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자료

세종대왕
1397(태조 6)~1450(세종 32). 조선 제4대왕. 재위 1418~1450년. 이름은 도, 자는 원정, 시호는 장헌, 능은 영릉. 태종의 3자,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 비는 심온의 딸 소헌왕후.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3년 충녕대군에 진봉, 1418년 6월 형 양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그 대신 세자에 책봉되어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 임금은 우리 역사에서뿐 아니라, 세계 인류 역사에도 드물게 보는 위인이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정사를 보살피면서 독서와 사색에 머리쓰기를 쉬지 않았으며, 의지가 굳어서 옳다고 생각한 일은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기어코 실행하였다. 널리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본위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1420년 집현전을 설치, 1421년 도성을 개축하는 한편, 1426년 나이가 젊고 재주 있는 문신을 뽑아 사가독서하게 했고, 이듬해 태배법을 철폐, 1433년 최윤덕을 북변에 보내어 파저강의 야인을 정벌, 1437년 김종서로 하여금 두만강 방면에 6진을 설치하게 했다. 이 밖에 수재, 한발로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 태조의 "경제육전"을 따라 "속육전" 및 "육전등록"을 편찬, 도천법을 설치하여 숨은 인재의 등용에 진력했고, "농사직설"을 편찬 반포하게 하여 농업 발전에 공헌했다.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반포하는 한편 정음청을 두어 유교 전적. 음운서 등의 국문 ㅊㄹ간을 담당하게 했으며, 학문의 장려에 힘쓰면서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고려사", "역대 병요",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했다. 서적의 간행에 따라 활자, 인쇄술의 개량,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의 동활자가 주조되고 국문 활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기를 개조하여 고래의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게 했으며, "정대업", "보태평" 등 저명한 악곡을 제작하게 하였다.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일구, 앙부일구, 자격루, 누호, 일성정시의 등 천문 기계를 제작하게 했으며,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하였다.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등 역서를 짓게 했고,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여 세계 최초로 우량을 측정하게 했다. 농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공법의 제정에 의한 전세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진력했다.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종래의 5교, 양종을 '선, 교'의 2종으로 통합 정비하는 등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만년에는 불교를 장려했다. 한편 무비에도 힘써 6진뿐 아니라 압록강 방면에 4군을 설치했고, 군사 훈련, 무기 제조, 성진 수축, 병선 개량, 병서 간행 등에도 힘썼다.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세견선을 허락하는 등으로 회유책을 쓰고, 1419년 비인현에 왜구가 침입하자 도체찰사 이종무를 시켜 그 소굴 쓰시마도를 정벌하게 했으나 다시 본래의 평화주의로 돌아가 쓰시마도 사람들을 위해 삼포를 개항했다. 재위 32년간에 내정, 외치, 문화 등에 크게 기여하여 우리 나라 역대 군주 가운데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조는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 대왕 해적이〉
1397년(태조 6년, 1세)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에서 정안군(태종) 이방원과 여흥 민씨(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1408년(태종 8년, 12세) 2월 11일(양력 3월 17일)-충녕군에 책봉되다.
1408년(태종 8년, 12세) 2월 16일(양력 3월 22일)-우부대언 심온의 딸 심씨(소헌왕후)와 혼인하다.
1412년(태종 12년, 16세) 5월 3일(양력 6월 20일)-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태종 18년, 22세) 6월 3일(양력 7월 15일)-왕세자에 책봉되다.
1418년(태종 18년, 22세) 8월 10(양력 9월 18일)-근정전에서 즉위 조선조 제4대 임금이 되시다.
1419년(세종 1년, 23세) 6월 17∼29일-대마도를 정벌하다.
1419년(세종 1년, 23세) 9월 20일-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다.
1419년(세종 1년, 23세) 9월 26일-노상왕 정종이 승하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윤1월 23일-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다.
1420년(세종 2년, 24세) 2월 22일-강무장을 일정한 장소로 정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3월 16일-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하고, 문신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고문에 대비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7월 10일-대비 원경왕후가 승하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10월-주자소에서 활자 경자자를 만들기 시작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11월 17일-서이궁이 낙성되다.
1421년(세종 3년, 25세) 1월 30일-유관과 변계량 등이 수교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1421년(세종 3년, 25세) 3월 24일-경자자를 완성하고 인쇄법을 개량하니, 하루에 20배의 능률을 올리다.
1421년(세종 3년, 25세) 6월 9일-신장(訊杖)의 제도를 정하여 태장을 마구 못치게 하다.
1421년(세종 3년, 25세) 10월 27일-원자 향(문종)을 세자로 책봉하다.
1421년(세종 3년, 25세) 12월 22일-사죄 삼복계(死罪三覆啓)의 법을 엄히 하다.
1422년(세종 4년, 26세) 1월 15일-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다.
1422년(세종 4년, 26세) 5월 10일-태상왕 태종이 승하하다.
1422년(세종 4년, 26세) 6월 20일-새로 개조한 저울을 중외에 반포하다.
1422년(세종 4년, 26세) 10월 29일-주자를 개주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2월 26일-경성 남산의 봉화대를 축조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9월 16일-조선통보를 주조하게 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12월 24일-정종과 태종 양조의 실록을 수찬하게 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12월 29일-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2월 7일-주전소를 경상도, 전라도에 두다.
1424년(세종 6년, 28세) 4월 5일-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종, 교종 양종 36사로 통합하여 불도를 정하게 닦도록 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6월 8일-환자미의 출납을 철저히 다스리다.
1424년(세종 6년, 28세) 8월 11일-고려사를 수교 편찬 완료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11월 15일-본국의 지지(地志)와 주부군현의 고금 연혁을 편찬하게 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11월 18일-악기도감에서 악기를 제조하다.
1425년(세종 7년, 29세) 2월 24일-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게 하다.
1425년(세종 7년, 29세) 5월 13일-서강 효령대군 별서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짓다.
1425년(세종 7년, 29세) 8월 26일-경기 남양에 옥인(玉人)을 보내어 돌을 캐어 가지고 와서 석경을 고체제대로 만들어 시험하게 하다.
1425년(세종 7년, 29세) 9월 25일-평양에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게 하다.
1425년(세종 7년, 29세) 12월 5일-태조실록을 재필사하다.
1426년(세종 8년, 30세) 8월 15일-춘추관에서 정종실록을 올리다.
1426년(세종 8년, 30세) 12월 3일-속육전과 등록을 편찬 완료하다.
1426년(세종 8년, 30세) 12월 11일-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는 이를 뽑아 사가독서하게 하다.
1427년(세종 9년, 31세) 5월 15일-경기 남양에서 나는 돌로 1틀(12개)의 편경을 만들어 올리다.
1427년(세종 9년, 31세) 9월 4일-종학을 설치하게 하다.
1427년(세종 9년, 31세) 9월 11일-향약구급방을 간행하도록 하다.
1428년(세종 10년, 32세) 11월 29일-육전과 등록을 편찬하다.
1429년(세종 11년, 33세) 5월 16일-정 초 등이 농사직설을 찬술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7월 5일 및 8월 10일-공법(貢法)의 편의 여부를 각도의 수령과 인민들에게 물어 가부의 숫자를 파악하다(우리 나라 최초의 여론조사).
1430년(세종 12년, 34세) 9월 27일-수차(水車)를 장려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9월 29일-주척(周尺)을 바로잡게 하고, 악보를 찬하게 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10월 19일 및 25일-공처 노비 산아 휴가에 대한 법을 정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11월 21일-사람의 등에 매질하는 편배를 법으로 금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윤12월 1일-아악보가 이룩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1월 12일-대소신민의 가사 제도(家舍制度)를 정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3월 17일-춘추관에서 태종실록 편찬을 완료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4월 18일-광화문이 이룩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4월 25일-태조, 정종, 태종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12월-향약채취월령을 편찬하다.
1432년(세종 14년, 36세) 1월 19일-맹사성 등이 신찬 팔도지리지를 편찬하다.
1432년(세종 14년, 36세) 6월 9일-설순 등이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1월 4일-황희 등이 산찬 경제속육전을 올리니, 인쇄하게 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4월-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 등이 파저강 야인 이만주를 토벌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1일-자성군을 설치하게 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9일-정초, 박연, 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올리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11일-향약집성방을 편찬 완료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8월 11일-정초, 이천, 정인지, 김빈 등이 혼천의를 올리니, 천체를 관측하게 하고, 이로부터 세종이 세자와 함께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서 정초 등과 함께 혼천의의 제도를 의논해 정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9월 12일-민속 가요를 채록시키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9월 16일-장영실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2월 14일-함길도 관찰사 김종서가 석막의 영북진 백안수소로 옮겨 배설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종성군을 설치하다. 이리하여 세종 31년(1449)까지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6진을 모두 개척하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6월 26일-자치통감훈의 편찬에 들어가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7월 2일-이천 등이 조판 주조의 법을 개량하고, 새활자 갑인자를 만들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10월 2일-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다.
1435년(세종 17년, 39세) 9월 12일-주자소를 경복궁 안에 옮겨 두다.
1436년(세종 18년, 40세) 10월 5일-공법(貢法)을 제정하다.
1436년(세종 18년, 40세) 12월-납활자 병진자를 만들다.
1437년(세종 19년, 41세) 4월 15일-주야 측후기인 일성정시의가 이룩되다.
1437년(세종 19년, 41세) 9월 7일 ∼ 16일-평안도 도절제사 이천 등이 파저강 야인을 정벌하다.
1437년(세종 19년, 41세) 10월 20일-경원성과 경흥성을 쌓다.
1438년(세종 20년, 42세) 1월 7일-대호군 장영실이 건설한 흠경각이 이룩되다.
1438년(세종 20년, 42세) 11월-신주무원록 음주가 이룩되다.
1439년(세종 21년, 43세) 7월 3일-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짓게 하다.
1439년(세종 21년, 43세) 8월 6일-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공험진과 윤관의 구성 터를 조사하게 하다.
1440년(세종 22년, 44세) 3월 8일-성혼기를 정해서 남자 16세, 여자 14세 이상으로 하다.
1440년(세종 22년, 44세) 5월 13일-종루가 이룩되다.
1440년(세종 22년, 44세) 7월 27일-대소 신민 제사(第舍)의 제도를 한정하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4월 29일-세자가 비가 올 때, 구리를 부어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시험하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6월 28일-정인지 등에게 치평요람을 편찬하게 하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8월 18일-측우기를 제작 비치하고, 양수표를 세우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9월 29일-명황계감이 이룩되다.
1442년(세종 24년, 46세) 5월 8일-측우의 제를 상정하다.
1442년(세종 24년, 46세) 8월 12일-신개, 권제 등이 찬술한 고려사를 올리다.
1442년(세종 24년, 46세) 9월 4일-태조, 정종, 태종의 실록을 수개하게 하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1월 7일-성혼기를 재조정하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4월 17일-세자(문종)에게 서무를 섭행시키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11월 13일-전제상정소를 설치하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12월 30일-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다.
1444년(세종 26년, 48세) 2월 16일-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다.
1444년(세종 26년, 48세) 10월 11일-집현전에서 오례의주를 상정하게 하다.
1444년(세종 26년, 48세) 11월 13일-전제상정소에서 전분 6등, 연분 9등의 제도를 정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1월 7일-신숙주, 성삼문,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어 운서를 질문하여 오게 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3월 30일-화전, 화포를 개량하니, 천자화포, 지자화포, 황자화포, 가자화포, 세화포의 사정 거리가 배 이상으로 늘어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3월 30일-이달에 치평요람이 이루어지고, 제가역상집이 이루어졌으며, 또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4월 5일-용비어천가 10권을 지어 올리니, 주해를 붙여 판에 새겨 발행하게 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10월 28일-의방류취가 이루어지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11월 21일-태조, 정종, 태종실록을 춘추관의 실록각, 충주사고, 전주사고, 성주사고에 나누어 갈무리하게 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2월 29일-이달에 환자 분급의 법을 상정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3월 24일-왕비 소헌왕후가 수양대군 제택에서 승하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7월 19일-소헌왕후를 영릉에 장사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9월 상한(양력 10월 9일)-훈민정음을 반포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루어지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9월 27일-새 영조척으로 곡·두·승·홉의 체제를 정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10월 11일-고려사를 다시 교정하게 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11월 8일-언문청을 설치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12월 26일-이과와 이전 취재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취하게 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2월-용비어천가의 주해가 완성되어 간행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6월 5일-치화평, 취풍형, 여민락 등의 악보를 이룩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7월 25일-석보상절이 이루어져 간행되고, 월인천강지곡이 이루어지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8월 30일-새로 숭례문을 짓게 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9월 29일-이달에 동국정운이 완성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11월-신숙주가 사성통고를 편찬하다.
1448년(세종 30년, 52세) 3월 28일-집현전에서 언문으로 사서를 번역하게 하다.
1448년(세종 30년, 52세) 7월 17일-문소전 서북의 공지에 불당을 짓게 하다.
1448년(세종 30년, 52세) 10월 17일-동국정운이 간행되어 반사하다.
1449년(세종 31년, 53세) 1월 4일-전찬(前撰)한 고려사를 다시 수교하게 하다.
1449년(세종 31년, 53세) 1월 28일-고려사의 보수를 춘추관에서 하도록 하고,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정창손에세 이를 감장하게 하다.
1449년(세종 31년, 53세)-사리영응기를 간행하다.
1450년(세종 32년, 54세) 2월 17일(양력 4월 8일)-세종대왕이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승하하다.
1450년(문종 즉위년) 6월 12일-소헌왕후 심씨가 안장된 영릉 서실에 합장하다.
1451년(문종 1년) 8월 25일-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고려사를 새로 편찬 완료하다.
1452년(문종 2년) 2월 20일-세종대왕의 신도비를 영릉에 세웠으니, 공조판서 정인지가 비문을 짓고, 안평대군 용이 전액을 썼다. 지금은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있다.
1452년(문종 2년) 2월 22일-세종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다.
1452년(단종 즉위년) 11월 28일-고려사를 인쇄하게 하다.
1454년(단종 2년) 3월 30일-춘추관에서 세종장헌대왕실록을 편찬 완료하다.
1455년(단종 3년) 중춘-홍무정운역훈을 간행하다.
1469년(예종 1년) 3월 6일-영릉을 여흥부치(지금의 여주)의 북쪽 성산의 남향한 언덕에 천안하다.
<해적이 도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397(태조 6)~1450(세종 32). 조선 제4대왕. 재위 1418~1450년. 이름은 도, 자는 원정, 시호는 장헌, 능은 영릉. 태종의 3자,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 비는 심온의 딸 소헌왕후.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3년 충녕대군에 진봉, 1418년 6월 형 양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그 대신 세자에 책봉되어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 임금은 우리 역사에서뿐 아니라, 세계 인류 역사에도 드물게 보는 위인이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정사를 보살피면서 독서와 사색에 머리쓰기를 쉬지 않았으며, 의지가 굳어서 옳다고 생각한 일은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기어코 실행하였다. 널리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본위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1420년 집현전을 설치, 1421년 도성을 개축하는 한편, 1426년 나이가 젊고 재주 있는 문신을 뽑아 사가독서하게 했고, 이듬해 태배법을 철폐, 1433년 최윤덕을 북변에 보내어 파저강의 야인을 정벌, 1437년 김종서로 하여금 두만강 방면에 6진을 설치하게 했다. 이 밖에 수재, 한발로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 태조의 "경제육전"을 따라 "속육전" 및 "육전등록"을 편찬, 도천법을 설치하여 숨은 인재의 등용에 진력했고, "농사직설"을 편찬 반포하게 하여 농업 발전에 공헌했다.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반포하는 한편 정음청을 두어 유교 전적. 음운서 등의 국문 ㅊㄹ간을 담당하게 했으며, 학문의 장려에 힘쓰면서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고려사", "역대 병요",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했다. 서적의 간행에 따라 활자, 인쇄술의 개량,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의 동활자가 주조되고 국문 활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기를 개조하여 고래의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게 했으며, "정대업", "보태평" 등 저명한 악곡을 제작하게 하였다.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일구, 앙부일구, 자격루, 누호, 일성정시의 등 천문 기계를 제작하게 했으며,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하였다.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등 역서를 짓게 했고,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여 세계 최초로 우량을 측정하게 했다. 농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공법의 제정에 의한 전세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진력했다.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종래의 5교, 양종을 '선, 교'의 2종으로 통합 정비하는 등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만년에는 불교를 장려했다. 한편 무비에도 힘써 6진뿐 아니라 압록강 방면에 4군을 설치했고, 군사 훈련, 무기 제조, 성진 수축, 병선 개량, 병서 간행 등에도 힘썼다.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세견선을 허락하는 등으로 회유책을 쓰고, 1419년 비인현에 왜구가 침입하자 도체찰사 이종무를 시켜 그 소굴 쓰시마도를 정벌하게 했으나 다시 본래의 평화주의로 돌아가 쓰시마도 사람들을 위해 삼포를 개항했다. 재위 32년간에 내정, 외치, 문화 등에 크게 기여하여 우리 나라 역대 군주 가운데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조는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 대왕 해적이〉
1397년(태조 6년, 1세)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에서 정안군(태종) 이방원과 여흥 민씨(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1408년(태종 8년, 12세) 2월 11일(양력 3월 17일)-충녕군에 책봉되다.
1408년(태종 8년, 12세) 2월 16일(양력 3월 22일)-우부대언 심온의 딸 심씨(소헌왕후)와 혼인하다.
1412년(태종 12년, 16세) 5월 3일(양력 6월 20일)-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태종 18년, 22세) 6월 3일(양력 7월 15일)-왕세자에 책봉되다.
1418년(태종 18년, 22세) 8월 10(양력 9월 18일)-근정전에서 즉위 조선조 제4대 임금이 되시다.
1419년(세종 1년, 23세) 6월 17∼29일-대마도를 정벌하다.
1419년(세종 1년, 23세) 9월 20일-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다.
1419년(세종 1년, 23세) 9월 26일-노상왕 정종이 승하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윤1월 23일-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다.
1420년(세종 2년, 24세) 2월 22일-강무장을 일정한 장소로 정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3월 16일-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하고, 문신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고문에 대비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7월 10일-대비 원경왕후가 승하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10월-주자소에서 활자 경자자를 만들기 시작하다.
1420년(세종 2년, 24세) 11월 17일-서이궁이 낙성되다.
1421년(세종 3년, 25세) 1월 30일-유관과 변계량 등이 수교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1421년(세종 3년, 25세) 3월 24일-경자자를 완성하고 인쇄법을 개량하니, 하루에 20배의 능률을 올리다.
1421년(세종 3년, 25세) 6월 9일-신장(訊杖)의 제도를 정하여 태장을 마구 못치게 하다.
1421년(세종 3년, 25세) 10월 27일-원자 향(문종)을 세자로 책봉하다.
1421년(세종 3년, 25세) 12월 22일-사죄 삼복계(死罪三覆啓)의 법을 엄히 하다.
1422년(세종 4년, 26세) 1월 15일-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다.
1422년(세종 4년, 26세) 5월 10일-태상왕 태종이 승하하다.
1422년(세종 4년, 26세) 6월 20일-새로 개조한 저울을 중외에 반포하다.
1422년(세종 4년, 26세) 10월 29일-주자를 개주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2월 26일-경성 남산의 봉화대를 축조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9월 16일-조선통보를 주조하게 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12월 24일-정종과 태종 양조의 실록을 수찬하게 하다.
1423년(세종 5년, 27세) 12월 29일-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2월 7일-주전소를 경상도, 전라도에 두다.
1424년(세종 6년, 28세) 4월 5일-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종, 교종 양종 36사로 통합하여 불도를 정하게 닦도록 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6월 8일-환자미의 출납을 철저히 다스리다.
1424년(세종 6년, 28세) 8월 11일-고려사를 수교 편찬 완료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11월 15일-본국의 지지(地志)와 주부군현의 고금 연혁을 편찬하게 하다.
1424년(세종 6년, 28세) 11월 18일-악기도감에서 악기를 제조하다.
1425년(세종 7년, 29세) 2월 24일-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게 하다.
1425년(세종 7년, 29세) 5월 13일-서강 효령대군 별서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짓다.
1425년(세종 7년, 29세) 8월 26일-경기 남양에 옥인(玉人)을 보내어 돌을 캐어 가지고 와서 석경을 고체제대로 만들어 시험하게 하다.
1425년(세종 7년, 29세) 9월 25일-평양에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게 하다.
1425년(세종 7년, 29세) 12월 5일-태조실록을 재필사하다.
1426년(세종 8년, 30세) 8월 15일-춘추관에서 정종실록을 올리다.
1426년(세종 8년, 30세) 12월 3일-속육전과 등록을 편찬 완료하다.
1426년(세종 8년, 30세) 12월 11일-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는 이를 뽑아 사가독서하게 하다.
1427년(세종 9년, 31세) 5월 15일-경기 남양에서 나는 돌로 1틀(12개)의 편경을 만들어 올리다.
1427년(세종 9년, 31세) 9월 4일-종학을 설치하게 하다.
1427년(세종 9년, 31세) 9월 11일-향약구급방을 간행하도록 하다.
1428년(세종 10년, 32세) 11월 29일-육전과 등록을 편찬하다.
1429년(세종 11년, 33세) 5월 16일-정 초 등이 농사직설을 찬술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7월 5일 및 8월 10일-공법(貢法)의 편의 여부를 각도의 수령과 인민들에게 물어 가부의 숫자를 파악하다(우리 나라 최초의 여론조사).
1430년(세종 12년, 34세) 9월 27일-수차(水車)를 장려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9월 29일-주척(周尺)을 바로잡게 하고, 악보를 찬하게 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10월 19일 및 25일-공처 노비 산아 휴가에 대한 법을 정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11월 21일-사람의 등에 매질하는 편배를 법으로 금하다.
1430년(세종 12년, 34세) 윤12월 1일-아악보가 이룩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1월 12일-대소신민의 가사 제도(家舍制度)를 정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3월 17일-춘추관에서 태종실록 편찬을 완료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4월 18일-광화문이 이룩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4월 25일-태조, 정종, 태종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다.
1431년(세종 13년, 35세) 12월-향약채취월령을 편찬하다.
1432년(세종 14년, 36세) 1월 19일-맹사성 등이 신찬 팔도지리지를 편찬하다.
1432년(세종 14년, 36세) 6월 9일-설순 등이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1월 4일-황희 등이 산찬 경제속육전을 올리니, 인쇄하게 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4월-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 등이 파저강 야인 이만주를 토벌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1일-자성군을 설치하게 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9일-정초, 박연, 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올리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6월 11일-향약집성방을 편찬 완료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8월 11일-정초, 이천, 정인지, 김빈 등이 혼천의를 올리니, 천체를 관측하게 하고, 이로부터 세종이 세자와 함께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서 정초 등과 함께 혼천의의 제도를 의논해 정하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9월 12일-민속 가요를 채록시키다.
1433년(세종 15년, 37세) 9월 16일-장영실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2월 14일-함길도 관찰사 김종서가 석막의 영북진 백안수소로 옮겨 배설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종성군을 설치하다. 이리하여 세종 31년(1449)까지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6진을 모두 개척하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6월 26일-자치통감훈의 편찬에 들어가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7월 2일-이천 등이 조판 주조의 법을 개량하고, 새활자 갑인자를 만들다.
1434년(세종 16년, 38세) 10월 2일-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다.
1435년(세종 17년, 39세) 9월 12일-주자소를 경복궁 안에 옮겨 두다.
1436년(세종 18년, 40세) 10월 5일-공법(貢法)을 제정하다.
1436년(세종 18년, 40세) 12월-납활자 병진자를 만들다.
1437년(세종 19년, 41세) 4월 15일-주야 측후기인 일성정시의가 이룩되다.
1437년(세종 19년, 41세) 9월 7일 ∼ 16일-평안도 도절제사 이천 등이 파저강 야인을 정벌하다.
1437년(세종 19년, 41세) 10월 20일-경원성과 경흥성을 쌓다.
1438년(세종 20년, 42세) 1월 7일-대호군 장영실이 건설한 흠경각이 이룩되다.
1438년(세종 20년, 42세) 11월-신주무원록 음주가 이룩되다.
1439년(세종 21년, 43세) 7월 3일-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짓게 하다.
1439년(세종 21년, 43세) 8월 6일-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공험진과 윤관의 구성 터를 조사하게 하다.
1440년(세종 22년, 44세) 3월 8일-성혼기를 정해서 남자 16세, 여자 14세 이상으로 하다.
1440년(세종 22년, 44세) 5월 13일-종루가 이룩되다.
1440년(세종 22년, 44세) 7월 27일-대소 신민 제사(第舍)의 제도를 한정하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4월 29일-세자가 비가 올 때, 구리를 부어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시험하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6월 28일-정인지 등에게 치평요람을 편찬하게 하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8월 18일-측우기를 제작 비치하고, 양수표를 세우다.
1441년(세종 23년, 45세) 9월 29일-명황계감이 이룩되다.
1442년(세종 24년, 46세) 5월 8일-측우의 제를 상정하다.
1442년(세종 24년, 46세) 8월 12일-신개, 권제 등이 찬술한 고려사를 올리다.
1442년(세종 24년, 46세) 9월 4일-태조, 정종, 태종의 실록을 수개하게 하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1월 7일-성혼기를 재조정하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4월 17일-세자(문종)에게 서무를 섭행시키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11월 13일-전제상정소를 설치하다.
1443년(세종 25년, 47세) 12월 30일-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다.
1444년(세종 26년, 48세) 2월 16일-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다.
1444년(세종 26년, 48세) 10월 11일-집현전에서 오례의주를 상정하게 하다.
1444년(세종 26년, 48세) 11월 13일-전제상정소에서 전분 6등, 연분 9등의 제도를 정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1월 7일-신숙주, 성삼문,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어 운서를 질문하여 오게 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3월 30일-화전, 화포를 개량하니, 천자화포, 지자화포, 황자화포, 가자화포, 세화포의 사정 거리가 배 이상으로 늘어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3월 30일-이달에 치평요람이 이루어지고, 제가역상집이 이루어졌으며, 또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4월 5일-용비어천가 10권을 지어 올리니, 주해를 붙여 판에 새겨 발행하게 하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10월 28일-의방류취가 이루어지다.
1445년(세종 27년, 49세) 11월 21일-태조, 정종, 태종실록을 춘추관의 실록각, 충주사고, 전주사고, 성주사고에 나누어 갈무리하게 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2월 29일-이달에 환자 분급의 법을 상정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3월 24일-왕비 소헌왕후가 수양대군 제택에서 승하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7월 19일-소헌왕후를 영릉에 장사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9월 상한(양력 10월 9일)-훈민정음을 반포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루어지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9월 27일-새 영조척으로 곡·두·승·홉의 체제를 정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10월 11일-고려사를 다시 교정하게 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11월 8일-언문청을 설치하다.
1446년(세종 28년, 50세) 12월 26일-이과와 이전 취재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취하게 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2월-용비어천가의 주해가 완성되어 간행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6월 5일-치화평, 취풍형, 여민락 등의 악보를 이룩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7월 25일-석보상절이 이루어져 간행되고, 월인천강지곡이 이루어지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8월 30일-새로 숭례문을 짓게 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9월 29일-이달에 동국정운이 완성되다.
1447년(세종 29년, 51세) 11월-신숙주가 사성통고를 편찬하다.
1448년(세종 30년, 52세) 3월 28일-집현전에서 언문으로 사서를 번역하게 하다.
1448년(세종 30년, 52세) 7월 17일-문소전 서북의 공지에 불당을 짓게 하다.
1448년(세종 30년, 52세) 10월 17일-동국정운이 간행되어 반사하다.
1449년(세종 31년, 53세) 1월 4일-전찬(前撰)한 고려사를 다시 수교하게 하다.
1449년(세종 31년, 53세) 1월 28일-고려사의 보수를 춘추관에서 하도록 하고,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정창손에세 이를 감장하게 하다.
1449년(세종 31년, 53세)-사리영응기를 간행하다.
1450년(세종 32년, 54세) 2월 17일(양력 4월 8일)-세종대왕이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승하하다.
1450년(문종 즉위년) 6월 12일-소헌왕후 심씨가 안장된 영릉 서실에 합장하다.
1451년(문종 1년) 8월 25일-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고려사를 새로 편찬 완료하다.
1452년(문종 2년) 2월 20일-세종대왕의 신도비를 영릉에 세웠으니, 공조판서 정인지가 비문을 짓고, 안평대군 용이 전액을 썼다. 지금은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있다.
1452년(문종 2년) 2월 22일-세종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다.
1452년(단종 즉위년) 11월 28일-고려사를 인쇄하게 하다.
1454년(단종 2년) 3월 30일-춘추관에서 세종장헌대왕실록을 편찬 완료하다.
1455년(단종 3년) 중춘-홍무정운역훈을 간행하다.
1469년(예종 1년) 3월 6일-영릉을 여흥부치(지금의 여주)의 북쪽 성산의 남향한 언덕에 천안하다.
<해적이 도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힌샘 주시경
1876~1914. 한글 학자. 황해도 봉산 출생.
1890년부터 한학 수학.
1894년 배재학당 입학.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
협성회 조직.
1898년 배재학당 졸업.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조선문 동식회 결성.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쓰는 한편 강습소를 열어 한글 교육과 보급에 힘씀.
1905년 정부에 대하여 사전 편찬에 관한 건의서를 냄.
1907년 국문연구소의 위원이 됨.
1908년 한글학회의 전신인 국어 연구학회를 창설함. <저서>국어문전음학(1908). 국어문법(1910). 말의 소리(1914).
1876~1914. 한글 학자. 황해도 봉산 출생.
1890년부터 한학 수학.
1894년 배재학당 입학.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
협성회 조직.
1898년 배재학당 졸업.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조선문 동식회 결성.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쓰는 한편 강습소를 열어 한글 교육과 보급에 힘씀.
1905년 정부에 대하여 사전 편찬에 관한 건의서를 냄.
1907년 국문연구소의 위원이 됨.
1908년 한글학회의 전신인 국어 연구학회를 창설함. <저서>국어문전음학(1908). 국어문법(1910). 말의 소리(1914).

외솔 최현배
1894~1970. 한글학자. 철학자. 문학박사.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저 출생.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 1915년 졸업.
1910~1913년에 걸처 주시경 스승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한글과 말본을 배움.
1919년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 제1부 졸업.
1920년 경남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
1925년 일본 쿄토대학 대학원 수료.
1920~1938년 연희전문학교 교수 및 이화여전 교수. 그 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3년간 실직.
1941~1942년 연희전문 복직(도서관).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옥고.
1945년 조선어학회 상무이사.
1945~1948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1949년 한글 전용 추진회 회장. 한글학회 이사장.
1954년 학술원 회원.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장.
1955년 연희대학교 부총장.
1957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부회장.
1962년 건국공로훈장 받음.
1962년 한글기계화연구소 소장.
1964~1966년 동아대학교 교수.
1969년 제2회 민족상 받음.
1968~1970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이사.
1970년 국민회 이사 취임. <저서>조선민족갱생의 도(1926). 우리말본(첫째매, 1929). 중등조선말본(1934). 시골말 캐기 잡책(1936). 중등교육 조선어법(1936). 우리말본(분책, 1937). 한글의 바른길(1937). 한글갈(1940). 글자의 혁명(1947). 중등말본(1948).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1951). 한글의 투쟁(1950). 고등말본(1956). 중등말본(Ⅰ, Ⅱ, Ⅲ, 1956). 나라사랑의 길(1958). 한글 바로 적기 공부(1961). 고친 한글갈(1961). 나라 건지는 교육(1963). 한글 가로글씨 독본(1963). 배달말과 한글의 승리(1966). 한글만 쓰기의 주장(유고, 1970).
1894~1970. 한글학자. 철학자. 문학박사.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저 출생.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 1915년 졸업.
1910~1913년에 걸처 주시경 스승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한글과 말본을 배움.
1919년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 제1부 졸업.
1920년 경남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
1925년 일본 쿄토대학 대학원 수료.
1920~1938년 연희전문학교 교수 및 이화여전 교수. 그 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3년간 실직.
1941~1942년 연희전문 복직(도서관).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옥고.
1945년 조선어학회 상무이사.
1945~1948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1949년 한글 전용 추진회 회장. 한글학회 이사장.
1954년 학술원 회원.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장.
1955년 연희대학교 부총장.
1957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부회장.
1962년 건국공로훈장 받음.
1962년 한글기계화연구소 소장.
1964~1966년 동아대학교 교수.
1969년 제2회 민족상 받음.
1968~1970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이사.
1970년 국민회 이사 취임. <저서>조선민족갱생의 도(1926). 우리말본(첫째매, 1929). 중등조선말본(1934). 시골말 캐기 잡책(1936). 중등교육 조선어법(1936). 우리말본(분책, 1937). 한글의 바른길(1937). 한글갈(1940). 글자의 혁명(1947). 중등말본(1948).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1951). 한글의 투쟁(1950). 고등말본(1956). 중등말본(Ⅰ, Ⅱ, Ⅲ, 1956). 나라사랑의 길(1958). 한글 바로 적기 공부(1961). 고친 한글갈(1961). 나라 건지는 교육(1963). 한글 가로글씨 독본(1963). 배달말과 한글의 승리(1966). 한글만 쓰기의 주장(유고, 1970).

눈뫼 허웅
난 곳: 경남 김해시 동상동 965번지
난 때: 1918년 7월 26일(음력 6월 19일). 아버지: 허 수, 어머니: 윤 영순 (5남 2녀 중 3남)
1926년(8살) 4월 1932년(14살) 3월: 김해보통학교 수학, 졸업.
1932년 4월 1938년 3월: 동래고등보통학교 수학, 졸업.
병으로 휴학한(1934년 2월 1935년 3월) 뒤 3학년에 복학하자 국어를 공부하기로 결심.
1938년(20살) 4월 1939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 수학, 중퇴.
1939년(21살) 6월: 혼자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고향으로 내려감.
1940년(22살) 1942년: 폐침윤으로 요양 생활. 이 때 15세기 국어 문법을 공부하기 시작.
1942년(24살) 12월: 백 금석과 결혼. (2남 2녀)
1943년 1945년 광복: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의 인간 사냥(징용)을 모면하기 위하여 창원 용인 사설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김해 읍내의 산업 조합에서 서기 노릇도 함.
1944년(26살) 4월: 첫아들 황 출생. (김해읍 논실 333번지에서)
1945년(27살): 광복을 맞아 고향인 김해에서 한글 강습을 열어 강사 노릇 여러 차례.
1945년 9월~1947년 3월: 광신상업고등학교 교사.
1947년 4월~1947년 8월: 한성고등학교 교사.
1947년 6월: 첫딸 경순 출생. (서울 종로 5가 104번지에서)
1947년 9월: 1954년 4월: 부산대학교 조교수.
1949년 4월: 둘째딸 경미 출생. (부산 동대신동 2가 411번지에서)
1950년 3월: 첫딸 경순, 둘째딸 경미 사망.
1951년 1월: 딸 혜숙 출생. (부산 동대신동 2가 411번지에서)
1953년 3월: 딸 혜련 출생. (부산 동대신동 2가 411번지에서)
1953년 4월~1955년 3월: 성균관대학교 조교수.
1953년 7월~현재: 문화체육부 국어 심의회 한글 분과 위원회 위원.
1954년 4월~1955년 4월: 연세대학교 전임 강사.
1955년 4월~1957년 4월: 연세대학교 조교수.
1957년 4월~1958년 2월: 연세대학교 부교수.
1957년 5월~1960년 2월: 서울대학교 전임 강사.
1958년 8월: 둘째아들 원욱 출생. (서울 삼선동 4가 254번지에서)
1960년 2월~1960년 9월: 서울대학교 조교수.
1960년 4월: 한글학회 이사.
1960년 9월~1967년 3월: 서울대학교 부교수.
1967년 3월~1984년 2월: 서울대학교 교수.
1968년 3월~1975년 10월: 동아대학교 초빙 교수.
1968년 8월: 문학 박사 학위 받음. (서울 대학교)
1970년 5월~현재: 한글학회 이사장.
1970년 5월~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1970년 5월~1977년 9월: 국어 조사 연구 위원회 위원장.
1973년 3월: 제2회 외솔상(학술 부문) 받음.
1984년 2월: 국민훈장 모란장 받음.
1984년 3월~1989년 2월: 동아대학교 대학원 교수.
1984년 3월~현재: 사단법인 애산학회 이사장.
1984년 2월: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 받음. (세종 대학)
1984년 7월~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84년 9월~1986년 8월: 세종 대학 초빙 교수.
1986년 9월: 제1회 성곡 학술문화상 받음.
1986년 12월~현재: 한힌샘 주 시경 연구 모임 대표.
1987년 4월~현재: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상임고문.
1990년 10월: 제9회 세종 문화상(학술 부문) 받음.
1993년 10월: 제1회 주시경 학술상 받음.
1994년 12월~현재: 중국 상하이외국어대학 명예교수.
1995년 3월~현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1995년 12월 8일: 재단법인 한글재단 창립에 참여.
1995년 12월 19일: 희수 기념 논문집 봉정식에서 논문집 받음.
1997년 7월∼현재: 한글학회 국외 한국어 교사 연수회 특강 맡음.
1998년 5월 13일: '세종성왕 대상' 받음(세종대왕기념사업회·한일은행 공동).
2000년 2월 22일: 한글문화연대 창립에 참여(고문 맡음).
2000년 8월 17일: 남,북한 이산 가족 상호 방문단으로 왔던 북한의 원로 국어학자 류 열(83살) 님과 뜻깊은 만남을 갖고 남과 북의 언어 이질화 문제를 극복하는 데 뜻을 같이 함.
2000년 10월 16일: 대통령 영부인 이 희호 여사와 함께 '제10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 받음.
2001년 11월 20일: 부인 백 금석 여사가 세상을 떠남(79살).
2002년 11월 29일: 제2회 연세 문인상 받음.
2003년 12월 9일: 지닌 병으로 분당 서울대 병원에 입원.
2004년 1월 26일 10시 13분: 세상을 떠남. <저서>
주해 용비어천가(1955, 정음사): 용비어천가의 낱말, 말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세한 풀이. 4×6판, 352쪽.
국어 음운론(1958, 정음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국어 음운론의 공시 통시적 기술. 국판, 296쪽.
주해 월인천강지곡(1962, 신구 문화사. 이 강로와 공저): 월인천강지곡 상권에 대한 상세한 주해. 국판, 본문 180쪽, 영인 142쪽.
언어학 개론(1963, 정음사):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 국판, 391쪽.
중세국어 연구(1963, 정음사): 15세기 국어의 높임법, 성조, 인칭 대상 활용법에 대한 독창적 연구. 국판, 381쪽.
개고신판 국어 음운학(1964, 정음사): 1958년에 낸 '국어 음운론'의 대폭적인 수정판. 국판, 552쪽.
옛말본(1969, 과학사): 15세기 국어의 말본을 교과서 식으로 기술한 것. 국판, 231쪽.〈붙임〉김 계곤 만든 '낱말 풀이', 박 지홍 만든 '한자 한자말 풀이'.
우리말과 글의 내일을 위하여(1974, 과학사): 우리말과 우리글의 나아갈 길을 보여 주는 논설을 모은 것. 4×6판, 497쪽.
한글과 민족 문화(1974,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교양 국사 총서 1): 한글 창제의 우리 역사상 의의, 한글이 우리 역사 발전에 끼친 힘을 역사적 관점에서 풀이한 것. 문고판, 222쪽.
우리 옛말본-15세기 국어 형태론-(1975, 샘 문화사): 15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공시적으로 기술한 것이나, 통어론에 대한 문제도 아울러 언급된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음. 새국판, 994쪽, 표 2장.
용비어천가(1977, 형설 출판사: 어문총서 201): 용비어천가에 대한 간략한 풀이. 문고판, 198쪽.
우리말 우리글(1979, 계몽사: 문예진흥 문고 11): 우리말 우리글의 모습을 국민학교, 중학교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쉽게 쓴 것. 국판, 223쪽.
우리말과 글에 쏟아진 사랑-국어 정책론-(1979, 문성 출판사): 1974년의 '우리말과 글의 내일을 위하여'를 크게 깁보탠 것. 새국판, 660쪽.
언어학-그 대상과 방법-(1981, 샘 문화사): 1963년의 '언어학 개론'을 크게 고치고 깁보탠 것. 새국판, 497쪽.
고친판 언어학 개론(1983, 샘 문화사): 1981년의 '언어학'을 약간 간략하게 다듬은 것. 새국판, 334쪽.
국어학-우리말의 오늘 어제-(1983, 샘 문화사): 국어의 말소리, 말본, 어휘 체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오늘의 모습과 역사적으로 바뀌어 내려 온 모습을 설명한 것. 새국판, 475쪽.
국어 음운학-우리말 소리의 오늘 어제-(1985, 샘 문화사): 1964년의 '국어 음운학'을 크게 고친 것. 새국판, 606쪽.
고치판 우리말과 글에 쏟아진 사랑(1987, 샘 문화사): 1979년에 낸 같은 제목의 책의 Ⅴ장에, 1974년의 '한글과 민족 문화'를 갈음한 것. 새국판, 597쪽.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1987, 샘 문화사): 여기저기 발표한 글들로서, 앞의 책에 거두어 싣지 않았던 것과, 1979년 이후에 쓴 것들을 모은 것. 새국판, 561쪽.
국어 때매김법의 변천사(1987, 샘 문화사): 15세기에서 지금에 이르는 때매김법의 역사에 관한 다섯 편의 논문을 모은 것. 새국판, 245쪽.
16세기 우리 옛말본(1989, 샘 문화사): 16세기 국어의 역사적 변천의 모습을 체계화하여, 1975년에 낸 '우리 옛말본-15세기 국어 형태론-'과 직접적인 연계성을 갖도록 한 것. 새국판, 548쪽.
15 16세기 우리 옛말본의 역사(1991, 탑 출판사: 연세 대학교 국학 연구원 다산 기념 강좌 3): 15세기와 16세기의 말본의 역사를 공시적으로 꿰뚫어 엮은 것. 새국판, 205쪽.
최 현배-우리말 우리 얼에 바친 한평생-(1993, 동아 일보사: 근대 인물 한국사 408): 외솔 최 현배 선생의 삶과 나라 사랑의 정신, 그의 공적, 그의 언어 정책 등을 전반적으로 비추어 본 것. 국판, 234쪽.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 샘 문화사): 풍부한 현대말 자료, 독창적인 기술 방법으로 우리말 연구의 정통성을 이은 역저. 새국판, 1530쪽.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 샘 문화사):《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에 이어 4년 만에 이루어 낸 말본 기술의 완결서. 새국판, 1069쪽.
<논문>
"에, 애, 외, ㅇ"의 음가〈국어국문학 제1집, 1952. 11.〉
이조 초기 문헌의 표기법에 나타난 문법 의식〈국어국문학 제3집, 1953. 1.〉
신 숙주의 중국어 입성 처리에 대하여〈국어국문학 제5집, 1953. 6.〉
병서의 음가에 대한 반성〈국어국문학 제7집, 1953. 8.〉
존대법사〈성균학보 제1집, 1954. 2.〉
현행 맞춤법 개정론에 대한 재검토〈사상계 제2권 제4호, 1954. 6.〉
경상도 방언의 성조〈최 현배 선생 환갑 기념 논문집, 1954. 11.〉
말의 소리는 어떻게 변하는가?〈용재 백 낙준 박사 환갑 기념 국학 논총, 1955. 11.〉
방점(旁點) 연구〈동방학지 제2집, 1955. 12.〉
국어의 음운〈일석 이 희승 선생 송수 기념 논총, 1957. 4.〉
삽입모음고(揷入母音攷)-15세기 국어의 1인칭 활용과 대상 활용에 대하여-〈서울 대학교 논문집(인문.사회 과학) 제7집, 1958. 10.〉
주 시경 선생의 생애와 업적〈사상계 제7권 제1호, 1959. 1.〉
삽입모음 재고〈한글 제125호, 1959. 10.〉
서기 15세기 국어의 존대법과 그 변천〈한글 제128호, 1961. 11.〉
존대법의 문제를 다시 논함〈한글 제130호, 1962. 9.〉
한국의 언어 문자〈한국의 발견(현대인 강좌 별권), 1962. 12. 박우사〉
또 다시 인칭 대상 활용 어미로서의 [-오/우-]를 논함〈어문학(대구) 제10호, 1963. 4.〉
또 다시 존대법의 문제를 논함-이 숭녕 박사에 대하여〈한글 제131호, 1963. 4.〉
영조의 상훈(常訓)과 훈서(訓書)의 국어사적 고찰〈조 윤제 박사 회갑 기념 논문집, 1964. 4.〉
이 숭녕 박사의 '중세 국어 mood론'에 대한 비판〈한글 제133호, 1964. 5.〉
치음고(齒音攷)〈국어국문학 제27호, 1964. 8.〉
서기 15세기 국어의 사역 피동의 접사〈동아 문화 제2호, 1964. 10. 서울대 동아 문화 연구소〉
문교부 말본 통일 방안에 대한 비판〈한글 제134호, 1965. 3.〉
15세기 국어 용언의 강세 접미사〈조 명기 박사 환갑 기념 불교사학 논총, 1965. 5.〉
주 시경 선생〈한국의 인간상 4, 1965. 5. 신구 문화사〉
'인칭 어미설'에 대한 다섯번째의 논고〈한글 제135호, 1965. 10.〉
[-하(아래아)다] 용언고(用言攷)〈아세아 학보 제1집, 1965. 12. 아세아 학술 연구회〉
한글은 과연 과학적 문자인가?〈신동아, 1966. 8.〉
서기 15세기 국어의 비통사적 합성어〈아세아 학보 제2집, 1966. 10.〉
형용사 파생의 ㅂ-계 접미사〈이 병기 박사 송수 논문집, 1966. 11.〉
서기 15세기 국어를 대상으로 한 조어법의 서술 방법과 몇 가지 문제점〈동아 문화 제6집, 1966. 12.〉
서기 18세기 후반기의 국어사에 관한 약간의 자료에 대하여〈아세아 학보 제3집, 1967. 5.〉
15세기 국어의 통사적 합성어〈동방학지 제8집, 1967. 10. 연세대 국학 연구원〉
국어의 상승적 이중 모음 체계에 있어서의 빈간〈이 숭녕 박사 송수 기념 논총, 1968. 6.〉
한자는 폐지되어야 한다〈한글 제143호, 1969. 5.〉
월인천강지곡〈한국의 명저, 1969. 9. 현암사〉
용비어천가〈한국의 명저, 1969. 9. 현암사〉
현대 국어의 동형어에 대한 연구〈한글 제145호, 1970. 4.〉
현행 맞춤법 개정론에 대한 재검토〈월간 중앙, 1970. 4.〉
우리 말과 글의 내일을 위하여〈한글 제146호, 1970. 9.〉
한국어 문장과 외래어 문제〈월간 문학, 1971. 1.〉
주 시경 선생의 학문〈동방학지 제12집, 1971. 3.〉
신문 용어의 우리말화〈신문 평론, 1971. 10.〉
한글의 투쟁사-가시밭길 헤쳐 온 민족의 유산-〈주부 생활, 1971. 10.〉
15세기 국어의 토씨 연구〈한글 제150호, 1972. 9.〉
15세기 국어의 주체 대상 활용〈한글 제152호, 1973. 9.〉
15세기 국어 매인이름씨의 분류〈이 은상 박사 고희 기념 민족 문화 논총, 1973. 12.〉
남북 분단의 언어학〈월간 중앙 제71호, 1974. 2.〉
서기 15세기 국어의 때매김법〈한글 제153호, 1974. 4.〉
외래어와 한국인〈한국 아카데미 총서 3, 1975. 6. 크리스찬 아카데미〉
민족의 큰 스승 세종 대왕〈동서 사도론, 1976. 12. 을유 문고〉
15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우리말 때매김법의 변천〈세림 한국학 논총 제1집, 1977. 세림 장학회〉
국어의 위기〈뿌리 깊은 나무, 1977. 10.〉
한국어의 구조와 발달〈한국사 23, 1977. 12. 국사 편찬 위원회〉
국어 순화는 왜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민족 문화 연구 제11호, 1977. 6. 고려대 민족 문화 연구소〉
*약간 수정하여, '국어 순화의 길'(국어 순화 추진회 엮음, 1978. 4.)에 다시 실음.
17세기 국어 때매김법 연구〈한글 제164호, 1979. 6.〉
18세기의 국어 때매김법 연구〈애산 학보 제1집, 1981. 12. 애산 학회〉
19세기 국어 때매김법 연구〈한글 제177호, 1982. 9.〉
한국말 때매김법의 걸어온 발자취〈한글 제178호, 1982. 12.〉
국어사의 측면으로 본 국문판 '택리지'의 언어 분석〈애산 학보 제3집, 1983. 8.〉
국어의 변동 규칙과 한글 맞춤법〈한글 제187호, 1985. 3.〉
변동규칙과 음운규칙의 역사성〈말 제10집, 1985. 12. 연세대 한국어 학당〉
16세기 우리말 의향법(마침법)에 대한 연구-15세기에서 바뀌어 온 자취를 더듬는다-〈한글 제201 202호, 1988. 12.
난 곳: 경남 김해시 동상동 965번지
난 때: 1918년 7월 26일(음력 6월 19일). 아버지: 허 수, 어머니: 윤 영순 (5남 2녀 중 3남)
1926년(8살) 4월 1932년(14살) 3월: 김해보통학교 수학, 졸업.
1932년 4월 1938년 3월: 동래고등보통학교 수학, 졸업.
병으로 휴학한(1934년 2월 1935년 3월) 뒤 3학년에 복학하자 국어를 공부하기로 결심.
1938년(20살) 4월 1939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 수학, 중퇴.
1939년(21살) 6월: 혼자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고향으로 내려감.
1940년(22살) 1942년: 폐침윤으로 요양 생활. 이 때 15세기 국어 문법을 공부하기 시작.
1942년(24살) 12월: 백 금석과 결혼. (2남 2녀)
1943년 1945년 광복: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의 인간 사냥(징용)을 모면하기 위하여 창원 용인 사설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김해 읍내의 산업 조합에서 서기 노릇도 함.
1944년(26살) 4월: 첫아들 황 출생. (김해읍 논실 333번지에서)
1945년(27살): 광복을 맞아 고향인 김해에서 한글 강습을 열어 강사 노릇 여러 차례.
1945년 9월~1947년 3월: 광신상업고등학교 교사.
1947년 4월~1947년 8월: 한성고등학교 교사.
1947년 6월: 첫딸 경순 출생. (서울 종로 5가 104번지에서)
1947년 9월: 1954년 4월: 부산대학교 조교수.
1949년 4월: 둘째딸 경미 출생. (부산 동대신동 2가 411번지에서)
1950년 3월: 첫딸 경순, 둘째딸 경미 사망.
1951년 1월: 딸 혜숙 출생. (부산 동대신동 2가 411번지에서)
1953년 3월: 딸 혜련 출생. (부산 동대신동 2가 411번지에서)
1953년 4월~1955년 3월: 성균관대학교 조교수.
1953년 7월~현재: 문화체육부 국어 심의회 한글 분과 위원회 위원.
1954년 4월~1955년 4월: 연세대학교 전임 강사.
1955년 4월~1957년 4월: 연세대학교 조교수.
1957년 4월~1958년 2월: 연세대학교 부교수.
1957년 5월~1960년 2월: 서울대학교 전임 강사.
1958년 8월: 둘째아들 원욱 출생. (서울 삼선동 4가 254번지에서)
1960년 2월~1960년 9월: 서울대학교 조교수.
1960년 4월: 한글학회 이사.
1960년 9월~1967년 3월: 서울대학교 부교수.
1967년 3월~1984년 2월: 서울대학교 교수.
1968년 3월~1975년 10월: 동아대학교 초빙 교수.
1968년 8월: 문학 박사 학위 받음. (서울 대학교)
1970년 5월~현재: 한글학회 이사장.
1970년 5월~현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1970년 5월~1977년 9월: 국어 조사 연구 위원회 위원장.
1973년 3월: 제2회 외솔상(학술 부문) 받음.
1984년 2월: 국민훈장 모란장 받음.
1984년 3월~1989년 2월: 동아대학교 대학원 교수.
1984년 3월~현재: 사단법인 애산학회 이사장.
1984년 2월: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 받음. (세종 대학)
1984년 7월~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84년 9월~1986년 8월: 세종 대학 초빙 교수.
1986년 9월: 제1회 성곡 학술문화상 받음.
1986년 12월~현재: 한힌샘 주 시경 연구 모임 대표.
1987년 4월~현재: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상임고문.
1990년 10월: 제9회 세종 문화상(학술 부문) 받음.
1993년 10월: 제1회 주시경 학술상 받음.
1994년 12월~현재: 중국 상하이외국어대학 명예교수.
1995년 3월~현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1995년 12월 8일: 재단법인 한글재단 창립에 참여.
1995년 12월 19일: 희수 기념 논문집 봉정식에서 논문집 받음.
1997년 7월∼현재: 한글학회 국외 한국어 교사 연수회 특강 맡음.
1998년 5월 13일: '세종성왕 대상' 받음(세종대왕기념사업회·한일은행 공동).
2000년 2월 22일: 한글문화연대 창립에 참여(고문 맡음).
2000년 8월 17일: 남,북한 이산 가족 상호 방문단으로 왔던 북한의 원로 국어학자 류 열(83살) 님과 뜻깊은 만남을 갖고 남과 북의 언어 이질화 문제를 극복하는 데 뜻을 같이 함.
2000년 10월 16일: 대통령 영부인 이 희호 여사와 함께 '제10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 받음.
2001년 11월 20일: 부인 백 금석 여사가 세상을 떠남(79살).
2002년 11월 29일: 제2회 연세 문인상 받음.
2003년 12월 9일: 지닌 병으로 분당 서울대 병원에 입원.
2004년 1월 26일 10시 13분: 세상을 떠남. <저서>
주해 용비어천가(1955, 정음사): 용비어천가의 낱말, 말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세한 풀이. 4×6판, 352쪽.
국어 음운론(1958, 정음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국어 음운론의 공시 통시적 기술. 국판, 296쪽.
주해 월인천강지곡(1962, 신구 문화사. 이 강로와 공저): 월인천강지곡 상권에 대한 상세한 주해. 국판, 본문 180쪽, 영인 142쪽.
언어학 개론(1963, 정음사):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 국판, 391쪽.
중세국어 연구(1963, 정음사): 15세기 국어의 높임법, 성조, 인칭 대상 활용법에 대한 독창적 연구. 국판, 381쪽.
개고신판 국어 음운학(1964, 정음사): 1958년에 낸 '국어 음운론'의 대폭적인 수정판. 국판, 552쪽.
옛말본(1969, 과학사): 15세기 국어의 말본을 교과서 식으로 기술한 것. 국판, 231쪽.〈붙임〉김 계곤 만든 '낱말 풀이', 박 지홍 만든 '한자 한자말 풀이'.
우리말과 글의 내일을 위하여(1974, 과학사): 우리말과 우리글의 나아갈 길을 보여 주는 논설을 모은 것. 4×6판, 497쪽.
한글과 민족 문화(1974,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교양 국사 총서 1): 한글 창제의 우리 역사상 의의, 한글이 우리 역사 발전에 끼친 힘을 역사적 관점에서 풀이한 것. 문고판, 222쪽.
우리 옛말본-15세기 국어 형태론-(1975, 샘 문화사): 15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공시적으로 기술한 것이나, 통어론에 대한 문제도 아울러 언급된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음. 새국판, 994쪽, 표 2장.
용비어천가(1977, 형설 출판사: 어문총서 201): 용비어천가에 대한 간략한 풀이. 문고판, 198쪽.
우리말 우리글(1979, 계몽사: 문예진흥 문고 11): 우리말 우리글의 모습을 국민학교, 중학교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쉽게 쓴 것. 국판, 223쪽.
우리말과 글에 쏟아진 사랑-국어 정책론-(1979, 문성 출판사): 1974년의 '우리말과 글의 내일을 위하여'를 크게 깁보탠 것. 새국판, 660쪽.
언어학-그 대상과 방법-(1981, 샘 문화사): 1963년의 '언어학 개론'을 크게 고치고 깁보탠 것. 새국판, 497쪽.
고친판 언어학 개론(1983, 샘 문화사): 1981년의 '언어학'을 약간 간략하게 다듬은 것. 새국판, 334쪽.
국어학-우리말의 오늘 어제-(1983, 샘 문화사): 국어의 말소리, 말본, 어휘 체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오늘의 모습과 역사적으로 바뀌어 내려 온 모습을 설명한 것. 새국판, 475쪽.
국어 음운학-우리말 소리의 오늘 어제-(1985, 샘 문화사): 1964년의 '국어 음운학'을 크게 고친 것. 새국판, 606쪽.
고치판 우리말과 글에 쏟아진 사랑(1987, 샘 문화사): 1979년에 낸 같은 제목의 책의 Ⅴ장에, 1974년의 '한글과 민족 문화'를 갈음한 것. 새국판, 597쪽.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1987, 샘 문화사): 여기저기 발표한 글들로서, 앞의 책에 거두어 싣지 않았던 것과, 1979년 이후에 쓴 것들을 모은 것. 새국판, 561쪽.
국어 때매김법의 변천사(1987, 샘 문화사): 15세기에서 지금에 이르는 때매김법의 역사에 관한 다섯 편의 논문을 모은 것. 새국판, 245쪽.
16세기 우리 옛말본(1989, 샘 문화사): 16세기 국어의 역사적 변천의 모습을 체계화하여, 1975년에 낸 '우리 옛말본-15세기 국어 형태론-'과 직접적인 연계성을 갖도록 한 것. 새국판, 548쪽.
15 16세기 우리 옛말본의 역사(1991, 탑 출판사: 연세 대학교 국학 연구원 다산 기념 강좌 3): 15세기와 16세기의 말본의 역사를 공시적으로 꿰뚫어 엮은 것. 새국판, 205쪽.
최 현배-우리말 우리 얼에 바친 한평생-(1993, 동아 일보사: 근대 인물 한국사 408): 외솔 최 현배 선생의 삶과 나라 사랑의 정신, 그의 공적, 그의 언어 정책 등을 전반적으로 비추어 본 것. 국판, 234쪽.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 샘 문화사): 풍부한 현대말 자료, 독창적인 기술 방법으로 우리말 연구의 정통성을 이은 역저. 새국판, 1530쪽.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 샘 문화사):《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에 이어 4년 만에 이루어 낸 말본 기술의 완결서. 새국판, 1069쪽.
<논문>
"에, 애, 외, ㅇ"의 음가〈국어국문학 제1집, 1952. 11.〉
이조 초기 문헌의 표기법에 나타난 문법 의식〈국어국문학 제3집, 1953. 1.〉
신 숙주의 중국어 입성 처리에 대하여〈국어국문학 제5집, 1953. 6.〉
병서의 음가에 대한 반성〈국어국문학 제7집, 1953. 8.〉
존대법사〈성균학보 제1집, 1954. 2.〉
현행 맞춤법 개정론에 대한 재검토〈사상계 제2권 제4호, 1954. 6.〉
경상도 방언의 성조〈최 현배 선생 환갑 기념 논문집, 1954. 11.〉
말의 소리는 어떻게 변하는가?〈용재 백 낙준 박사 환갑 기념 국학 논총, 1955. 11.〉
방점(旁點) 연구〈동방학지 제2집, 1955. 12.〉
국어의 음운〈일석 이 희승 선생 송수 기념 논총, 1957. 4.〉
삽입모음고(揷入母音攷)-15세기 국어의 1인칭 활용과 대상 활용에 대하여-〈서울 대학교 논문집(인문.사회 과학) 제7집, 1958. 10.〉
주 시경 선생의 생애와 업적〈사상계 제7권 제1호, 1959. 1.〉
삽입모음 재고〈한글 제125호, 1959. 10.〉
서기 15세기 국어의 존대법과 그 변천〈한글 제128호, 1961. 11.〉
존대법의 문제를 다시 논함〈한글 제130호, 1962. 9.〉
한국의 언어 문자〈한국의 발견(현대인 강좌 별권), 1962. 12. 박우사〉
또 다시 인칭 대상 활용 어미로서의 [-오/우-]를 논함〈어문학(대구) 제10호, 1963. 4.〉
또 다시 존대법의 문제를 논함-이 숭녕 박사에 대하여〈한글 제131호, 1963. 4.〉
영조의 상훈(常訓)과 훈서(訓書)의 국어사적 고찰〈조 윤제 박사 회갑 기념 논문집, 1964. 4.〉
이 숭녕 박사의 '중세 국어 mood론'에 대한 비판〈한글 제133호, 1964. 5.〉
치음고(齒音攷)〈국어국문학 제27호, 1964. 8.〉
서기 15세기 국어의 사역 피동의 접사〈동아 문화 제2호, 1964. 10. 서울대 동아 문화 연구소〉
문교부 말본 통일 방안에 대한 비판〈한글 제134호, 1965. 3.〉
15세기 국어 용언의 강세 접미사〈조 명기 박사 환갑 기념 불교사학 논총, 1965. 5.〉
주 시경 선생〈한국의 인간상 4, 1965. 5. 신구 문화사〉
'인칭 어미설'에 대한 다섯번째의 논고〈한글 제135호, 1965. 10.〉
[-하(아래아)다] 용언고(用言攷)〈아세아 학보 제1집, 1965. 12. 아세아 학술 연구회〉
한글은 과연 과학적 문자인가?〈신동아, 1966. 8.〉
서기 15세기 국어의 비통사적 합성어〈아세아 학보 제2집, 1966. 10.〉
형용사 파생의 ㅂ-계 접미사〈이 병기 박사 송수 논문집, 1966. 11.〉
서기 15세기 국어를 대상으로 한 조어법의 서술 방법과 몇 가지 문제점〈동아 문화 제6집, 1966. 12.〉
서기 18세기 후반기의 국어사에 관한 약간의 자료에 대하여〈아세아 학보 제3집, 1967. 5.〉
15세기 국어의 통사적 합성어〈동방학지 제8집, 1967. 10. 연세대 국학 연구원〉
국어의 상승적 이중 모음 체계에 있어서의 빈간〈이 숭녕 박사 송수 기념 논총, 1968. 6.〉
한자는 폐지되어야 한다〈한글 제143호, 1969. 5.〉
월인천강지곡〈한국의 명저, 1969. 9. 현암사〉
용비어천가〈한국의 명저, 1969. 9. 현암사〉
현대 국어의 동형어에 대한 연구〈한글 제145호, 1970. 4.〉
현행 맞춤법 개정론에 대한 재검토〈월간 중앙, 1970. 4.〉
우리 말과 글의 내일을 위하여〈한글 제146호, 1970. 9.〉
한국어 문장과 외래어 문제〈월간 문학, 1971. 1.〉
주 시경 선생의 학문〈동방학지 제12집, 1971. 3.〉
신문 용어의 우리말화〈신문 평론, 1971. 10.〉
한글의 투쟁사-가시밭길 헤쳐 온 민족의 유산-〈주부 생활, 1971. 10.〉
15세기 국어의 토씨 연구〈한글 제150호, 1972. 9.〉
15세기 국어의 주체 대상 활용〈한글 제152호, 1973. 9.〉
15세기 국어 매인이름씨의 분류〈이 은상 박사 고희 기념 민족 문화 논총, 1973. 12.〉
남북 분단의 언어학〈월간 중앙 제71호, 1974. 2.〉
서기 15세기 국어의 때매김법〈한글 제153호, 1974. 4.〉
외래어와 한국인〈한국 아카데미 총서 3, 1975. 6. 크리스찬 아카데미〉
민족의 큰 스승 세종 대왕〈동서 사도론, 1976. 12. 을유 문고〉
15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우리말 때매김법의 변천〈세림 한국학 논총 제1집, 1977. 세림 장학회〉
국어의 위기〈뿌리 깊은 나무, 1977. 10.〉
한국어의 구조와 발달〈한국사 23, 1977. 12. 국사 편찬 위원회〉
국어 순화는 왜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민족 문화 연구 제11호, 1977. 6. 고려대 민족 문화 연구소〉
*약간 수정하여, '국어 순화의 길'(국어 순화 추진회 엮음, 1978. 4.)에 다시 실음.
17세기 국어 때매김법 연구〈한글 제164호, 1979. 6.〉
18세기의 국어 때매김법 연구〈애산 학보 제1집, 1981. 12. 애산 학회〉
19세기 국어 때매김법 연구〈한글 제177호, 1982. 9.〉
한국말 때매김법의 걸어온 발자취〈한글 제178호, 1982. 12.〉
국어사의 측면으로 본 국문판 '택리지'의 언어 분석〈애산 학보 제3집, 1983. 8.〉
국어의 변동 규칙과 한글 맞춤법〈한글 제187호, 1985. 3.〉
변동규칙과 음운규칙의 역사성〈말 제10집, 1985. 12. 연세대 한국어 학당〉
16세기 우리말 의향법(마침법)에 대한 연구-15세기에서 바뀌어 온 자취를 더듬는다-〈한글 제201 202호, 1988. 12.

강희안
1417(태종 17)~1464(세조 1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 본관은 진주, 지돈령부사 석덕의 아들, 희맹의 형.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옴.
1456(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1458년 호조 참의가 됨.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정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함.
세종 때 금인 소신지보와 세조 때 을해자의 글씨를 쓴 바 있음.
1417(태종 17)~1464(세조 1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 본관은 진주, 지돈령부사 석덕의 아들, 희맹의 형.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옴.
1456(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1458년 호조 참의가 됨.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정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함.
세종 때 금인 소신지보와 세조 때 을해자의 글씨를 쓴 바 있음.

박팽년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인수, 호는 취금현, 본관은 순천, 판서 중림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음.
1438년 사가독서를 했고,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함.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이라고 칭한 일이 없음.
1456년 형조 참판으로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사형당함. 뒤에 아버지, 동생 대년, 아들 헌도 사형됨.
과천의 민절서원, 홍주의 노운서원 등 여러 사원에 제향, 이조 판에 추증, 시호는 충정.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인수, 호는 취금현, 본관은 순천, 판서 중림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음.
1438년 사가독서를 했고,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함.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이라고 칭한 일이 없음.
1456년 형조 참판으로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사형당함. 뒤에 아버지, 동생 대년, 아들 헌도 사형됨.
과천의 민절서원, 홍주의 노운서원 등 여러 사원에 제향, 이조 판에 추증, 시호는 충정.

성삼문
1418(태종 18)~1456(세조 2). 조선의 학자.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근보, 눌옹, 호는 매죽헌. 본관은 창녕, 도총관 승의 아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하위지와 함께 급제.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
집현전 학사에서 집현전수찬, 직집현전을 거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을 편찬. 경연관이 되어 항상 세종을 가까이에서 모셔 총애를 받음.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고,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의 창제를 앞두고 당시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 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여러 번 건너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함.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도 박팽년, 신숙주, 최항, 이개 등과 함께 항상 배종함.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집현전 신하들에게 정난공신의 호를 내리자,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이를 수치로 여겨 혼자 열지 않았다.
1455년 예방 승지로서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새를 안고 통곡했으며, 이듬해 좌부승지로서 아버지 승, 박평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 4월에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상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 권남, 정인지 등 일파를 없애기로 했으나, 당일 운검을 그만두게 되어 후일을 기다리기로 함.
이에 같은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성사아 안 될 것을 우려하여 밀고,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을 받고, 군기감 앞에서 거열의 극형을 받음.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 삼고, 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 맹년, 맹종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676년(숙종 2) 홍주 노은동에 있는 그의 옛집 옆에 세워진 녹운서원, 1681년 육신묘가 있는 노량진에 세워진 민절서원 외에 영월의 창절서원, 의성의 학산 충렬사, 창녕의 물계 세덕사, 연산의 충곡서원 등에 6신과 함께 제향,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 시호는 충문.
1418(태종 18)~1456(세조 2). 조선의 학자.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근보, 눌옹, 호는 매죽헌. 본관은 창녕, 도총관 승의 아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하위지와 함께 급제.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
집현전 학사에서 집현전수찬, 직집현전을 거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을 편찬. 경연관이 되어 항상 세종을 가까이에서 모셔 총애를 받음.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고,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의 창제를 앞두고 당시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 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여러 번 건너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함.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도 박팽년, 신숙주, 최항, 이개 등과 함께 항상 배종함.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집현전 신하들에게 정난공신의 호를 내리자,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이를 수치로 여겨 혼자 열지 않았다.
1455년 예방 승지로서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새를 안고 통곡했으며, 이듬해 좌부승지로서 아버지 승, 박평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 4월에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상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 권남, 정인지 등 일파를 없애기로 했으나, 당일 운검을 그만두게 되어 후일을 기다리기로 함.
이에 같은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성사아 안 될 것을 우려하여 밀고,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을 받고, 군기감 앞에서 거열의 극형을 받음.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 삼고, 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 맹년, 맹종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676년(숙종 2) 홍주 노은동에 있는 그의 옛집 옆에 세워진 녹운서원, 1681년 육신묘가 있는 노량진에 세워진 민절서원 외에 영월의 창절서원, 의성의 학산 충렬사, 창녕의 물계 세덕사, 연산의 충곡서원 등에 6신과 함께 제향,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 시호는 충문.

신숙주
1417(태종 17)~1475(성종 6). 조선의 학자, 문신.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희현당, 본관은 고령, 공조 우참판 장의 아들.
1438년(세종 20)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 전농시 직장을 지내고, 1441년 집현전 부수찬이 됨.
1443년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가서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도에 들러 계해약조를 체결했다. 그 후 집현전의 수찬을 지내면서 여러 번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림 학사 황찬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듣고 와서 세종을 도와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큰 공을 세움.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응교에 특진, 이어 장령, 집의, 부제학을 역임.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부승지에 올라 계유정란에 참여, 정란공신 2등이 됨.
1454년(단종 2) 도승지에 승진,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좌익공신 1등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이 해 주문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병조 판서, 판중추원사 겸 판병조사, 우찬성 겸 판병조사,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옥사가 일어나자 1457년(세조 3) 좌찬성으로서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 단종을 자의하게 함.
1458년 우의정에 올라 고령부원군에 진봉, 1459년 좌의정에 승진하고, 1460년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로서 모련위의 야인을 정벌, 1662년 영의정이 됨.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이 되었고, 이 해 남이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 1등이 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성종을 잘 보좌하여 다시 죄리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재임됨.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써 6대 왕을 섬기면서 "국조오례의", "동국정운", "국조보감", "세조실록", "영모록" 등을 찬수했다. 세종 때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소장학자의 한 사람이었으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1417(태종 17)~1475(성종 6). 조선의 학자, 문신.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희현당, 본관은 고령, 공조 우참판 장의 아들.
1438년(세종 20)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 전농시 직장을 지내고, 1441년 집현전 부수찬이 됨.
1443년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가서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도에 들러 계해약조를 체결했다. 그 후 집현전의 수찬을 지내면서 여러 번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림 학사 황찬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듣고 와서 세종을 도와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큰 공을 세움.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응교에 특진, 이어 장령, 집의, 부제학을 역임.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부승지에 올라 계유정란에 참여, 정란공신 2등이 됨.
1454년(단종 2) 도승지에 승진,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좌익공신 1등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이 해 주문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병조 판서, 판중추원사 겸 판병조사, 우찬성 겸 판병조사,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옥사가 일어나자 1457년(세조 3) 좌찬성으로서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 단종을 자의하게 함.
1458년 우의정에 올라 고령부원군에 진봉, 1459년 좌의정에 승진하고, 1460년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로서 모련위의 야인을 정벌, 1662년 영의정이 됨.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이 되었고, 이 해 남이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 1등이 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성종을 잘 보좌하여 다시 죄리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재임됨.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써 6대 왕을 섬기면서 "국조오례의", "동국정운", "국조보감", "세조실록", "영모록" 등을 찬수했다. 세종 때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소장학자의 한 사람이었으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이개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의 충신.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청보, 백고, 호는 백옥헌, 본관은 한산, 이색의 증손.
1436년(세종 18) 문과에 급제, 1441년 저작랑으로 "명황계감"의 편찬에 참여,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함.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하고, 1456년(세조 2) 직제학에 이름.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죽음. 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진상을 밝히도록 강요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처형당함.
시문이 청절하고 글씨를 잘 썼다. 대구의 낙빈서원, 과천의 민절서원, 충주의 노운서원, 한산의 문헌서원, 연산의 돈암서원, 의성의 충령사, 영변의 창절사에 제향.
1758년(영조 34) 이조 판에 추증, 시호는 의열, 뒤에 충간으로 개시.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의 충신.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청보, 백고, 호는 백옥헌, 본관은 한산, 이색의 증손.
1436년(세종 18) 문과에 급제, 1441년 저작랑으로 "명황계감"의 편찬에 참여,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함.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하고, 1456년(세조 2) 직제학에 이름.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죽음. 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진상을 밝히도록 강요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처형당함.
시문이 청절하고 글씨를 잘 썼다. 대구의 낙빈서원, 과천의 민절서원, 충주의 노운서원, 한산의 문헌서원, 연산의 돈암서원, 의성의 충령사, 영변의 창절사에 제향.
1758년(영조 34) 이조 판에 추증, 시호는 의열, 뒤에 충간으로 개시.

정인지
1396(태조 5)~1478(성종 9). 조선의 문신, 학자. 자는 백휴, 호는 학역재, 본관은 하동, 석성 현감 흥인의 아들.
1411년 생원이 되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 예빈주부, 사헌 감찰, 예조 좌랑을 지낸 뒤 1418년(세종 즉위) 병조 좌랑에 전임되었다.
그 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거쳐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고, 집현전 응교에 이어 1425년에 집현전 직제학에 오름.
1427년 문과중시에 장원, 이해 좌필선,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을 겸임함.
1430년에 우군 동지총제가 되고, 이듬해 대제학 정초와 함께 대통력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을 지어 역법을 개정.
1432년 예문과 제학, 동지춘추관사를 지냄. 이듬해 인수부윤에 이어 이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을으로 사직함.
1439년 형조참판으로 등용되어 이듬해 형조 판서에 승진, 이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442년 예문과 대제학으로 "사륜요집"을 편찬.
1443년 지중추원사로서 전제상정소가 설치되자 제조를 지내고 1445년 우참찬으로 "치평요람"을 찬진함.
예조 판서를 거쳐 1448년 이조 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했고, 그 후 공조 판서, 좌참찬을 지냄.
1452년(문종 2) 병조 판서에 전임, 1453년(단종 1) 판중추부사로 계유정난에 수양대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에 봉해짐.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오르고 좌익공신 2등이 되었으며, 1458년(세조 4) 공신연에서 불서의 간행을 반대하다가 고신을 빼앗기고 부여에 부처되었다. 몇 달 뒤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됨.
1465년 나이 70으로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을 하사받았고, 1468년(예종 즉위)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다시 익대공신 3등이 됨.
1470년(성종 1) 원상으로서 서정을 총괄, 이듬해 좌리공신 2등이 됨.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 천문, 역법, 아악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고, 김종서 등과 "고려사"를 찬수, 한편 세종을 도와 성삼문, 신숙자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제, 안지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1396(태조 5)~1478(성종 9). 조선의 문신, 학자. 자는 백휴, 호는 학역재, 본관은 하동, 석성 현감 흥인의 아들.
1411년 생원이 되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 예빈주부, 사헌 감찰, 예조 좌랑을 지낸 뒤 1418년(세종 즉위) 병조 좌랑에 전임되었다.
그 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거쳐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고, 집현전 응교에 이어 1425년에 집현전 직제학에 오름.
1427년 문과중시에 장원, 이해 좌필선,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을 겸임함.
1430년에 우군 동지총제가 되고, 이듬해 대제학 정초와 함께 대통력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을 지어 역법을 개정.
1432년 예문과 제학, 동지춘추관사를 지냄. 이듬해 인수부윤에 이어 이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을으로 사직함.
1439년 형조참판으로 등용되어 이듬해 형조 판서에 승진, 이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442년 예문과 대제학으로 "사륜요집"을 편찬.
1443년 지중추원사로서 전제상정소가 설치되자 제조를 지내고 1445년 우참찬으로 "치평요람"을 찬진함.
예조 판서를 거쳐 1448년 이조 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했고, 그 후 공조 판서, 좌참찬을 지냄.
1452년(문종 2) 병조 판서에 전임, 1453년(단종 1) 판중추부사로 계유정난에 수양대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에 봉해짐.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오르고 좌익공신 2등이 되었으며, 1458년(세조 4) 공신연에서 불서의 간행을 반대하다가 고신을 빼앗기고 부여에 부처되었다. 몇 달 뒤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됨.
1465년 나이 70으로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을 하사받았고, 1468년(예종 즉위)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다시 익대공신 3등이 됨.
1470년(성종 1) 원상으로서 서정을 총괄, 이듬해 좌리공신 2등이 됨.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 천문, 역법, 아악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고, 김종서 등과 "고려사"를 찬수, 한편 세종을 도와 성삼문, 신숙자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제, 안지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최항
1409(태종 9)~1474(성종 5). 조선의 문신, 학자. 자는 정보, 호는 태허정, 동량, 본관은 삭녕, 증 영의정 사유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이어 정인지,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4년 집현전 교리로 오례를 찬진함.
이듬해 집현전 응교로서 "용비어천가"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함.
1448년 집현전 직제학에 오름.
1450년(문종 즉위) 선위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우사간대부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1451년 좌사간대부로 수사관을 겸하여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했고, 집현전 부제학에 올라 "통감훈의"를 편찬, 그 공으로 가자됨. 이어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1453년(단종 1) 동부승지로 수양대군ㅇ을 도와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 1등이 되고 도승지에 오름.
1452년 이조 참판으로 영성군에 봉해지고, 1455년(세조 1) 대사헌이 되어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호조와 이조의 참판을 역임.
1458년 형조와 공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중추원사를 거쳐 예문과 대제학으로 대사성을 겸함.
1460년 이조 판서를 지낸 뒤, 이듬해 양성지의 "잠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행, 이 해 다시 왕명으로 "경국대전"의 편찬에 착수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법률, 제도를 집대성함.
1463년 우참찬, 좌참찬을 역임, 이해 "동국통감"의 찬수를 시작하는 한편 식숙주 등과 "어제유장설"을 주해함.
1464년 어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구두가 불명하던 "사서오경"에 구결을 달았고, 1466년(세조 12) 판병조사를 거쳐 좌찬성을 역임, 다음해 우의정이 됨.
이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고, 1649년(예종 1) 경국대전상정소 제조를 겸하여 오랫동안 끌어온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며, 이어 "무정보감"을 찬수함.
1650년 부원군에 진봉,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1등이 되고, 감춘추관사로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함.
1409(태종 9)~1474(성종 5). 조선의 문신, 학자. 자는 정보, 호는 태허정, 동량, 본관은 삭녕, 증 영의정 사유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이어 정인지,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4년 집현전 교리로 오례를 찬진함.
이듬해 집현전 응교로서 "용비어천가"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함.
1448년 집현전 직제학에 오름.
1450년(문종 즉위) 선위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우사간대부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1451년 좌사간대부로 수사관을 겸하여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했고, 집현전 부제학에 올라 "통감훈의"를 편찬, 그 공으로 가자됨. 이어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1453년(단종 1) 동부승지로 수양대군ㅇ을 도와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 1등이 되고 도승지에 오름.
1452년 이조 참판으로 영성군에 봉해지고, 1455년(세조 1) 대사헌이 되어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호조와 이조의 참판을 역임.
1458년 형조와 공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중추원사를 거쳐 예문과 대제학으로 대사성을 겸함.
1460년 이조 판서를 지낸 뒤, 이듬해 양성지의 "잠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행, 이 해 다시 왕명으로 "경국대전"의 편찬에 착수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법률, 제도를 집대성함.
1463년 우참찬, 좌참찬을 역임, 이해 "동국통감"의 찬수를 시작하는 한편 식숙주 등과 "어제유장설"을 주해함.
1464년 어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구두가 불명하던 "사서오경"에 구결을 달았고, 1466년(세조 12) 판병조사를 거쳐 좌찬성을 역임, 다음해 우의정이 됨.
이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고, 1649년(예종 1) 경국대전상정소 제조를 겸하여 오랫동안 끌어온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며, 이어 "무정보감"을 찬수함.
1650년 부원군에 진봉,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1등이 되고, 감춘추관사로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함.

열운 장지영
1887~1976. 국어학자. 문학박사. 서울 태생.
한성외국어학교 졸업.
주시경 선생에게 한글을 배움.
한성외국어학교 부교관, 오산학교·상동청년학교·경신중학교·양정중학교 교원.
물산장려회 회원(1912). 조선어 연구회 창립 회원(1921). 신간회 회원(1927).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1931~1933). 표준말 사정 위원(1935~1936).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옥고.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부국장(1946~1949).
세종중등교원 양성소 소장. 연희대학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제주대학교 교수.
1958년 대통령 교육 공로 표창.
대한교육연합회장. <저서>조선어전(1924), 조선어 철자법 강좌(1930), 중국어 회화 전서(1939), 국어 입문(1946), 옛글(1946), 향가(1955), 홍길동전(1964), 심청전(1964), 이두사전(유고, 1976).
1887~1976. 국어학자. 문학박사. 서울 태생.
한성외국어학교 졸업.
주시경 선생에게 한글을 배움.
한성외국어학교 부교관, 오산학교·상동청년학교·경신중학교·양정중학교 교원.
물산장려회 회원(1912). 조선어 연구회 창립 회원(1921). 신간회 회원(1927).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1931~1933). 표준말 사정 위원(1935~1936).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옥고.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부국장(1946~1949).
세종중등교원 양성소 소장. 연희대학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제주대학교 교수.
1958년 대통령 교육 공로 표창.
대한교육연합회장. <저서>조선어전(1924), 조선어 철자법 강좌(1930), 중국어 회화 전서(1939), 국어 입문(1946), 옛글(1946), 향가(1955), 홍길동전(1964), 심청전(1964), 이두사전(유고, 1976).