 사회의 재목이 되게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다. 여자의 경우, 스무 살 안팎의 한창 젊은 나이를 방년 또는 묘령이라고 하는데, 순 우리말로는 “꽃나이”라고 한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이란 말을 가끔 듣는다. 그러나 이때는 ‘살을 에이는’이 아니라,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라고 하거나 피동형으로 “살이 에이는 듯한 찬바람”이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커다란 슬픔을 겪게 되면 “가슴을 에이는 슬픔”이 아니라, “가슴을 에는 슬픔”이나 “가슴이 에이는 슬픔”이라 해야 바른말이 된다.
때때로 피동 표현뿐만 아니라 간단한 동사의 관형형을 혼동하기도 한다. 가령, 고기나 뼈를 물에 푹 삶는다는 뜻으로 쓰는 낱말은 ‘고다’인데, 이것을 “푹 고은 소뼈”처럼 쓰는 사례가 있다. 그러나 ‘고다’의 관형형은 ‘고은’이 아니라 ‘곤’이다. 그래서 “푹 곤 소뼈”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소뼈를 푹 고으다’가 아니라, ‘푹 고다’이고, ‘푹 고으는 동안’이 아니라 ‘푹 고는 동안’이 바른 표현이다.
우리말에는 같은 낱말을 반복하여 뜻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 바람이 차다.”고 할 때의 ‘차다’를 강조하고자 할 때에는 ‘차다’를 반복해서 쓰면 된다. 그러니까 “매우 차다.”라는 뜻의 말은 ‘차디차다’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매우 높다.”, “무척 곱다.”라고 할 때에는 ‘높디높다’, ‘곱디곱다’처럼 쓰고, “아주 넓다.”, “더 없이 붉다.”, “몹시 짜다.”라는 말들은 각각 ‘넓디넓다’, ‘붉디붉다’. ‘짜디짜다’ 들과 같이 반복해서 쓰면 된다.
다만, 어간이 ㄹ받침으로 끝나는 ‘달다’와 ‘잘다’의 경우에는 ‘달디달다’, ‘잘디잘다’라 하지 않고, 예외적으로 받침이 탈락해서 ‘다디달다’, ‘자디잘다’라고 한다. 그리고 ‘달다’와 ‘잘다’를 제외한, 나머지 ㄹ받침이 들어가는 말들, 가령 ‘길다’, ‘멀다’ 들은 받침의 변화 없이 ‘길디길다’, ‘멀디멀다’라고 말하면 된다.
본디 ‘파랗다’라는 용언이 활용할 때에는 어간인 ‘파랗-’의 받침 히읗이 ㄴ이나 ㅁ으로 시작되는 어미 앞에서 탈락한다(ㅎ불규칙활용). 그래서 ‘파랗다’가 ‘파라니’, ‘파라면’으로 ㅎ이 탈락해서 쓰이고, ‘빨갛다’가 ‘빨가니’, ‘빨가면’으로 변하여 쓰인다. 이에 따라 꽃이 빨갛다고 할 때, ‘빨갛네’와 ‘빨가네’ 중 ‘빨가네’가 바른 표현이라고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2016년 1월부터 국립국어원은 현실의 쓰임을 반영하여 ‘파랗네’, ‘빨갛네’ 들과 같이 ‘ㅎ’을 탈락시키지 않고 쓰는 것도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종결어미 ‘-습니다’가 결합하는 경우는 ‘ㅎ’이 탈락하는 환경이 아니므로 ‘파랍니다’가 아니라 ‘파랗습니다’와 같이 활용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미세먼지가 걷힌 하늘이 파랍니다.”는 말은 “미세먼지가 걷힌 하늘이 파랗습니다.”로 바로잡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집 마당에 핀 꽃이 빨갑니다.”도 “우리 집 마당에 핀 꽃이 빨갛습니다.”로 말해야 올바른 표현이 된다.
“발목을 접질러 친구가 부축해 주었다.”와 같이 ‘접지르다’란 말을 흔히 쓰고 있지만, 이때는 ‘접지르다’가 아니라 ‘접질리다’가 바른말이다. “발목을 접질려 친구가 부축해 주었다.”처럼 고쳐 써야 한다. ‘접질리다’는 “심한 충격으로 지나치게 접혀서 삔 지경에 이르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문장 안에서 ‘접질리어, 접질려, 접질리니’처럼 활용된다. “넘어져서 팔을 접질렀다.”는 “넘어져서 팔을 접질렸다.”로 쓴다.
‘접질리다’와 비슷한 말로 ‘겹질리다’라는 말이 또 있다. ‘접질리다’와 활용형도 같다. “몸의 근육이나 관절이 제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거나 지나치게 빨리 움직여서 다칠” 때 겹질렸다고 한다. 예를 들면, “팔을 잘못 짚어 팔목이 겹질렸다.”라든지, “차에서 내리다 발목을 겹질렸다.”처럼 쓰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겹지르다’는 말은 없기 때문에 ‘겹질러’, ‘겹지르면’, ‘겹질렀다’ 들은 바른말이 아니다.
‘비치다’와 ‘비추다’는 말소리가 비슷하여 헷갈리기 쉽다. ‘비치다’는 “어둠 속에 불빛이 비친다.”, “밝은 빛이 창문으로 비치고 있다.”처럼 ‘빛이 나서 환하게 되다’는 뜻이다. 또, ‘빛을 받아 모양이 나타나 보이다’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번쩍이는 번갯불에 어떤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와 같은 예가 그러한 경우이다. 그런가 하면, 얼굴을 잠시 나타내거나 슬쩍 말을 꺼내는 것도 모두 ‘비치다’를 쓴다.
이에 반해 ‘비추다’는 ‘빛을 내는 대상이 다른 대상에 빛을 보내어 밝게 하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예를 들어, “손전등을 비추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마루를 비추고 있었다.”와 같은 경우에는 모두 ‘비추다’로 써야 하는 것이다. 또,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처럼, ‘빛을 반사하는 물체에 어떤 물체의 모습이 나타나게 하다’는 뜻으로 쓰일 때도 ‘비추다’가 맞다.
목이나 허리라든가 팔뚝, 종아리 등의 굵기는 ‘굵다’, ‘가늘다’로 나타낸다. “팔뚝이 얇다”가 아니라 “팔뚝이 가늘다”이고, “종아리가 두껍다”가 아니라 “종아리가 굵다”로 말해야 옳다. 이런 말들은 사실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단계에서 익히는 것들인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에 와서 굵기와 두께가 자주 혼동되고 있다.
‘두껍다’는 물체의 두께가 보통의 정도보다 크다는 뜻으로 쓰이고, ‘얇다’는 그 반대로 두께가 작다는 뜻으로 쓰인다. 가령 “두꺼운 입술이 그의 매력이다.”처럼, 우리 몸에서도 입술의 두께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굵다’는 “손마디가 굵어서 반지가 잘 들어가지 않는다.”처럼, ‘길쭉한 물체의 둘레가 크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이와 반대로 “머리카락이 가늘어졌다.”와 같이 둘레가 작으면 ‘가늘다’라고 표현한다.
집을 보기 좋게 잘 꾸미는 일을 흔히 ‘인테리어’라는 영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도 ‘집치레’라는 토박이말이 있다. 이에 비해 집을 새로 꾸미지는 않고, 그냥 손볼 곳만 고쳐 가며 집을 잘 가꾸고 돌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에 쓰는 말은 ‘집가축’이다. “이번 연휴 때는 집가축을 하며 지냈다.”처럼 쓴다. 집치레나 집가축과는 달리, 집안의 여러 집물 따위를 옳게 간수하기 위해 정돈하거나 단속하는 일은 “집단속을 든든히 했다.”처럼 ‘집단속’이라 한다. 집단속을 했든 아니 했든 누군가 남의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찾기 위해 뒤지는 일을 ‘집뒤짐’이라 한다. ‘가택수색’이라는 어려운 말을 일부러 만들어 쓸 까닭이 없다. 또, 예전에는 집 흥정을 붙이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을 ‘집주릅’이라 불렀다. 요즘에는 ‘부동산 중개인’이 일반화했지만, 집 매매만을 전문으로 중개한다면 지금도 ‘집주릅’을 살려 쓸 수 있겠다.
사회에 크게 이바지하고도 그 일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일을 해놓고도 아주 큰 일을 이룬 것처럼 여기저기 자랑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특히 요즘에는 페이스북과 같은 사회적 소통망이 발달하다 보니, 시시콜콜한 나날살이에서도 자랑거리를 만들어 내세우는 일이 잦다. 이처럼 “이야기를 과장하여 늘어놓는 것”을 ‘떠벌리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발음이 비슷한 경우로서 ‘떠벌이다’는 말도 있다. ‘떠벌리다’와 ‘떠벌이다’는 다른 낱말이다. ‘떠벌이다’는 “어떤 판을 크게 벌이다”는 뜻이다. ‘떠벌리다’가 좀 부정적인 말인 데 비해, ‘떠벌이다’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집값이 두 배로 올랐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라고 말할 때는 ‘떠벌리다’이고, “혼인 잔치를 크게 떠벌여 놓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고 할 때에는 ‘떠벌이다’라고 말한다.
6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갈을 육젓이라고 한다. 이때 “젓갈을 담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기본형이 ‘담구다’가 아닌 ‘담그다’이므로, ‘담가’, ‘담가서’, ‘담갔다’ 들처럼 부려 써야 한다. 따라서 이 말은 “젓갈을 담갔다.”로 쓰는 것이 바르다. 마찬가지로, “나올 때 문을 꼭 잠궈라.”처럼 ‘잠궈라’, ‘잠궜다’로 말하는 것도 ‘잠가라’, ‘잠갔다’와 같이 바루어야 한다. 이 경우에도 ‘잠그다’가 기본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뜨겁게 달궜다.”, “찬물에 헹구다.”에서와 같이 기본형이 ‘달구다’, ‘헹구다’와 같은 경우에는 ‘달구어/헹구어’, ‘달구어라/헹구어라’, ‘달구었다/헹구었다’ 들처럼 쓰게 되므로, 이를 ‘달궈/헹궈’, ‘달궈라/헹궈라’, ‘달궜다/헹궜다’로 줄여 쓸 수 있다. ‘담그다’, ‘잠그다’와는 표기가 다르니 유의해야 하겠다.
받침소리가 이어져 소리 나는 말들 가운데 잘못 적기 쉬운 말들이 많다. ‘높다’의 사동형인 ‘높이다’를 ‘높히다’로 쓴다든가, ‘짐작이 가다’는 뜻으로 쓰이는 ‘짚이다’를 ‘짚히다’로 쓰는 경우가 그러한 예들이다. 또 “얼음을 녹이다.”라는 말을 “얼음을 녹히다.”로 적는 사례와 “뚜껑이 덮이다.”를 “뚜껑이 덮히다.”로 적는 경우도 무척 많다. 이 낱말들의 ‘-히-’는 모두 ‘-이-’로 적어야 한다.
특히, ‘돋다’는 ‘-히-’를 붙여 피동 표현으로 만들 수 없는 자동사이다. ‘가시 돋힌 말’은 ‘가시 돋은 말’이나 또는 ‘가시 돋친 말’로 바꾸어 써야 한다. 이때 ‘돋치다’는 ‘돋다’의 피동 표현이 아니라 ‘돋다’에 강조의 의미를 더하는 접사 ‘-치-’를 붙여 만든 낱말로, ‘돋아서 내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넘다’에 ‘-치-’를 붙여 ‘넘치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날개 돋힌 듯 팔렸다.”라는 말 또한 “날개 돋친 듯 팔렸다.”로 써야 바른 표현이 된다.
봄철에 느끼는 나른한 기운을 ‘봄고단’이라고 한다. 흔히 ‘춘곤증’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예부터 우리는 “요즘 봄고단을 느끼는지 낮에도 자꾸 졸음이 옵니다.”처럼 말하고 썼다. 봄고단으로 몸이 무거울 때에는 봄철에 나는 싱싱한 채소를 먹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데, 봄에 가꾸어서 먹는 여러 가지 채소를 ‘봄채마’라고 한다. 쑥이나 달래, 냉이, 두릅 같은 채소가 이맘때 먹는 봄채마라 할 수 있다.
봄채마를 충분히 먹고 건강관리를 잘해서 봄고단을 이겨내야 ‘봄살이’를 장만하는 데 무리가 없겠다. ‘여름살이’나 ‘가을살이’, ‘겨우살이’라는 말이 있듯이, 봄철에 먹고 입고 지낼 양식이나 옷가지를 ‘봄살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봄살이가 그리 쉽지 않아서, 봄철이 지나는 동안 잘 지냈느냐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곤 했는데, 이때 “봄새 별고 없으신지요?” 하는 안부말이 쓰였다. ‘봄새’는 “봄철이 지나는 동안”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우리말이다.
우리 말글살이에서 피동형을 잘못 쓰고 있는 사례들이 무척 많다. “살아있는 신으로 불리웠다.”는 말은 “살아있는 신으로 불리었다.”처럼 ‘불리웠다’를 ‘불리었다’로 고쳐 써야 한다. ‘부르다’의 피동 표현은 ‘불리다’이지 ‘불리우다’가 아니다. “땅에 구덩이가 패였다.”처럼 ‘패이다’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말이다. 본디 골이나 구덩이가 생기게 하는 것을 ‘파다’라고 하므로, ‘파다’의 피동형은 ‘파이다’가 된다. 따라서 “땅에 구덩이가 패였다.”는 “땅에 구덩이가 파였다.”로,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는 “주름살이 깊게 파였다.”로 고쳐 써야 한다. 이때 ‘파이다’는 ‘패다’로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주름살이 깊게 파였다.”는 “주름살이 깊게 팼다.”로도 쓸 수 있다. 또, 흔히 “날씨가 개인다.”고 말하는데 “날씨가 갠다.”가 옳다. 마찬가지로 “날이 개였다.”가 아니라 “날이 갰다.”가 바른 표현이다.
요즘은 입맛이 당기는 계절이다.”와 “요즘은 입맛이 댕기는 계절이다.”, “입맛이 땅기는 계절이다.” 가운데 어느 것이 올바른 표현일까? ‘당기다’와 ‘댕기다’, ‘땅기다’는 모양과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하기 쉬운 말들이다. 이들 가운데 ‘입맛이 돋우어진다’, ‘식욕이 생긴다’는 뜻으로 쓰는 말은 ‘당기다’이다. 그러므로 “요즘은 입맛이 땅기는 계절”이 아니라 “입맛이 당기는 계절”이라고 말해야 한다.
‘땅기다’ 또한 표준말이지만 그 뜻과 쓰임이 다르다. 이 말은 ‘몹시 단단하고 팽팽하게 되다.’는 뜻을 지닌 동사이다. “얼굴이 땅긴다.”라든지, “하루 종일 걸었더니 종아리가 땅긴다.”, “너무 크게 웃어서 수술한 자리가 땅겼다.”처럼 쓰인다. 그리고 가끔 “입맛이 댕긴다.”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댕기다’는 “담배에 불을 댕겼다.”처럼, ‘불이 옮아 붙거나, 불을 옮겨 붙일 때’ 쓰이는 말이다.
‘-째’는 ‘그대로’ 또는 ‘전부’라는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그래서 항상 앞에 나오는 말과 붙여서 쓴다. “낙지를 통째로 삼켰다.”는 물론이고, “포도를 씨째 먹었다.”라든지, “약초를 뿌리째 캤다.” 들에서는 모두 ‘-째’를 붙여 쓴다.
반면에 앞 말과 띄어 써야 하는 의존명사 ‘체’는 ‘거짓으로 꾸미는 태도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주로 ‘~하는 체하다’의 형태로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다 알고도 모르는 체했다.”라든지, “일하기 싫어서 아픈 체했다.”, “잘난 체하다 망신을 당했다.” 같은 말들에서는 모두 ‘체’로 쓴다.
이에 비해 ‘채’는 ‘이미 있는 상태 그대로’라는 뜻으로 쓰이는 의존명사이다. 주로 ‘~하는 채’, ‘~하는 채로’의 형태로 많이 쓰이는데, “앉은 채 의식을 잃었다.”에서도 ‘채’로 써야 한다. 그 밖에도 “옷을 입은 채 냇물에 빠졌다.”, “토끼를 산 채로 잡았다.”라고 할 때에도 모두 ‘채’가 쓰인다.
‘월세’, ‘사글세’에는 모두 ‘세’를 붙여 쓴다. 집을 빌리고 계약에 따라 일정한 돈을 의무적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세’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전기세’, ‘수도세’ 같은 말들은 옳지 않다(『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각각 “전기료/수도료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로 올려놓았음). 집세와는 달리, 전기나 수돗물 사용에 드는 비용은 계약에 따라 일정하게 내는 돈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기가 사용한 만큼만 내는 요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세’ 대신에 ‘요금’을 붙여서, ‘전기요금’, ‘수도요금’이라고 말한다. 굳이 줄여 쓴다면 ‘전기세’, ‘수도세’가 아니라, ‘전기료’, ‘수도료’처럼 쓰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세’와 ‘요금’을 구별하는 가장 우선되는 기준은 빌려 쓰는 대가로 치르는 돈이냐, 어떤 서비스를 사용한 만큼 내는 돈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자리를 빌려 썼을 때 돈을 낸다면 ‘자릿세’이고, 통신 서비스를 사용한 뒤에 내는 돈은 ‘통신 이용료’이다.
‘~답다’는 어떤 말 뒤에 붙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사람답다’, ‘남자답다’, ‘어른답다’처럼 쓰게 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닌데 ‘사람답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여자에게 ‘남자답다’고 한다든지 미성년자에게 ‘어른답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여자에게 “참 남자다운 면이 보이네요.”라고 말하면 잘못이다. 이때에는 “남성스러운 면이 보이네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스럽다’는 어떤 말에 붙어서 “~한 느낌이나 성질이 있다.”는 뜻을 보태어 준다. 여자 같은 남자에게는 본래 남자이지만 여성의 느낌이나 성질이 있다는 뜻을 더해서 ‘여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고, 남자 같은 여자에게는 ‘남성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른처럼 행동하는 미성년자에게는 ‘어른답다’가 아니라 ‘어른스럽다’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은 어떠한 말로도 나타내기 힘들다. “슬픔으로 가슴이 메어진다.”라고 흔히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은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진다.”라고 해야 올바르다. ‘뭔가가 가득 차서 터질 듯하다’는 뜻의 말은 ‘메어지다’가 아니라 ‘미어지다’이다. 따라서 슬픔이나 고통이 가득 차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때에는 “가슴이 미어진다.”처럼 ‘미어지다’를 써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메어지다’는 어떤 뜻으로 쓰일까? 이 말은 ‘메다’에 ‘-어지다’가 붙은 말로서, ‘메다’는 “목이 메다”처럼 “어떤 감정이 북받쳐 목소리가 잘 나지 않다.”는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메어지다’라고 하면 ‘감정이 북받쳐 목소리가 잘 나지 않게 되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경우에도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와 같이 ‘메어지다’보다는 ‘메다’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가 많이 와서 계곡물이 많아지는 모습을 “계곡물이 불기 시작했다.”로 나타내는 경우가 가끔 있다. ‘붇다’와 ‘불다’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곡물이 붇다’는 “계곡물이 붇기 시작했다.”로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체중이 불기 전에” 하는 표현도 “체중이 붇기 전에”로 해야 맞다. 이처럼 부피가 커지거나 분량이 늘어나는 것은, ‘풍선을 불다’라고 할 때의 ‘불다’와는 전혀 다른, ‘붇다’가 기본형이다.
이 ‘붇다’의 ‘ㄷ’ 받침이 ‘ㄹ’로 바뀔 때가 있는데, 그것은 “계곡물이 불어서”라든지 “체중이 불으니”처럼 ‘-어서’, ‘-으니’ 같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 쓰이는 경우이다. 그러나 “체중이 불면”, “라면이 불면”과 같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표현이다. “체중이 불면”은 “체중이 불으면”으로 고쳐 써야 하고, “라면이 불면”도 “라면이 불으면”으로 써야 한다.
친구가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면서 한숨을 푹푹 쉬는 것을 보고, “무슨 고민이 있기에 땅만 쳐다보며 걷니?”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얼른 들어서는 자연스러운 말이지만, 이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쳐다보다’ 하는 말은 “얼굴을 들고 올려다보다.”는 뜻인데, 걸어가면서 땅을 올려다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고 걸을 때에는 땅을 ‘내려다보다’가 올바른 표현이다. “무슨 고민이 있기에 땅만 내려다보며 걷니?” 하고 고쳐서 말해야 한다.
비슷한 말 가운데, ‘내다보다’가 있다.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을 ‘내다보다’라고 하며, 반대로 밖에서 안을 보면 ‘들여다보다’라고 한다. 안에서 밖을 보면 먼 데까지 보이기 때문에 ‘내다보다’는 “멀리 앞을 보다”는 뜻도 가지고 있고, 거꾸로 밖에서 안을 보는 ‘들여다보다’는 “가까이서 자세히 살피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밖에서 안을 보든, 안에서 밖을 보든 상대가 모르게 숨어서 보게 되면 ‘엿보다’라고 말한다.
‘빠르다’는 말이 나날살이에서 더러 잘못 쓰이고 있다. 가령 “우리 아이에게 너무 빨리 영어교육을 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이 말은 “우리 아이에게 너무 일찍(또는 ‘너무 이르게’) 영어교육을 시키는 게 아닐까?”로 고쳐야 올바른 표현이 된다. “약속 장소에 1시간이나 빨리 나와서 기다렸다.”는 말도 “약속 장소에 1시간이나 일찍 나와서 기다렸다.”로 고쳐 써야 한다.
‘빠르다’는 말은 “어떤 동작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다.”는 뜻으로, ‘속도’와 관계가 있는 말이다. “나이가 드니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라든가, “걸음이 빠르다.”, “말이 빠르다.”, “손놀림이 빠르다.” 들처럼 쓴다. 이와는 달리, “계획한 때보다 앞서”라는 뜻으로 쓰는 말은 ‘일찍’, 또는 ‘이르다’이다. 이 말들은 속도가 아니라 ‘시기’, ‘때’와 관계가 있다. “그는 여느 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올해는 예년보다 김장 담그기가 이른 감이 있다.” 들처럼 쓴다.
비탈이 심한 곳에 가보면 “이곳은 가파라서 위험하니 주의하십시오.” 하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가파르다’는 말은 ‘가파른, 가파르니, 가파르고’ 들처럼 쓰이지만, ‘가파라서’라고 하면 어법에 맞지 않다. 이때에는 “이곳은 가팔라서 위험하니 주의하십시오.”처럼, ‘가팔라, 가팔라서’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 된다.
‘가파르다’는 ‘가팔라서’로 쓰이지만 ‘모자라다’는 ‘모자라서’로 쓰인다. “경험이 모잘라서 위험한 길로만 다녔다.”는 “경험이 모자라서 위험한 길로만 다녔다.”로 해야 바른 말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머무르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준말인 ‘머물다’도 표준말이기 때문에, 가끔 “대피소에 잠시 머물었다.”처럼 ‘~에 머물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드물다’가 ‘드물었다’로, ‘아물다’가 ‘아물었다’로 쓰이는 것과는 다르다. ‘머물다’의 본디 형태가 ‘머무르다’이므로, 이때는 ‘머물었다’가 아니라 ‘머물렀다’라고 해야 맞다.
오월 들어 긴 연휴가 시작되면서 소비시장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뜨인다. 낱말 표현이 잘못 되었다. 우리는 가끔, 몸을 쭉 펴고 팔다리를 뻗어 몸을 활기차게 하는 것을 “기지개를 편다.”고 말할 때가 있지만, “기지개를 켠다.”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 된다. ‘켜다’는 “불을 켠다.”처럼 ‘불을 붙이거나 밝히다’는 뜻으로 쓰는 말인데, ‘기지개’라는 말과도 함께 어울려 “기지개를 켠다.”라고 말한다.
또, 물을 들이마시는 것도 “물을 켠다.”라고 할 수 있다. 갈증이 나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은 물을 ‘들이키는’ 모습이 아니라 ‘들이켜는’ 모습이라고 해야 올바르다. ‘물이나 술을 단숨에 마구 마시는 것’은 ‘들이켜다’이다. ‘들이키다’는 어떤 물체를 ‘안쪽으로 가까이 옮기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예를 들면, “복잡한 통로에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발을 들이키는 것이 올바른 예절이다.”처럼 쓴다.
우리가 의심 없이 쓰고 있는 ‘집에 갈려고’, ‘밥을 먹을려고’, ‘일찍 잘려고’, ‘오늘 할려고’ 들과 같은 말들이 있다. 잘못 된 발음이다. ‘갈려고’는 동사 ‘가다’의 어간에 어미 ‘-려고’가 붙어 쓰인 경우인데, 중간에 ‘ㄹ’ 소리가 불필요하게 끼어들었다. 이 말은 ‘갈려고’가 아니라 ‘가려고’가 맞다. ‘먹을려고’는 ‘먹으려고’가 맞고, ‘잘려고’는 ‘자려고’로, ‘할려고’도 ‘하려고’로 해야 올바른 말이 된다. 우리 대중가요 중에 “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세요.”라든가,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라는 가사들이 있는데, 이때의 ‘쓸려거든’, ‘웃을려고’ 들도 각각 ‘쓰려거든’, ‘웃으려고’를 잘못 쓴 것이다. ㄹ 받침을 넣어 말하는 경우는 ‘날다’, ‘울다’, ‘흔들다’ 들처럼, 어간이 ㄹ 받침으로 끝나는 말일 때에 한한다. 이때에는 ‘날려고’, ‘울려고’, ‘흔들려고’ 들처럼 말한다.
“분노를 삭히고 재발 방지에 힘을 모으자.”라는 기사문이 있다. 이때 ‘분노를 삭히고’란 말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화가 난 사람의 분노나 울분은 삭히는 것이 아니라 삭이는 것이다. “분노를 삭이고 재발 방지에 힘을 모으자.”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된다. ‘삭다’의 사동형인 ‘삭이다’는 “긴장이나 화가 풀려 마음이 가라앉다,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다.” 또는,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냉수 한 사발을 마시고는 분을 삭였다.”라든지, “밥 한 그릇을 다 먹고도 10분이면 삭이고, 또 먹는다.”처럼 쓰면 된다. 이와는 달리 ‘삭히다’는 “음식물이 발효되다.”는 뜻을 가진 ‘삭다’의 사동형이다. 흔히 “김치나 젓갈 따위가 발효되어 맛이 들게 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가령 “새우젓을 1년 동안 푹 삭혔더니 맛이 아주 좋다.”라든지, “감주는 밥을 삭혀서 만든다.”라고 할 때에는 ‘삭이다’가 아니라 ‘삭히다’를 써야 한다.
우리말에는 짐승의 새끼를 가리키는 말들이 꽤 발달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접미사 ‘아지’를 뒤에 붙여 쓰는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같은 것들로서, 이 말들은 지금도 나날살이에 쓰이고 있다.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살쾡이를 ‘삵아지’라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전혀 이름을 달리해서 부르는 경우도 많다. ‘병아리’가 그렇고, 꿩의 새끼인 ‘꺼병이’가 그렇다. ‘꺼병이’는 ‘꿩’을 뜻하는 ‘꺼’와 ‘병아리’를 가리키는 ‘병이’가 합쳐진 말로서 ‘꿩의 병아리’를 말한다. 짐승의 새끼를 가리키는 우리말 가운데는 요즘 나날살이에서 거의 쓰이지 않게 된 말들도 있다. 호랑이의 새끼는 ‘개호주’라 하였고, 곰의 새끼는 ‘능소니’라 불렀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더 이상 호랑이나 곰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개호주’, ‘능소니’ 같은 우리말들은 거의 잊혀가고 있다. 또, 바닷물고기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라고 하고, 명태 새끼는 ‘노가리’라고 부른다. ‘노가리’는 맥줏집 안주로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아쉽게도 고등어 새끼 ‘고도리’는 낯선 낱말이 되었다.
“가느다란 실이나 줄을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는 뜻으로 쓰는 ‘사리다’는 말이 있는데, ‘사리’는 바로 이 ‘사리다’에서 온 명사이다. 그래서 ‘사리’는 실이나 줄을 사려서 감은 뭉치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이 뭉치들을 세는 단위명사이기도 하다. 가령 철사나 새끼줄 따위는 둘둘 감아서 보관하는데 이렇게 감아놓은 뭉치를 셀 때 “철사 한 사리, 두 사리”, “새끼줄 한 사리, 두 사리”처럼 말한다. 철사나 새끼줄과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면발을 둘둘 감아놓은 뭉치도 사리로 센다. 음식점에서 국수를 먹을 때, 국물은 남았는데 양이 덜 차게 되면 면을 추가로 주문한다. 이때 면을(정확히는 면을 둘둘 감아놓은 뭉치를) 따로 시키려면 “면 한 사리 더 주세요.”라고 말하면 된다. 물론 ‘사리’는 면이 아니라 그 면을 세는 단위로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리’를 면이나 덤으로 오해하게 되면, 면은 사라지고 그냥 단위만 써서 “사리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마치 문구점에 가서 연필을 산 뒤에 추가로 주문하면서 그냥 “자루 하나 주세요.” 하는 것과 한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